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이를 설레게 하기에 해외여행의 경험은 이제 너무 흔해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순진한 초심자의 가슴엔 지나온 여정이 왜 이리도 생생한지요. 어설픈 이방인이 처음 겪은 3주간의 유럽을 흔치 않은 속내로 풀어내고자 합니다. 추웠던 그 해 겨울,  블라디보스톡발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떠난 유럽 여행기, [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한때 일요일만 빼고, 하루에 꼬박 열다섯 시간을 매일 재수학원에 박혀 지냈다. 평촌에서 유일하게 건물을 홀로 쓰는 학원이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건물의 외관은 세련되고 넉넉했다. 내부의 실상은 좀 달랐다. 좁아터진 교실에 오륙십 명이 쑤셔 넣어졌다. 이월 말에 창가 맨 뒤의 여학생이 감기가 들면 삼월 중순쯤엔 교탁 앞 아이가 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5층에선 유일하게 창문이 있었던 우리 반의 이름은 ‘A1’. 문과에서 가장 성적이 높은 학생들을 모아놓은 반이었다. 2015년 초의 이야기다.

재수학원의 반 배정은 보통 전년도 수능의 표준점수를 기준으로 한다. 그 전해의 시험은 유독 국어가 어려웠다. 영어와 수학에서 만점을 맞고도 국어를 못 봐 미끄러진 숱한 외고생들은 그 다음 해 재수학원가 문과 1반의 주류가 됐다. 나는 턱걸이로 거기 들 수 있었다. 고등학교 삼 년 내내 수학과 영어에서 깎인 점수를 국어로 메워왔고, 수능에서도 그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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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수원, 멀리는 과천 같은 경기도 남부의 모범생들이 우리 반에 모여 있었다. 나는 거기서 이방인에 가까웠다.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남녀 간 대화를 금하는 사감 선생들이 돌아다니는 복도는 삭막했다. 대학도 아닌 외국어고등학교 잠바는 생경했다. 그걸 입고 다니는 애들 중 몇은 점심시간에 ‘건국’우유를 줬다고 진심으로 화를 냈다. 월간 모의고사 이틀 후 실명과 등수를 붙여내는 ‘빌보드’는 더없이 웃기는 물건이었다.

사실 좋은 친구들이 더 많았고, 그 중 몇을 사귀었고, 그 안에서 설익은 연애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나였다. 열패감이 자존감을 눌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인내심 없고 마음 좁은 내게 학원 생활은 권태로웠다. 그렇게 석 달을 채 못 견디고 덜컥 학원을 나왔다. 어린이날이었다. 가족과 상의하지 않은 일이었다. 화가 난 아버지는 시골로 내려가 버렸다.


반팔이 몸에 익기 시작하던 오월, ‘독학 재수’를 시작했다. 나를 도운 것은 주변이었다. 고3 때 만났던 논술 선생님은 배우는 김에 돈도 벌라며 본인 수업의 조교를 권했다. 거기서 과외 학생을 구하기도 했다. 일찍 취업한 친구는 독서실 구하는 데 쓰라며 선뜻 삼십만 원을 빌려줬다. 어떤 친구는 내가 독서실을 바꿀 때 기꺼이 가방을 가져와 책을 옮겨줬다.

아버지는 한 달 뒤 올라오시더니 나를 중국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과두주 두 병을 함께 비우고 나서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붙인 게 다였다. 죽을 만큼 민망하고 죄송했다. 깐풍기를 먹는 동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침 여덟시부터 새벽 한시, 단조로운 생활은 여전했지만 무리 없이 수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와는 달리 마음 넓은 사람들 덕이었다.

그렇게 긴 수험 생활을 지나던 여름이었다. 다니던 독서실 앞에 가장 친한 친구가 살았다. 녀석은 오랜만에 점심을 먹자고 불러내더니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유럽에 가자는 것이었다. 런던에서 축구 한 게임, 파리의 야경… 삼십 분 가까이 각자의 로망을 나누고 나서 우리는 이내 가득 설레게 됐다. 녀석보다 더 흥분한 건 나였다. 이 지겨운 생활 끝에 오는 게 유럽이라니. 그러나 우리는 이내 현실에 부딪혔다. 바로 검색해 본 직항 항공권의 가격 때문이었다. 대략 왕복 이백만 원.  주머니 털어 사먹은 오천 원짜리 돈까스를 썰며 우리는 말이 없어졌다.

