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2]  정파의 기원 : ○○연합이라는 돌림자의 내력

1987년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 장군(!)의 당선으로 끝났다.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함성이 무색해지는 결과였다. 보수야당은 양김 씨의 욕심에 의해 군사정권에게 대권을 헌납했다. 민중운동진영은 준비 없는 지리멸렬한 대응으로 정권 교체도, 독자적 정치세력화도 이루지 못하는 몽롱한 결과를 가져왔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1987년은 그렇게 허무하게 저물었다.

87년 이후 좌파 정치조직의 흐름

1988년 4월 총선에서 민중운동진영 일부는 ‘민중의 당’을 창당하여 선거에 참여했지만 소수점 이하 득표라는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다. 87년 대선의 연장으로서 역량부족을 반영한 결과다.

대선 국면부터 시작된 노해동 내부의 논쟁은 결국 봉합할 수 없는 당파성의 차이로 귀결되었다. 민주연립정부를 주장하는 조직중앙은 다수파가 되었고, 민중집권을 주장하는 편집중앙은 소수파가 되었다. 이후 ‘민주연합전선’이냐, ‘민중통일전선’이냐의 논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결국 노해동 소수파는 88년 4월 1일에 분리선언서를 내고 독자대오를 꾸리기 시작했다. 약 1년 반 동안의 모색 끝에 1989년 11월 12일, 서울대에서 열린 노동자대회 자리에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1)  출범선언문을 배포함으로써 노동계급 전위조직 출범을 선언했다.

인민노련은 기존의 지역 중심적 활동을 고수하는 ‘노동자의 길’ 발간그룹과, 사회주의 직접선동 및 전국적 전위조직 건설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자’ 발간그룹 등 2개의 진영을 내부에 형성했다. 89년에 조직사건으로 노회찬을 비롯한 중앙지도부가 구속되었고 주대환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도부(이른바 신중앙)이 구성되었다. 주대환의 신중앙은 전위당 건설을 명분으로 비합법 사회주의 조직들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 결과 91년 8월에 삼민동맹, 노동계급 등의 그룹들과 통합해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약칭 한사노당 창준위)를 구성했다. 유력한 비합법 조직들 중에서는 사노맹과 제파PD그룹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규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곧 주대환의 ‘신노선’(또는 신전략)이 제출되면서 합법적 노동자정당 건설을 조직노선으로 결정하여 ‘노동자정당 추진위원회’(약칭 노정추)라는 이름으로 공개공간에 나오게 된다.


00연합 탄생과 전선체 운동의 파산

87년 대선을 계기로 분열되었던 민중운동진영은 통일전선체 건설을 추진했다. 그 결과로써 89년 1월에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이 출범한다. 90년 1월에는 민주노조운동의 결실로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가 출범했다. 전민련은 전노협과 전대협 등 대중조직들을 포괄하여 90년 4월 ‘국민연합’으로 확대되었다.

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 타살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투쟁이 6월항쟁 이래 최대 규모로 전개되었다. 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광범위한 민중통일전선 건설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범좌파진영이 결집하여 ‘민주주의민중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초동주체를 형성했다. 그러나 뒤늦게 합류한 NL계열이 다수파를 점하면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뀐 이름은 장차 내용을 규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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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kdfarchives/522245738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소장)

전국연합은 한동안 민주노총, 한총련 등의 광범위한 대중조직들을 포괄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수파인 NL계열의 전횡으로 좌파진영이 이반하면서 결국은 NL경향 정파들만의 모임으로 전락했다. 그들 내부에서도 경향적 차이가 있었는데, 각자가 장악하는 지역조직 이름이 정파의 이름으로 통용되기도 했다(예컨대 경기동부연합, 인천연합, 울산연합 등). ‘00연합’이라는 유명한 돌림자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전국연합의 실패는 전선체로서의 통일전선운동의 파산을 의미한다.


민중당 창당과 소멸

1990년 3월 전민련 2기 대의원대회에서 민중정당 건설 안건이 부결되었다. 87년 대선 당시에 분열되었다가 재결합한 민중운동진영은 또다시 좌우파로 갈라서게 된다. 창당파는 전민련에서 탈퇴하여 그해 11월에 민중당을 창당했다. 당 대표 이우재(공동대표 중에서 상임대표), 사무총장 이재오, 정책위원장 장기표, 노동위원장 김문수, 대변인 정태윤 등이 지도부에 포진했다.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들 모두는 훗날 보수정당에 투항했고 그 중 몇몇은 출세가도를 달리며 집권당의 대선주자 반열에까지 올랐다.

91년 8월 소련 붕괴로 좌파운동진영은 근원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주대환의 신노선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신노선을 채택하고 공개 공간으로 올라온 노정추는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규합해 92년 1월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약칭 한노당 창준위)를 결성했다. 기층의 좌파계열 지구당위원장들과 함께 소수 명망가 중심인 민중당 지도부를 당 안팎으로부터 압박하여 통합을 요구했다. 통합의 조건은 당명을 한국노동당으로 바꾸고 단일지도체제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단일한 당 대표는 주대환 창준위원장이 맡게 될 가능성이 컸다. 사실상의 흡수통합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이런 시도를 차단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개입했다. 주대환 위원장을 비롯한 주요 지도부를 안기부에 구속한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한노당 창준위는 애초 목표와는 전혀 다른 조건으로 민중당과 통합하게 되었다. 당명과 지도부가 온존한 상태에서 역으로 흡수통합된 것이다.

