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8)
[전선으로 돌아오다]

이 글의 제목이 ‘나의 현대사’인데, 정작 필자 본인의 신상에 관한 얘기는 거의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7편을 연재하면서 1987년 6월 항쟁 직후부터 2007년 대선후보 경선까지 20년에 걸친 역사를 다뤘다. 방대한 역사를 압축해서 숨 가쁘게 써대다 보니 개인사는 다룰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2007년은 진보정당운동의 주요 전환점이며 나의 인생에서도 큰 분수령이 된 시기다. 이쯤에서 개인사를 약간 다루는 것도 적절할 듯하다.


속죄

20대 초반에 세상의 모습을 어렴풋이 알게 되면서 소박한 분노로부터 나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30년 넘는 세월을 세상을 바꾸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자 살아왔다. 그 동안에 정치노선을 바꾸거나 조직을 이탈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몇 안 되는 전환점 중에 하나가 내 나이 40줄에 접어든 2003년에 있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오직 노동계급의 전위를 지향하던 20년 세월에 근본적 의문을 갖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나의 활동은 20년 전과 현재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서글픈 것은, 20년 후에도 달라질 것이 없으리라는 예상이었다. 강령 논쟁으로 밤낮을 지새우고 토씨 하나에 조직이 이합집산 하는 그런 방식의 활동이 지겨워졌다. 힘든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전망이 없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깊은 고뇌 끝에 결심했다. 이런 일을 위해서 내 인생을 더 이상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조직 활동을 청산했다.

활동을 그만두고 보니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허망했다. 그보다 더욱 크게 허망한 사람은 나의 가족이었다. 결혼하고서 10년 넘는 세월을 보내며 단 한 번도 가정에 경제적으로 기여한 적이 없다. 생계, 육아, 교육 모두가 배우자 몫이었다. 그렇게 인내하며 살아온 그녀는 내가 활동을 접었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남편이란 작자가 돈 한 푼 벌어오지 않아도 원망한 적 없으며 남편이 하는 일을 존중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당신은 그동안 뭐하고 살았느냐는 것이다. 할 말이 없었다. 혁명가를 빙자해서 가족을 희생시키며 살아왔는데, 그간의 활동에서 거둔 성과라고는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밥값이라도 해야 했다. 자영업을 하는 배우자를 도와 이른바 ‘무보수 가족노동’에 종사했다.


개량주의정당으로 전향하다

내가 조직 활동을 접었다는 소식을 듣고 몇몇 사람들이 찾아왔다. 자기 조직에 들어와서 함께 일하자고 권유했다. 특정 조직을 탈퇴하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활동 방식을 청산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정중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는 무덤에 갈 때까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다만 고인이 된 남궁원 동지의 이름은 밝혀도 무방할 것이다. 그 당시에 ‘사회주의정치연합’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의 설명을 듣고는 몹시 안타깝다는 말을 남기며 헤어졌다. 훗날 그 분이 투병 끝에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그날 거절한 것이 가슴 아프게 미안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는 후배들도 찾아왔다. 이제 ‘암흑가’(^^) 생활을 청산했으니 합법정당에 들어오시라는 권유를 받았다. 비록 전업활동은 접었지만 우리 운동에 최소한의 기여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 시점에 내 입장에서 선택할 곳은 민노당 뿐이었다. 그래서 일단 후원당원으로 등록했다. 정당원이 아닌 후원당원을 택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지역편제였다. 정당원으로 들어갈 경우 거주지 관할 지구당 1) 에 소속되어야 했다. 내가 사는 곳은 용산이다. 인천연합이 처지른 종파사건으로 유명한 곳이다. (거주지 기준으로 소속을 강제하는 제도 자체가 그러한 패악질 때문에 도입되었다.) 그곳에 소속되고 싶지 않았다. 반면에 후원당원 경우는 거주지에 제한되지 않고 지역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나의 지인들이 주로 인근지역인 마포지구당 소속이라서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둘째 이유는 자존심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개량주의 정당이라고 욕하던 곳에 입당하려니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가소로운 일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민주노동당 후원당원이 되었다. 2003년 8월의 일이다.


