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년 #7 –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

2004년 상반기에 민주노총을 국민파가 장악하고 민주노동당을 NL이 장악했다. 이에 맞서서 범좌파의 결집 움직임이 본격화했다. 과거와 같은 느슨한 네트워크가 아닌 단일한 정치조직 건설을 추진했다. 당 활동가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활동가들도 참여함으로써 노동운동과 정당운동을 아우르는 조직을 목표로 했다. 이런 움직임은 민주노총 중앙파와 민주노동당 범좌파의 결합으로 구체화했으며 그해 연말에 결실을 보게 되었다.

전진1) 출범

2004년 12월 18일, 충남 계룡산 갑사유스호스텔.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준)’ 2)창립총회가 열렸다. 흔히 ‘전진’이라고 부르는 정치조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전국에서 160명의 회원이 참석했으며 이후 회원 숫자는 최대 400여명을 기록했다. 그들이 모두 활동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숫자였다. 참석자 면면을 살펴본 사람들이 대체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저 사람도 여기 왔네?!…’ 그만큼 광범위한 구성이었다.


[사진 – 전진 정치대회]


전진의 이중적 성격

전진은 태생적으로 이중적 성격을 가진 조직이다. 전진의 활동과 공과를 평가하자면 이중적 성격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2004년 전진 출범은 한국 좌파운동에서 획기적 시도였다. 각각의 부문으로 흩어져있던 노동운동, 정당운동, 사회운동 활동가들을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내고 대중정당을 통한 사회주의운동 및 혁명과 개혁의 변증법적 결합이라는 초유의 시도를 시작했다. 각각의 대중운동조직 내에서 일정 정도의 활동역량을 가진 인자들이 모였다는 점에서 이러저러한 서클주의 군소조직들과 구분되었다. 요컨대 ‘사회주의 정치조직’을 표방하는 집단 중에서 가장 큰 대중성과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또 다른 성격이 있었다. 전진이 출범한 시기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각각 우파가 장악한 직후의 시점이다. 전진 출범은 민주노총의 이른바 중앙파와 민주노동당의 범좌파가 각각의 중앙 집행구조에서 밀려나면서 형성된 위기의식의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애초에 사회주의 정치조직을 표방하며 출범했으나, 대중운동조직 내에서 주류세력에 대항하는 반정립적 성격을 동시에 가졌으며, 집행구조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 활동가들의 결합이라는 태생적 요인을 안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사회주의 정치조직이라는 지향과 중앙권력을 되찾으려는 목적이 결합된 조직이다. 그 두 가지 성격이 양립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느 쪽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가의 차이가 주요 고비마다 대립을 가져왔다. 이러한 이중적 성격은 전진이 우리 운동에 남긴 공과와 그 자신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빼놓을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심화하는 위기

민주노동당은 2004년 원내진출이라는 정점을 맞이한 이후에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이는 단지 당내 문제만이 아니라 진보좌파운동 전체 처지의 연장선에 있다. 특히 민주노동당의 모태가 되는 노동운동의 위기와 직결된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압도적 지배력을 발휘하면서 시작된 노동운동 위기는 갈수록 심화했다. 민주노총은 출범 이래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향상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공세와 민주노조운동 후퇴 속에서 사업장별 의제에만 매몰되는 경향이 확산되었다. 이런 경향이 기업별노조체계와 맞물려 대기업 이기주의를 만연케 했다. 민주노조운동 태동부터 시작한 기업별노조체계 속에서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운동으로 고착되었다.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향상이라는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는 일부 조합원만의 성과로 한정되었다. 대기업 정규직의 사내 복지는 향상된 반면에, 사회 복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절대다수의 비정규직, 실직자, 중소사업장,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은 방치되었다. 이로써 노동계급 내부의 불평등과 분열이 심화했다. 노동계급 분열은 필연적으로 민주노조운동 고립을 초래했다. 이는 국가권력과 자본과 보수언론의 악선전에서 비롯된 부분도 있으나, 주되게는 현실적 토대에서 비롯되었다. 대기업 정규직의 이기주의, 노동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비정규직 방치, 노동계급 내의 불평등과 분열에 따른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태생적 한계인 기업별노조체계를 극복하고 산별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이는 전진의 주요 정책이기도 했다. 2006년 현대자동차노조가 산별 전환을 결정하면서 산별노조 운동은 급물살을 타는 듯했다. 2007년 1월에는 15만 조합원의 통합 금속노조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타 산업에서도 산별 전환이 대세를 이루는 듯했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달랐다. 무엇보다도 대기업노조의 조직보존주의가 문제였다. 금속노조의 경우 2007년 1월에 출범하면서 기업별지부를 2년간 존속하기로 했다. 2년 후에는 기업지부를 해소하고 지역지부로 편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지켜지지 않았다. 기업지부 해소는 유예와 유예를 거듭하여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대기업지부가 자기 사업장의 조직 및 재정 역량을 놓기 싫은 것이다. 실제로 대기업지부는 산별노조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경우도 있다. 규모의 논리가 관철되는 것이다.

