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 잃어버린 30년 #5. 군자산의 약속

2000년 1월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강령을 통해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적 사회주의 정당을 표방했으며 진성당원에 의한 당비로 운영되고 조직 원리에서부터 진보적 가치를 구현하는 이념적 대중정당을 지향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압도적 지배와 노동운동 위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출범했다는 점, 87년 대선 이래로 극명하게 갈라진 좌우 정파의 연합정당이라는 점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종파의 서막 울산 북구 사태

민주노동당은 창당 직후인 그해 4월에 총선에 참여했다.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아직 도입되지 않은 시점인지라 지역구 당선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2년 전에 구청장을 배출한 2개 지역구에 관심이 쏠렸다. 울산 동구는 이갑용 민주노총 전 위원장이 출마했다. 그러나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의 아성이기 때문에 당선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울산 북구가 유일하게 당선을 바라볼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으며 결국 불상사를 낳았다.

울산 북구 총선후보 선출을 앞두고 현대자동차 조합원 투표를 실시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상범 전 노조위원장이 선출되었다. 당의 공식 절차가 아닌 일종의 추천 성격을 갖는 투표였다. 그러나 지역구의 핵심 사업장이기 때문에 사실상 후보로 확정될 것이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당의 공식 선출은 사후 승인 정도의 형식적 절차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후보를 확정하는 울산지부1)의 당원 투표에서 최용규 세종공업노조위원장이 근소한 차이로 이상범을 누르고 총선후보로 당선된 것이다. 울산연합의 조직적 지지와 미비한 제도2)가 낳은 결과였다. 울산연합에서는 이상범 전 위원장의 직권조인 전력을 문제 삼았으나, 정파의 이익을 위한 패권적 행태였음은 분명하다.

그 때문에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 결국 본선에서 최용규 후보는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다. 현대차 조합원들의 반발에 의한 투표율 저조가 결정적 원인이었다. 창당 직후에 맞이한 원내 진출 기회를 날려버리는 순간이었다. 또한 훗날에 있을 NL계열의 숱한 종파 사건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군자산의 약속

2001년 9월, 충북 보람원 수련원

군자산 기슭에 수려한 산세와 맑은 공기 속에서 전국연합 주최로 ‘민족민주전선 일꾼 전진대회’가 열렸다. 쉽게 말하자면 남한의 종북파 활동가들이 총 집결한 대회였다. 그 자리에서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를 맞는 전국연합의 정치 조직방침’이 채택되었다. 정식 명칭은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 정당 건설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하여 연방통일조국 건설하자’로 되어있다. 긴 제목 대신 흔히 ‘9월 테제’라고 부르며, ‘군자산의 약속’이라는 목가적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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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건의 주된 내용은 (2001년 시점에서)향후 10년을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로 규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에 근거하여 10년 후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연방통일조국을 완성함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3년의 계획아래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주된 내용을 몇 가지 인용한다.

노동운동을 반미자주화 노선으로

민족민주전선의 ‘군중 기반’(대중적 기반)으로 몇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중 주목할 지점이 노동운동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다.

외세에 의해 정치 군사적으로 완전한 지배하에 놓여 있고 여기에 분단의 고통까지 안겨져 있는 민족적 현실을 무시하고 낡은 이론에만 매달려 계급해방을 일면적으로 추구하는 세력에 의해 기층 민중들의 투쟁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노동운동을 반미자주화를 주선으로 하는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변혁의 성패는 중간층을 누가 전취하느냐에 달려있다며 한국사회에서 중간층은 필연적으로 자주, 민주, 통일운동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그들은 노동운동 내 노사협조주의 세력과 결탁하여 2004년에 민주노총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테제가 노동운동에서의 탈계급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실천 노선의 근거를 이룬 것이다.

민주노동당을 민족민주정당으로

문건은 또한 민족민주전선이 자주, 민주, 통일의 기치아래 전민중적 항쟁으로 승리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정당을 가짐으로써 정치적 대안세력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선언한다. 민족민주정당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민족민주정당은 자주, 민주, 통일을 강령으로 하여야한다. 일부에서는 사회주의적 이념정당을 건설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민주노동당 강령에도 일부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사회의 성격으로 보나 당면 변혁의 임무로 볼 때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각계각층 광범위한 애국적 민주역량을 망라한 통일전선적 대중정당이 되어야한다. 일부에서는 노동자 계급정당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그리고는 민족민주정당을 민족민주전선에 복무하는 정당으로 규정하고, 건설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민족민주정당 건설 사업은 기존 정당세력과 무관하게 추진될 수 없다… (중략) … 민주노동당에 대한 참여를 포함한 기존 정당운동 주체와의 연대와 협력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민족민주정당 건설 사업이 폭넓은 통일 단결에 기초하여 추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종북파가 민주노동당에 참여한 목적을 확인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을 민족민주정당 건설을 위한 숙주로 삼자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 실현을 규정한 당 강령을 폐기하고 자주, 민주, 통일을 강령으로 하며 민족민주전선에 복무하는 통일전선적 정당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2012년을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로 규정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왜 하필 2012년이 조국통일의 대시변기가 되는지 근거는 찾을 수 없다. 2012년이 김일성 탄신 100주년이기 때문이라는 일설도 있으나 아는 바 없다.