민중당은 92년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고 등록 취소되었다. 총선 직후에 열린 중앙위원회에서 당의 존폐가 거론되었다. 좌파진영은 재창당과 12월 대선 독자후보를 주장했다. 그러나 당권파는 진보정당 실험이 실패했음을 주장하고 법적 해산만이 아닌 정치적 해산 결정을 통과시켰다. 진보정당을 통해서는 금배지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은 훗날 김영삼 정권 시절에 앞뒤를 다퉈가며 집권당으로 투항한다.


백기완 선생, 염색하다

92년 대선에서 민중진영은 또다시 비판적 지지와 민중독자후보론으로 양분되었다. 92년에 구성된 백선본에는 ‘진보정당 추진위원회’(약칭 진정추)2), ‘사회당 추진위원회’(약칭 사추위)3), ‘민중회의 준비위원회’(약칭 민중회의)4), ‘전국노동운동연합’(약칭 전국노련) 등 4개 조직이 결합했다. 5년 전과는 다르게 명확한 좌파 정치조직들로 구성된 것이다.

선본 구성은 각 조직에 고르게 안배되었다.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은 민중회의 오세철, 부위원장은 진정추 최윤, 사추위 김종석, 전국노련 한경남 등이 포진했다. 집행단위인 중앙선거대책본부장은 진정추 황선진, 부본부장은 사추위 김철수 등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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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본은 조직뿐만 아니라 정책에서도 5년 전보다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대선강령을 작성해서 선거에 임한 것도 성과로 볼 수 있다. 대선강령은 크게 나누면 정치강령 경제강령 통일강령 등으로 분류되었다. 정치강령은 ‘민중대표자회의’5)를 최고 권력기관으로 하는 민중주체 민주주의 구현을, 경제강령은 노동자 자주관리6)를, 통일강령은 남북한 민중들이 주도하는 연방제 통일을 주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백선본의 대선강령은 내용의 충실성 문제와 관점에서의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주의 조직들이 최초로 공동의 강령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할 만한 일이다. 대선에 임하는 지향점도 5년 전과는 다르게 명확했다. 민중후보운동의 정치적 조직적 성과를 모아 진보정당을 건설한다는 명확한 목표를 세웠다.

92년 11월 1일에 올림픽공원 사이클 경기장에서 민중후보 선출대회가 거행되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1만여 인원이 모여 백기완 선생을 민중후보로 선출하고, 인터내셔널을 합창하며 대회를 마무리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제1차 당대회를 상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92년 백선본은 선거운동 방식에서도 좀 더 세련됨을 추구했다. 백발이 성성한 백기완 후보가 염색을 결심한 것도 획기적 일이 아닐까 싶다. 일부에서는 양복을 입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92년 민중후보운동은 5년 전에 비해 여러모로 발전했음에도 결과는 참담했다. 사퇴 없이 끝까지 갔다는 점에서도 5년 전과는 달랐지만 그로써 참담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운동권 조직들만의 결합으로 대중을 획득할 수는 없음이 입증되었다.■


  1. 사노맹은 3차에 걸친 조직사건으로 와해된다. 90년 9월 1차 보위사건으로 중앙위원 남진현 구속, 91년 3월 2차 보위사건으로 중앙위원 박노해 구속, 92년 4월 3차 보위사건으로 백태웅을 비롯한 중앙위원 전원과 골간조직 대부분이 침탈된다. 재건 움직임과 약간의 이합집산 있었으나, 결국은 3차 보위사건으로 사실상 와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사노맹 출신들은 단일한 정치적 경향을 형성하지 못하고 산개했으며, 일부는 비합법 공간에 잔류하여 전위 지향적 운동을 지속하기도 했다.
  2. 진정추는 민중당이 해산된 후에 진보정당 재건을 목표로 한노당(준) 계열이 결성한 조직이다. 92년 대선당시 대표는 최윤(환경운동가 최열의 동생)이다. 대선 이후에는 노회찬이 대표를 맡았다.
  3. 사추위는 사노맹 계열의 외곽조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민중당에 전술적으로 참여하던 사노맹 계열 활동가들이 92년 2월에 ‘민중진영단일정당 추진위원회’(약칭 민정추)를 결성했고, 이후 사회당 추진위로 이름을 바꾸고 대선에 임했다. 민정추 당시 위원장은 김철수, 사추위 위원장은 김종석이 맡았다.
  4. 민중회의는 민중당 교수위원장 오세철을 비롯한 일부 좌파그룹이 이탈해서 구성한 조직이다.
  5. 애초 사추위는 ‘최고입법회의’라는 명칭을 제안했지만 ‘민중대표자회의’로 결정되었다.
  6. 사추위는 ‘사회주의 혼합경제’를 제안했지만 강령에 명시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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