여건상 영화관을 1년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가끔씩 찾습니다. 어쩌다 영화관에 가도 팝콘은 너무 비싸서 잘 먹지 않아요. 남들이 먹는 팝콘 냄새와 사각거리는 소리 만으로도 영화관에 왔다는 만족감을 누리기엔 충분합니다. 가까이하기엔 심리적인 거리가 있지만 후각과 상징 만으로 행복을 주는 것, 영화. 그래서 닉네임을 고민하면서 팝콘을 떠올렸을 지도 몰라요.

잡설이 길어졌네요. 저는 압도당할 듯한 스크린과 공간감을 느끼는 대신 IPTV 서비스를 애용하는 편입니다. 이 서비스 중에서도 주로 무료 영화 목록을 이 잡듯이 뒤적이는 편인데요. 운이 좋으면 인지도는 낮지만 작품성이 아주 뛰어난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불법’이라는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는 건 덤입니다!) 극장동시상영 작품을 제외한다면 오히려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여러 번 보아도 아깝지 않을 국내외 작품이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책정된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이야기 하려는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도 실은 그렇게 만나게 된 영화이기도 합니다.

※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TV로 영화를 틀 때 선택의 기준은 감독, 배우, 영화 설명과 평점 정도 입니다. 가끔 좀 더 확신이 필요하다 싶을 때면 스틸 이미지도 찾아 봅니다. 그렇게 해도 긴가민가 할 때엔 인터넷 검색이 등판하죠! 사실 이 영화는 보겠다고 결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습니다. 감독인 ‘프랑수와 오종’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이미 70%는 넘어왔거든요. 감독의 모든 작품을 본 것은 아니지만 <8명의 여인들>, <타임 투 리브>, <리키>를 인상깊게 봤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 개성있고 유능한 프랑스 대표 감독이란 건 많은 분들이 아실테고, 저 역시 동의합니다. 감독의 이름을 확인하고, 영화를 보기로 결심하고 나서 간략한 줄거리 설명을 읽어 보았습니다. 알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줄거리는 그야말로 겉껍질만 알려 주고 있으니까요.

una-nuova-amica

[그럴 땐 포스터를 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감이 안오는군요.. ]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에는 3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합니다.  사진 속에서 당신을 응시하고 있는 클레어, 그녀는 인생의 가장 큰 기둥과도 같던 친구 로라를 잃습니다. 영화는 로라의 장례식으로 시작되는데, 그녀의 곁에는 남편인 질레와 로라의 남편 데이빗이 서 있죠. 로라의 장례식을 치루는 동안 그들은 커다란 슬픔을 함께 껴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이별 이후, 새로운 인물(사적인 여자친구)의 등장과 함께 남겨진 이들이 치유받으며 다른 빛깔의 관계를 맺어가리라고 예상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이 영화에는 더 이상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une-nouvelle-amie-clip-1-sd-goldposter
[뜨든_그렇다면_당신은_누구신가요.jpg]

데이빗과 아기를 보러 찾아간 로라는 그곳에서 낯선 사람과 마주칩니다. 그리고 곧 그 사람이 데이빗이란 것도 알아채죠. 데이빗이 여성을 사랑하고, 그만큼 여성의 전유물(여성의 속옷, 치마, 화장품 등)을 가지고 자신을 꾸미는 일 역시 아주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 영화 초반부에 바로 드러납니다. 여기서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죠. 반전은 결정적인 요소이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미리 안다고 맥이 풀리진 않습니다. 썰을 풀기 위한 포석과도 같거든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는 바로 죽은 로라의 남편 데이빗, 정확히는 클레어가 남편에게 둘러댄, 아는 여자친구 “버지니아” 였습니다.

une_nouvelle_amie_2014_720p_bluray_x264-lmab19-10-29
[새 여자친구에 아직 적응이 안되는 클레어..첫만남이니 그럴 수 밖에]

데이빗의 비밀을 알게 된 클레어는 크게 놀라지만 이내 빠르게 적응해 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로라의 옷을 입고 있어서일까요? 그녀 역시 로라가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기 때문일까요? 엄마를 원하는 아기가 있고, 그 빈 자리를 자신이 채워줘야 한다는 표면적 목적 외에 데이빗이 ‘버지니아’로서의 삶을 애타게 원해왔단 사실을 클레어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 역시  데이빗이 클레어를 만나 ‘버지니아’로 변신하는 일이 그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기쁨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또 소망합니다.)

a6c7e1bcc1834c0987b0af9851b6110a
[둘은 함께 쇼핑을 하고 커피도 마십니다..]

une-nouvelle-amie-blu-ray-06
[화장도 잘 하는 버지니아..]