당원의 권리를 취득하고 용산으로

그로부터 2년의 세월이 흘렀다. 또 누군가가 찾아왔다. 이제 그만 정당원으로 전환하고 용산에서 함께 활동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마침 나도 당권을 취득하고 비록 전업은 아니라도 당 활동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당원으로 전환하고 용산지역위원회 2) 로 이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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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용산 화상경마장 반대투쟁. 가운데가 필자 우측이 필자의 배우자다. ]

지역을 옮기고 ‘용산포럼’이라는 모임에 가입했다. 인천연합에게 쫓겨난 김종철 전 지구당위원장을 비롯해서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용산의 범좌파 활동가들이 용산 탈환을 위해 권토중래하는 모임이었다. 그곳에서 함께 활동했다. 깊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시초가 되었다. 2005년 8월의 일이다.


다시 일선으로 – ‘전진’ 가입

그리고 또 1년 남짓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는 같은 용산 당원이며 전진 집행위원장인 한석호 동지가 찾아왔다. 전진 가입을 권유하리라고 짐작했으나 그 이상이었다. 몇 년 쉬었으니 이제 일선에 복귀하시라는 것이다. 전진 상근자로 들어와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었다. 3년 남짓 일선을 떠나있으면서 세상일이 답답하여 활동가로 복귀하고 싶은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비록 비합법 조직 활동은 포기했으나 나는 여전히 사회주의자였다. 전편에서 소개했듯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조직 중에서 가장 큰 대중성과 잠재력을 가진 곳이 전진이라고 생각했다. 제안을 수락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나 혼자 결정할 수 없었다. 배우자의 동의가 필요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염치없는 일이었다. 용기를 내서 고백했다.

“‘이런 조직이 있는데, 나더러 들어와 일하라고 한다. 하고 싶다. 과거와는 다르게 약간의 임금도 준다. 물론 여기서 내가 떠나고 다른 사람을 고용하는 데 들어가는 인건비보다는 낮을 것이다.”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평생 배우자 등치고 살다가 3년쯤 착실하게 살았는데, 앞으로 또 등치고 살아도 되겠냐는 뜻이었다.

이런 후안무치한 주청에 대해 그녀의 반응은 의외였다.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며, 그동안 여기서 일하는 모습이 편안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윤허한 것이다. 실로 감읍할 일이었다.

2006년 11월 20일 월요일 전진 사무실에 첫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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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전진 가입 초기이며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6년 12월, 스크린 쿼터 원상회복 청와대 1인 시위]


이중적 성격의 민낯

새로운 조직에 들어오니 모든 것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도 다르고 조직 문화도 달랐다. 신속하게 적응하기 위해 전진의 모든 회의에 참석했다. 내가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자리도 빠짐없이 참관했다.

때는 2006년 연말. 전진 내에서는 두 가지 민감한 현안이 있었다. 하나는 이듬해에 있을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경선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이듬해 1월에 있을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였다. 전진의 양대 주요 기관인 당사업위원회와 노동위원회에서 각각의 문제를 논의했다. 당사업위원회에서는 대선후보 경선에서 전진의 지지 후보를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과 회원 각자의 의사에 맡기자는 의견이 대립했다. 노동위원회에서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 전진의 독자후보를 내자는 의견과 좌파연대가 우선이라는 의견이 대립했다. 물정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진지하게 경청할 뿐이었다. 마치 선문답 같은 그 의견들의 진짜 의미는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전편에서 썼듯이 전진 내에서 당 활동가들은 주로 노회찬 지지, 노동 활동가들은 주로 심상정 지지였다. 심상정 지지자들은 전진이 지지 후보를 결정하기를 선호했고 노회찬 지지자들은 각자의 선택에 맡기기를 원했다. 이것이 당사업위원회에서 나온 선문답의 진짜 의미였다.

