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대선에서 민중후보운동의 정치적 조직적 성과를 모아 진보정당을 창당한다는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모을 만한 성과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에 정당으로 간판만 바꿔 단다고 해결될 수는 없었다. 동요하고 주저하며 약간의 이합집산이 있을 뿐이었다.

92년 이후의 이합집산

대선 이듬해에 민중회의와 사추위가 통합했다. 93년 5월 16일에 서울시립대에서 두 조직의 통합체인 ‘민중정치연합’(약칭 민정련) 출범식이 있었다. 대표는 민중회의 오세철, 부대표는 사추위 김철수가 각각 맡았다. 내부의 화학적 결합은 쉽지 않았다. 특히 사추위 출신의 지부들이 과거 사노맹 활동과 관련하여 잇달아 조직사건을 당하면서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했다.

더불어 진정추와의 통합 논의는 결정적인 분란을 초래했다. 때마침 오세철 교수가 연세대 경영대학장을 맡으면서 대표직을 사퇴했다. 김철수 부대표가 추대되는 분위기였는데, 당시 구로지부장 김혜련이 통합 반대의 각을 세우기 위해 대표 경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대의원대회가 한차례 무산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결국 통합 논의는 95년 9월 숭실대에서 열린 마지막 대의원대회에서 마무리되었다. 장시간에 걸친 논쟁이 벌어지고, 구로지부 회원들을 비롯한 일부 회원들의 고성까지 오갔다. 통합 반대파의 주된 논지는 과거 한사노당 창준위에서 노정추로 전환되는 과정과 92년 한노당(준) 조직사건 당시에 안기부에서 벌어진 일들1)에 근거한 불신, 당시 진정추가 추진하던 개혁신당과의 결합 움직임에 대한 우려 등이다. 그 근저에는 개량주의 혐의에 의한 근원적 불신이 깔려있었다. 결국 표결 끝에 통합 안이 가결되었다. 통합 반대파 중에 일부는 통합조직에 참여하지 않고 이탈하여 또 다른 흐름의 뿌리를 형성하게 된다.


진정련의 96년 총선방침 투항과 실패

진정추와 민정련이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약칭 진정련)을 구성했다. 진정추 출신 노회찬, 민정련 출신 김철수 두 사람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총선이 임박한 시기였기 때문에 통합 이후의 첫 대의원대회에 총선방침이 상정되었다. 주된 내용은 진정련 소속 회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개혁신당2) 공천을 받아 출마하여 진보진영 원내진출을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개혁신당과 민주당3)의 통합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이는 보수정당으로의 명백한 투항을 의미했다. 비록 개인 자격의 형식상 결합으로서, 당선 이후에 진보진영의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모호한 기획이 포함됐지만, 현실적으로는 보수정당으로의 투항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장시간 격론 끝에 표결에 의해 총선방침이 통과되었다. 김철수 공동대표를 비롯한 사추위 출신들은 총선방침에 불응하고 진정련 소속(법적으로는 무소속)으로 독자출마를 강행한다. 결국 개혁신당이 민주당에 사실상 흡수통합 됨으로써, 노회찬 공동대표를 비롯한 진정추 출신들은 민주당에 공천신청을 하게 된다. 마산에서 신청한 주대환은 공천을 받지 못했고, 노회찬은 서울 강서에서 공천을 받았지만 미복권 상태임이 밝혀져 출마하지 못했다. 만일 그들이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해서 당선됐다면, 훗날 진보정당으로 돌아왔을지 여부는 순전히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할 것이다.

진정련의 96년 총선 결과는 총선방침에 찬성한 측도 반대한 측도 모두 참담한 실패로 판명되었다. 총선 이후에 김철수 공동대표가 활동을 중단하고 사퇴함으로써 진정련은 노회찬 단독대표 체제가 되었다. 앞날이 막막하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진정련의 총선방침은 위력적인 진보정당에 의한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그 방침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현실조건에 대한 판단은 같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해답을 확인하는 사건이 곧 벌어졌다.


민주노총 탄생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산업화가 강력히 추진되었다. 전체주의적 공공성4)과 저곡가 저임금 정책으로 저렴한 노동력이 대량으로 공급되었다. 농촌 인구가 도시도 유입되고 임금노동자 비중이 급격히 증대했다. 이렇게 생산된 노동력은 철저히 통제되면서 급격한 산업화의 원천이 되었다. 군사독재정권은 한국노총 중심의 어용노조만을 허용했다. 경공업 여성사업장 등에서 일부 민주노조운동이 있었으나 철저히 탄압받았다.

1987년 6월항쟁 직후의 고양된 정세 속에서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다. 군사독재의 억압 아래서 숨죽이고 지내던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다. 특히 울산과 창원을 비롯한 공단 밀집지역에서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이 참여하여 과거와는 다른 대규모 투쟁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민주노조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로서 1990년 1월에 전노협이 탄생했다.

전노협이 노동자들의 온전한 전국조직은 아니었다. 대기업 노조들은 전노협에 결합하지 않고 재벌의 위계구조에 따라 별도의 조직을 구성했다.5)  기업별노조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995년 11월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출범했다. 여기에는 전노협에 결합하지 않았던 사업장들도 참여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을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전국조직을 이루게 된다. 기업별노조 체계가 존속하는 상태에서 전노협을 해소하고 민주노총을 건설한 데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어쨌거나 기업별노조의 한계는 훗날 노동계급 분열과 민주노조운동 고립을 가져오는 주된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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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창립 대의원대회 사진


노동자의 거대한 힘을 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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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새벽에 벌어진 노동법 날치기 통과 사건으로 양대 노총이 총파업을 선언했다. 단지 선언만의 총파업이 아닌 위력적 파업투쟁이 전개되었다. 귀가할 교통수단이 없을 정도의, 가히 세상을 멈출 만한 위력이었다. 노동자의 거대한 힘을 확인하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모색은 다시 불붙기 시작한다. ■


  1. 안기부 지하실에서 중앙위를 열어 사회주의 혁명 노선 폐기를 결정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결정 내용 자체보다는 공안기관의 수중에서 중앙위를 열어 그런 결정을 했다면 충격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소문일 뿐, 사실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2. 95년 지방선거 이후에 일부 중도개혁 성향의 인사들이 추진한 정당. 이회창 전 총리를 당의 간판으로 영입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이회창은 김영삼 정권 초기에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총리 직을 사퇴한 사건으로 소신 있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96년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 정권이 신당을 표방하며 집권 민자당을 신한국당으로 바꾸면서 이회창, 박찬종 등의 명망가들을 영입했다. 개혁신당 추진세력은 이회창 영입에 실패하자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통합한다.
  3. 92년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대중은 95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자 정계복귀를 시도했다. 이기택을 비롯한 소수 당권파가 반대하자 민주당 내의 다수파를 분당시켜 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당은 분당에 참여하지 않고 잔류한 소수파들의 정당을 지칭한다.
  4. 군사정권이 저렴한 노동력 생산을 위해 도입한 일련의 정책들. 국민주택 보급, 중등교육 평준화, 의료보험 도입, 추곡수매에 의한 정부미 방출 등이다. 그중 상당부분은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에 폐기되었다.
  5.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약칭 현총련),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약칭 대노협)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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