형식적 산별노조가 기업별노조의 관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데는 근본적 원인이 있다. 산별노조는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는 것이다. 기업별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위기 심화는 곧 진보정당운동의 위기를 가져왔다. 노동운동의 계급성을 상실한 타협주의 세력이 민주노총을 장악한 것은 이러한 과정의 결과이면서 또한 이를 가속화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종북파가 민주노동당을 장악한 것도 위기의 결과이면서 원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이 지속 가능한가를 가르는 임계점이 되었다.


분열의 서곡 – 2007년 대선후보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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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심상정, 권영길, 노회찬]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대선후보 경선이 불붙었다. 원내정당의 대선후보 선출이기에 과거 원외정당 시절의 그것과는 위상이 달랐다. 3)  더구나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3인의 명망가들이 치열한 3파전을 벌임으로써 대중적 관심을 모았다. 고질적 정파 대립 구도를 넘어서 인물 대결에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NL그룹이 권영길 후보 지지를 결정하면서 또다시 정파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전진 내부도 노회찬 지지와 심상정 지지로 양분되었다. 4)  당 활동가들은 주로 노회찬 지지, 민주노총(중앙파) 활동가들은 주로 심상정 지지였다. 5)

3파전으로 치르는 경선에서 NL의 지지를 받는 권영길 후보가 무난히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할 것이 확실시되었다. 범좌파의 지지를 받는 노회찬 심상정 중에서 누가 2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할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대체로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순서로 득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6)

경선은 남쪽지역에서부터 수도권을 향해 순회투표 방식으로 이뤄졌다. 초반부터 득표순서는 예상대로 나왔다. 그러나 막판에 수도권으로 근접할수록 심상정 후보가 추격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결국 마지막 서울에서 역전극이 연출되었다. 심상정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노회찬 후보를 누르고 2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한 것이다.

극적인 역전이 이뤄진 원인은 심상정 후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서 찾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범좌파 계열 당 활동가들은 주로 노회찬 지지였고 민주노총 활동가들은 심상정 지지였다. 따라서 당내 경선의 특성상 노회찬 후보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판으로 갈수록 수도권 지역의 젊은 활동가들이 대거 심상정 지지로 돌아섰다. 진정추 출신 노회찬보다는 노동운동(서노련) 출신 심상정이 더욱 급진적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크게 작용했다. 7) 이는 훗날 그야말로 ‘막연한’ 기대감이었던 것으로 입증된다.

1차투표 끝나고 일주일 후에 결선투표가 있었다. 범좌파 중에 노회찬을 지지했던 활동가들 일부는 1차투표 결과에 대한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심상정 지지를 잠시 유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선투표가 다가오면서 범좌파의 지지는 심상정 후보에게 모아졌다. 그럼에도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권영길 후보의 승리였다. 득표율도 예년과 비슷했다. 대략 52:48 내지는 53:47 정도의 분포가 당내에서 좌우파의 세력분포로 굳어졌다. 민주노총 내의 분포도 비슷했다. 어찌 보면 근소한 차이일 수 있으나, 승자독식 구조에서 이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었다.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동영상 유포를 통한 마타도어 등의 반칙이 횡행했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은 승리를 향한 축제가 아니라 분열의 서곡이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


  1. 전진은 필자가 몸담았던 곳이며 진보정당운동에서 공과를 막론하고 많은 족적을 남긴 조직이다. 앞으로의 글을 통해서 많이 언급할 것이다. 이면의 이야기들을 포함해서 필자의 관점을 담아 소상하게 쓸 예정이다. 다만 지금도 일선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실명과 민감한 사건들을 다룰 것이기에 다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2. 조직의 완성이 아니라 향후 더 많은 조직과 개인을 포괄하여 본조직을 만든다는 취지에서 준비위원회로 자칭했다. 그래서 정식 명칭에 (준)을 넣었다. 이는 사실상 선언적 의미에 머물렀으며 이 날이 전진이라는 조직이 정식으로 출범한 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7년 후에 해산하는 순간까지 (준)이라는 딱지는 떼지 못했다.
  3. 후보 선출 결과 발표는 지상파 방송으로 생중계되었다.
  4. 전진 내에도 권영길 지지자가 일부 있기는 했으나 대체로 노회찬 심상정 지지로 양분되었다.
  5. 일부 예외는 있으나 대체로 그렇게 분류되었다.
  6. 득표순서, 가나다순서, 나이순서, 신장순서 모두 똑같으리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7. 같은 범좌파 성향 지역위원회 중에서도 위원장보다는 주로 사무국장을 맡은 젊은 활동가들이 심상정 지지로 돌아섰다. 실제로 위원장과 사무국장이 서로 다른 후보를 지지한 지역에서는 예외 없이 사무국장이 지지하는 후보가 승리했다. 위원장보다는 사무국장이 당원 접촉 기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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