이 영화의 장르 구분을 찾아 보면 의아하게도 “서스펜스”라 적혀있는 걸 볼 수 있는데 그만큼 데이빗과 버지니아를 오가는 둘의 이중생활은 긴박하고 흥미롭습니다. (다른 이의 영화 평을 읽다가 “히치콕 식 서스펜스”라는 표현을 발견 했는데, 역시 수박 겉핥기 식의 경험치로는 히치콕의 가운데까지 접근하는 덴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영화만큼 일탈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고, 대리 만족 시켜주는 것도 드물죠. 둘은 “버지니아 놀이”를 지속하는데, 죄를 짓는 것이 아님에도 사회의 규약과 이목 때문에 조심히 행동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여자로 변신한 남자라는 걸 거리의 사람들에게 들켜서도 안되고, 특별히 모난 데 없고 영화 끝까지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클레어의 남편에게조차 비밀이어야 합니다. 둘의 일탈은 데이빗이 버지니아로 변신하는 과정, 여자친구들로 재정립된 둘의 새로운 관계를 계속해서 비춰줍니다. 그리고 암시합니다. 일탈의 결말은 일상이라는 종착지로 돌아가거나 일상을 깨기로 결심하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요.  여기서 ‘버지니아 되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une-nouvelle-amie-photo2
[클레어는 데이빗에게 먼저 이 놀이를 그만두자고 하고 데이빗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클레어의 태도가 어정쩡하다 느꼈습니다. 데이빗은 “버지니아”가 되는 기쁨에 온전히 집중하고 그 기쁨을 매일같이 느끼고 싶어하지만, 클레어는 새로운 여자 친구와의 만남을 즐거워 하면서도 동시에 아주 불안해하죠. 남편을 계속 속일 수는 없으며 언제까지고 데이빗의 이중생활이 계속될 수 없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정체성”이란 물음에 혼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혼란을 느꼈던 부분은, 클레어가 남편과의 성적인 관계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듯한 장면이었습니다. 두어번 정도 등장하는데 감독이 이런 설정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여자를 사랑하지만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남자와 그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 심지어 국내에서 제작된 포스터 문구에 따르면 클레어가 버지니아에게 빠져드는 이유는 로라가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쯤되니 생물학적 성별 구분 같은 건 무색해질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의 정체성을 묻는 일은 복잡하기만 합니다.

movie_imageyuyho0wi
한국 버전 포스터
[개인적으로 카피가 맘에 들지 않습니다. 감독이 말하려던 건 저게 아닌 것 같은데…]

une-nouvelle-amie-c

프랑스 버전 포스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이 글이 출발 비디오 여행 원고는 아니니 결말 빼고 다 얘기하진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수다쟁이처럼 글이 길어졌습니다. 그래도 영화의 메시지에 대한 얘기는 꼭 해야겠습니다. 별 볼일 없는 글일지라도 저 역시 메시지는 남겨야 할테니까요. 이 영화는 ‘일탈’, ‘변신’을 소재로 ‘정체성’을 이야기 하는 작품이라고 짧게 요약할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 최근에(그렇습니다. 영화관 문턱을 넘기 힘든 이에게 최근의 폭은 이토록 넓습니다.) 개봉한 <뷰티 인사이드>와 일맥상통합니다. 하지만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천지 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내면”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아주 세련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려낸 <뷰티 인사이드>는 그럭저럭 재미있고 괜찮은 영화였지만 이런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가볍게 건드리기만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아쉬웠습니다. 설득력도 부족했고요. 또한 역설적이게도 작품 속 설정이 메시지에 위배(!)되는 상황도 종종 그려집니다. 오늘 내 외모가 아름답지 않더라도 내일이면 다시 바뀌리… (그래서 박서준이 그렇게 잠을 안잤…..)

movie_imagefe0n6i5c
[첫 데이트는 박서준과, 파티가 끝난 밤은 이진욱과, 이별 후의 재회는 유연석과…]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가 <뷰티 인사이드>와 다른 점은 이 영화가 정체성에 대해 물을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완전히 다시 태어남”을 그리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곱씹을수록 영화는 다시 태어남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이 장례식이라 언급을 했었는데 그 상황에서도 가장 첫 장면은 데이빗이 손수 죽은 로라의 육신에 웨딩 드레스를 입혀주는 장면입니다. 로라가 영면에 드는 장면은 기어코 제 눈물샘을 터뜨리게 하고 만 “데이빗의 부활(!)” 장면에 겹쳐집니다.  일탈과 관계의 파국을 상징하는 교통사고에서 의식을 잃어버린 데이빗. 그리고 그제서야 데이빗 혹은 버지니아라는 이름의 인격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사랑하게 된 클레어. 클레어가 데이빗을 그토록 원하던 버지니아로서의 삶으로 이끌어주는 의식에는 나지막한 노래가 함께 깔립니다. 단연 이 영화의 명장면이죠.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영화에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자취가 느껴진다는 누군가의 평을 먼저 접했었는데 이 장면을 접한 후에 어느 정도 공감했습니다. (오랜만에 ‘Cucurrucucu Paloma쿠쿠루쿠쿠 팔로마‘가 듣고 싶어지는 군요.)

여성이, 남성이, 성별로서의 대상이 아닌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영화는 끊임없이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데이빗이 버지니아로 다시 태어나는 장면 영상이 올라와 있군요. 영상과 함께 아래 노래 가사를 음미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Une femme avec toi (너와 함께라면 난 여자야)

나랑 놀던 남자들 모두 찌질한 놈
담뱃재처럼 가볍고 삶은 공허해
베르사이유 성에서 파티나 하지만
그 남자들 영혼은 빈 껍데기야
삭막한 사막에서 홀로 헤맬 때
우린 눈이 마주쳣고 그때 난 혼자였어
모두가 사라져도 그대는 살아남아
어린아이처럼 노래했어

사랑과 와인만 있다면
어디든 행복할 것 같다고
난생 처음으로
내 생에 처음으로
여자가 된거야
여자로 느끼며
그대와 함께

 

Comment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