그 때 과외로 한 달에 40~60만 원을 벌고 있었다. 생활비를 빼면 그보다 훨씬 적은 돈을 모아야 했다. 친구가 아르바이트로 모으던 돈의 규모도 대동소이했다. 동남아는 갈 수 있겠다고 말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개선문 위에 석양을 비껴서서 지중해로 가는 바람을 맞아야지, 무슨 동남아는 동남아? 우리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그러고 있을 때 문득 스친 것이 어디선가 들었던, 3등석 10만 원에 불과하다는,

블라디보스톡발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횡단열차였다!


어릴 때는 지도를 좋아했다. 보는 것도,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강릉과 춘천의 위치를 구분할 수 있는 건, 한반도 모양을 가장 정교하게 그릴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꼬마 때 어른들은 그런 것 하나에도 신동 소리를 붙이고는 했다. 사실 나는 어릴 때 기대를 많이 받고 자란 편이었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거둬진 것이지만,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분명 그랬다. 여섯 살 무렵인가, 아버지는 하도 지도를 좋아했던 늦둥이를 위해 전지를 사서 손수 세계지도를 그려주었다. 당시 쉰일곱이었던 아들바보는 아들에겐 물려주지 않은 대단한 손재주를 갖고 있었다. 어린이용 12색 싸인펜만 갖고도 축척이 일정한 지도를 하루 만에 그려낸 것이다. 그 때 유독 크고 공백이 많았던 시베리아에 나는 낙서로 화답했었다.

나의 아버지는 여느 어르신처럼 술을 좋아하지만, ‘잘’ 하시는 분은 아니다. 소주 한 병에 벌써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커지는 아버지가 명절마다 시전하던 레퍼토리가 있었다. 우리 집안은 유독 공부 머리가 좋은 편이다. 삼촌, 고모들이 서로 자기 자식들 이야기를 하자면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식 자랑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서 아버지는 소주잔을 홀짝이며 시나브로 내 자랑을 흘리셨다. 그게 절정이 되면 나오는 일종의 클리셰가 바로 그 레퍼토리였던 것이다.

그 구조는 대략 이렇다. “우리 용규가 한글을 두 살 반 만에 깨쳐서…”로 운을 떼 “내가 이놈을 어릴 적부터 청계천(헌책방)에 데려간 게…”로 본인 덕을 슬쩍 삽입하시고, “그래서 우리 집에 남자가 아직 서울대를 못 갔잖아?”로 절정에 이르면 사람 좋은 큰고모나 둘째고모가 나에게 용돈을 쥐어주시며 마무리된다. 모두가 허허, 웃는 훈훈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허니문은 딱 고등학교 3학년까지였다. 그런 기대를 모두 역사에 묻어둔 채 수원 모처의 독서실에 180cm 80kg의 몸을 숨기고 홀로 재수생활을 보내던 2015년 칠월이었다. 정말이지 한여름 매미가 귀에 달라붙듯 울어대는 여름이었던 기억이다. 그때 쯤 백일보다는 한 달쯤 더 남아있었던, 그 망할 놈의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게 나의 유일한 몫이었다. 그러던 나에게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꽂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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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그리고 서녘 유럽으로. 나와 녀석은 신항로라도 개척한 듯 신났다. 아니, 사실이 그랬다. 단돈 십만 원으로 유럽을 갈 수 있는 길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나와 녀석은 곧바로 여행 멤버 모으기에 돌입했다. 그 날 저녁 친한 친구들을 몇 모았다. 인터넷 강의용 태블릿으로 구글맵을 켜고

“유럽으로 대한항공 직항을 타면 되게 비싸거든, 근데 이 횡단열차를 타면? 모스크바까지 십만 원에 갈 수 있는 거지”

라고 약을 팔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눈빛이 잠시 반짝였지만, 기차를 타고 보내야 할 약 칠박 팔일이 너무 높은 허들이었다. 괜찮긴 한데 그냥 오늘은 술이나 먹자, 이런 식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네 명이 모였다. 모두 여자친구가 없었고, 여행을 떠날 때까지도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다들 돈을 벌고 있었다. 여행을 하기에는 아주 적절한 조합의 넷이었는데, 나중에 그 면면을 소개하기로 하자.

네 명이 모이자마자 대강의 얼개가 짜였다. 큰 틀은 내가 짜고, 각자 가고 싶은 도시를 절충하는 모양이었다. 초기에 생각한 루트는,

속초, 블라디보스톡, 이르쿠츠크(바이칼),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헬싱키,
탈린, 런던, 파리, 프라하, 그리고 인천.

장장 한 달의 거대 기획이었다. 그때 생각해봐도 말이 되나 싶은 일정이었지만, 가을까지 돈이 모이는 추이를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다만 돈을 조금씩 걷어 비행기편 한두 개를 미리 예약해놓았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 11월 12일이 왔다. 내가 두 번째로 수능을 치르는 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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