근거는 없으나 현실은 그들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실제로 3년 후에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장악했다. 약속한 2012년에는 연립정부 수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꿈을 이루기 직전에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및 폭력 사태가 터짐으로써 10년의 전망은 무산된다. 2012년은 조국통일의 대사변기가 아니라 종북파의 추악한 민낯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해가 되었다. 그들의 전략노선에 따른 무한패권이 초래한 결과다.


무한 패권3)

전국연합이 조직적 결의를 통해 대거 입당하면서 정파연합정당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는 각 지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정파들 간의 경쟁으로 귀결됐으며 이에 따른 온갖 부작용이 나타났다. 어느 정당이든 정파 간의 경쟁은 있게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패권주의적 행태도 있을 수 있고 다소간의 부작용과 부정이 저질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2001년 이후 수년에 걸쳐 민주노동당 내에서 종북파가 저지른 패권은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차원을 달리한다. 위장 전입, 당비 대납, 대리 투표 등의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들의 온갖 기행을 정리하는 것은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정도다. 게임의 룰이 지켜지지 않았으며 이러한 상태가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반복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들이 천성적으로 부도덕하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자기 운동에 신념과 의지를 가진 성실한 활동가다. 나의 개인적 경험으로는 다소 오만하고 개성 강한 좌파 활동가들에 비해서 NL에 속하는 활동가들은 친절하고 예의바른 사람들로 기억한다. 문제는 개인의 천성이 아니라 그들의 전략노선에서 비롯된 활동방식과 객관적 조건에 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으나, 여기서는 주된 원인 두 가지를 말해본다.


전략적 목표가 모든 과정을 정당화

‘9월 테제’를 채택하고서 종북파의 목표는 분명해졌다. 민주노동당을 장악하여 사회주의 강령을 폐기하고 민족민주정당으로 개조한다는 것이다.

전략적 목표가 결정되었으니 그에 수반되는 일체의 행위는 전술적 방침에 속한다. 목표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민주노동당은 민족민주전선에 복무하는 정당을 만들기 위한 숙주에 불과하므로 당의 운명보다는 종북파의 전략적 목표가 우선할 수밖에 없다. 즉 자기의 당이 아닌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 ‘9월 테제’의 전략적 목표가 모든 과정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진실이 알려지기 어려운 군소정당의 처지와 구조

무한대의 패권이 가능했던 것은 주관적 의지 이외에 객관적 조건에도 원인이 있다. 언론으로부터 주목받지 못하는 군소정당의 조건과, 당원들의 존재조건이다.

민주노동당은 모범적인 진성당원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그러나 당 활동가와 일부 열성당원을 제외하고는 당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수단이 제한되었다. 당원게시판에서 일정 정도의 정보가 소통되지만, 조회 수는 아무리 많아야 6~7백이다. 당권자 숫자의 1% 수준이다. 활동가나 열성당원만 들어온다고 볼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자기 정견을 갖고 있다. 당원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읽고 견해를 바꿀 가능성은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생업에 종사하는 평당원들이 당에 관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경로는 대부분 기성언론을 통해서다. 당 밖의 대중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기성언론이 군소정당인 민주노동당의 당내 소식을 보도하는 데는 매우 인색할 수밖에 없다. 만일 거대정당들처럼 민주노동당 소식이 언론에 잘 보도되었다면, 그래서 수많은 부정부패 중에서 일부라도 대중에게 알려졌다면, 이처럼 무한대의 패권을 저지르고도 버젓이 당을 장악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훗날 통합진보당 사태가 언론에 보도되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통합진보당에서 벌어진 일은 과거 민주노동당에서 수년간 일상사로 있었던 일이다.

이처럼 정보유통이 제한된 현실이 무한패권을 가능케 했다. 종북파의 장악력은 확대 재생산되어 갈수록 확고해졌다. ■


 

  1. 그 당시에는 광역시도당 체계가 아닌 광역시도지부 체계였다.
  2. 울산 북구의 국회의원 후보를 선출하면서 해당 지역구가 아닌 울산광역시 전체를 선거구로 했다.
  3. 지면의 한계 때문에 개별 사실을 나열하지는 않는다. 노동당 홈페이지에 게시된 공식 역사의 내용을 좀 더 설명하는 것으로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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