전진의 노동 활동가들은 대체로 금속과 공공 양대 산별에 소속되어있었다. 민주노총 위원장 후보로 금속 회원들은 김창근 전 금속노조위원장을, 공공 회원들은 양경규 전 공공연맹위원장을 지지했다. 그 당시 민주노총에서 좌파연대의 주된 대상은 ‘노동자의 힘’(약칭 노힘) 3) 이었다. 노힘 회원들은 과거 발전파업 전력 등의 이유로 양경규 위원장을 불신하는 반면에 김창근 위원장에겐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노힘과 좌파연대를 꾸릴 경우 김창근 위원장이 후보가 될 가능성은 있지만 양경규 위원장으로 합의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래서 금속 회원들은 좌파연대를 주장했고 공공 회원들은 독자후보를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노동위원회에서 나온 선문답의 정체다.

노동위원회에서 벌어진 양측의 논쟁은 매우 치열했다. 심지어 어느 금속 회원은 양경규 3대 불가론까지 제시하며 맹렬히 반대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양경규 위원장이 후보로 정리되어있었다. 그간의 치열한 대결은 없었던 일처럼 되었다. 민주노총 후보를 선출하는 전진 총회에서는 표결 없이 만장일치로 양경규 위원장을 후보로 선출했다. 이처럼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 과정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대선후보 경선 논의와 연동하여 절묘하게 정리된 것이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전진의 노동 활동가들은 주로 심상정 지지였으나, 금속과 공공 간에 온도 차이가 있었다. 금속노조 출신인 심상정 후보에 대해 당연히 금속 회원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반면에 공공 회원들은 비교적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런 사정 속에서 심상정 후보가 금속 회원들을 설득하여 민주노총 선거는 양경규 위원장에게 양보토록 하며, 반대급부로 대선후보 경선에서 공공 회원들이 심상정 후보를 적극 지지한다는 빅딜이 이뤄진 것이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금속 회원들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좌파연대도 이뤄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당장 러닝메이트인 사무총장 후보도 전진 내에서 찾아야 했다. 신망 있는 김창근 위원장을 설득하기로 했다. 위원장 후보를 양보한데다가 양경규 위원장보다 선배인 김창근 위원장에게 사무총장 후보를 제안하는 것은 여러모로 결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창근 위원장은 간곡한 설득을 받아들여 사무총장 후보를 수락하게 된다. 언제나 개인의 입지보다 조직을 중시하는 김창근 위원장의 품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훗날에도 공석이 된 금속노조 사무처장 대행을 맡기까지 했다. 금속노조 전 위원장이며 노동운동의 원로로서 파격적인 일이었다.

어쨌거나 좌파연대가 무산된 상태로 치른 민주노총 선거에서 전진 후보들은 패배하고 민주노총 집행부를 또다시 우파가 장악한다.


현실을 직시하며

이처럼 장황하게 이면의 얘기들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전편에서 소개한 전진의 이중적 성격 중에서 중앙권력에 집착하는 민낯의 일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흉은 아니다. 권력의지가 그 자체로 악덕은 아니다. 세상을 바꾸고자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권력의지가 있어야 한다. 자기가 옳기에 권력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의지가 정당하려면 자기 정체성이라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사회주의 정치조직이 권력을 잡고자 하는 것은 그 자체로 타당하다. 그런데 자기 정체성이 허울에 불과하고 심지어 권력의지와 대립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위에서 소개한 일화들은 그저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그 자체로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권력을 잡고자 노력하면서 정체성을 지킨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구분된다. 전진의 이중적 성격은 양립 가능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가입 초기의 극성스러움 덕분에 비교적 일찍 이런 속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전진은 나에게 그런 조직이었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바치며 뭔가를 시도하려는 의욕이 생겼다. 비록 훗날 실패로 끝났지만, 진정한 사회주의 정치조직으로 혁신하려는 의지는 그 순간에 불타올랐다. ■


  1. 지금의 당원협의회. 그 당시에는 정당법상의 법정조직으로 지구당이 있었다. 2004년 3월에 정당법을 개정하여 지구당을 폐지했다. 그 때문에 기초 당부는 임의조직인 지역위원회, 당원협의회 등으로 전환했다.
  2. 지구당이 폐지되면서 임의조직인 지역위원회로 전환했다. 훗날 진보신당과 지금의 노동당에서는 당원협의회라는 명칭을 쓴다.
  3. 훗날 해산되었다. 노힘 출신들은 활동 영역에 따라 정치운동은 변혁당에서, 노동운동은 노동전선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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