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코너는 주류의 경제학이 아닌 ‘좌파의 시각에서 보는 약자의 경제학’이라는 관점을 갖고 <한겨레신문>에 연재 중인 글들이며,  지면에 실리고 일정 기간 후에 <이-음>에도 게재됩니다. 칼럼을 쓰시는 장흥배 씨는 노동당 정책실장이자 경기도 지역 당원이기도 합니다.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인상하면 실업대란이 일어나고 자영업이 몰락하고 경제가 망한다는 주장이 진실이라고 가정해보자. 한 달 꼬박 일해 200만원 이상의 소득을 얻지 못하는 도시 노동자가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존재를 발산하며 살 수 있는가? 우리의 경험과 지적 양심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21세기 초입은 사회적 약자들의 경제 정의 요구가 경제체제의 지속 가능성에 기여했던 시대로 기록될 것이다. 자본주의 전체 역사에서 을(乙)들의 요구는 거의 대부분 경제 시스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고 진압될 뿐이었다. 1970년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외친 요구도 그럴 운명이었다.

1920년대 말에 시작된 대공황은 세계 경제 차원에서 경제 정의와 경제체제가 일정하게 타협한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다. 설비와 자재를 모두 갖춘 공장들이 일제히 가동을 멈추고 임금이 필요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집과 옷과 음식이 충분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헐벗고 굶주렸다. 이 사태에 대해 당시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였던 조지프 슘페터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고 또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것만이 건강한 회복”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으로선 놀라운 그의 주장은 스스로 균형과 조정을 이루는 경제에 공황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류 경제학 이론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체제의 모순은 어떤 경제이론으로도 덮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아무것도 나눠 가질 수 없는 한편의 거대한 부조리극을 마주한 군중에게 경제는 체제로서든 학문으로서든 거짓과 우롱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뉴딜’이라는 새로운 경제 질서와 케인스주의 경제학이 등장했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어 단결하고 안정된 일자리와 임금소득, 사회복지를 누리는 것이 경제에도 좋은 시대가 수십년 이어졌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자본은 치열한 계급투쟁을 통해 노동의 지위를 강등시키고 복지를 축소하는 데 성공했다. 낙수효과 이론으로 포장했지만, 경제학은 불평등을 사실상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으로 되돌려놓았다. 그리고 이 시대의 끝자락에서 지금 세계 각국에 대폭의 최저임금 인상 바람이 불고 있다. 낙수효과 이론의 전파자였던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경제기구들이 임금소득 증대와 소득불평등 완화가 위기에 빠진 경제를 살릴 유효한 정책이라는 각종 보고서를 낸 지 오래다.

오직 한국의 경제권력만이 이 세계적인 추세에 눈을 감는다. 최저임금 협상에서 한 사용자 위원은 “월 103만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 5월18일 개최한 최저임금 토론회에서 박기성 성신여대 경제학 교수는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인상할 경우 24만~51만명의 고용감소가 일어나고 경제성장률은 1.48%포인트 하락한다고 주장했다. 김이석 시장경제연구소 소장은 아예 “최저임금제는 폐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나아갔다.

103만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한 사용자 위원의 소득이 최저임금 수준으로 떨어진다면, 단언컨대 그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릴 것이다. 박기성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이론과 실증 자료는 차고 넘칠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끝이 없는 이 진실 게임을 잠시 뒤로하고 다른 차원의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인간은 상품교환 관계를 벗어나 이웃과 환대를 나누고, 친구들과 왁자지껄 맥주를 마시며, 영화와 음악을 감상하고, 여행을 하며, 미래의 약속으로 구애한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보통의 인간은 불행하다. 인간은 또한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비교하면서 우쭐함, 긍지, 낙관, 우울, 비관, 억울함, 분노 등의 다채로운 감정에 휩싸인다. 즉 인간은 사회적·문화적·정치적인 존재이다.

질문의 성격을 명쾌하게 하기 위해,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인상하면 실업대란이 일어나고 자영업이 몰락하고 경제가 망한다는 한국 보수의 주장이 진실이라고 가정해보자. 시급 최저임금 1만원을 1개월 법정노동시간 소득으로 환산하면 209만원이다. 한 달 꼬박 일해 200만원 이상의 소득을 얻지 못하고 미래에도 얻을 가망이 없는 평범한 도시의 노동자가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존재를 발산하며 살 수 있는가? 우리의 경험과 지적 양심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30대 재벌 그룹의 회계창고에 사내유보금 740조원을 쌓아둔 채, 수백만의 경제 주체들이 인간적 존엄을 부정당하고야 겨우 연명하는 경제에 일말의 정당성이 있는가?

최저임금 1만원은 분배를 둘러싼 자본과 노동의 이해 대립을 넘어서는 질문을 던지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경제가 인간에게 봉사해야 하는가, 인간이 경제라는 물신의 노예로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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