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년 #9]

분당을 결심하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NL의 지지를 받은 권영길 후보가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좌우파의 세력구도는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굳어졌다. 세력구도 자체보다 근본적 문제는 게임의 룰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이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반복되어 해결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더는 함께할 수 없다는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범좌파 활동가들은 ‘분당’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사석에서의 울분 표출에 그쳤다. 2007년 가을까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분당을 주장하는 개인이나 조직은 없었다.


토요일 저녁의 통화

2007년 11월 17일 토요일 저녁…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1) 가 있던 날이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후보 선출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안건을 다뤘다. 원안은 1인 6표(여성장애 1표, 비정규노동 1표, 여성명부 2표, 일반명부 2표)였다. NL의 독식을 가능케 하는 룰이었다. 당연히 범좌파는 반대 입장이었다. 치열한 논쟁이 예상되었고 결과에 관심이 모아졌다.

필자는 당시 전진 집행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평화헌법 9조회’가 주최하는 국제연대 행사에 참여하느라 중앙위 참관은 가지 못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 중앙위 진행이 궁금해졌다. 회의에 참관한 김종철 집행위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녹취하지 않았기에 정확한 대화 내용은 다를 수 있으나, 대화의 요지는 명확히 기억한다.)

        ‘어찌되어갑니까?’

        (벌써 술 취한 목소리로) ‘끝났습니다. 뒤풀이 왔습니다.’

        ‘벌써 끝났어요? 그럴 리가…’

        ‘일사천리로 모두 표결했습니다. 원안대로 다 밀어붙였어요.’

        ‘그 안건을 표결로 밀어붙였다고요?!’

        ‘그렇습니다. 우리 이제 분당을 준비합시다.’


취중인데다 홧김에 뱉은 소리라 생각하고 무심코 대답했다. ‘그럽시다.’

그 당시 우리에게 술자리에서 ‘분당’이란 말을 내뱉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날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많이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정확히는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전진 회원게시판(대외비 게시판)에 김종철 집행위원장의 글이 올라왔다. ‘오늘 중앙위를 보며… 분당을 결심하다…’라는 제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전진의 집행책임자가 분당을 결심한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분당에 신중한 입장이었다. 종북파의 무한패권을 잘 알고 있었고 해결 불가능하며 공존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 이후의 일들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엄밀히 말하자면 미지의 길에 나설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어제 저녁에 내뱉은 말이 진지한 것인 줄 알았다면 말렸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토요일 저녁의 통화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른바 루비콘 강

김종철 집행위원장의 글은 분당 논의의 기폭제가 되었다. 사석에서만 오가던 분당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필자도 곧 결단하게 되었다. 다소 늦었지만 누구보다 집요했다. 그 집요함이 오늘 여기까지 이어진 것이다.

현직 집행위원장에 이어서 전직 집행위원장도 나섰다. 11월 19일 전진 회원게시판에는 한석호 전 집행위원장의 ‘진보신당을 창당하자!’라는 글이 올라왔다. 이때부터 새로운 정당의 이름은 ‘진보신당’으로 통용되었고 이는 수개월 후에 공식 당명이 되었다. 일반명사가 고유명사로 된 것이다.

한석호 전 집행위원장의 글은 다음과 같이 비장하고 멋진 각오로 마무리되었다.

동지들! 우리 앞에 루비콘 강이 있다. 누구나 저 강을 건너면 안 된다고 했다. 우리도 그렇게 말하고 생각했었다. 어찌해야 하나, 망설여진다. 목숨을 걸고 건너야지, 결심하고서도 발이 멈칫거린다. 그러나 어차피 강을 건너지 않으면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원로원의 개가 되어 살아가거나, 아니면 비참한 죽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망설여야 한단 말인가. 강을 건너자. 그리고 로마로 진격하자. 그래서 우리 모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되자.

한석호 전 집행위원장의 루비콘 강 이야기는 곧 유명해졌다. 그러나 훗날 그는 로마 진격이 아니라 원로원에 투항하기 위해 루비콘 강을 두 번 건너는 기적을 창조한다. 카이사르도 해내지 못한 전무후무한 기적이다.

9


전반적 우경화

2007년 12월 대선은 한국 사회의 전반적 우경화를 입증하는 지표가 되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민주당계 10년 집권 기간에 정치적 자유는 일정하게 개선되었으나 민생은 험난해졌다. 사실 경제 지표가 크게 나빠진 것은 아니다. 불평등이 심해진 것이다. 김대중 집권 이래로 신자유주의의 압도적 지배 아래서 비정규직 확대와 고용불안이 만성화했다. 이는 민주당계 중도우파 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대안은 왼쪽에서 찾아지지 않았다. 신자유주의는 대중의 파편화와 함께 노동운동 위기를 가져왔고 이는 곧 진보진영 전반의 퇴조를 초래했다. 종북파가 당을 장악하는 현실도 작용했다. 그들이 다루기 쉬운 후보를 선택함으로써 ‘대권 삼수생’ 이미지의 노쇠한 후보 전술이 정파적 이유로 통용되었다. ‘코리아 연방 공화국’과 같은 편향된 구호 및 정책을 채택하여 대중과 괴리되었고 내부 분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7년 대선에서 결국 이명박이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중도우파 10년 집권이 끝나고 한나라당이 정권을 되찾았다. 민주노동당은 원외정당 시절보다도 저조하게 득표했다. 대중들은 먹고 살기 어려워진 세상에 대한 불만을 우경화로 표출했다. 진보진영이 신뢰받지 못할 때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대선이 실패로 끝나자 분당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전진 내부 논의를 넘어서 범좌파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조승수 전 의원 2) 이 앞장섰다. 그를 필두로 이른바 ‘선도탈당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분당에 대한 범좌파의 입장이 일치하지는 않았다. 노회찬 심상정 등의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분당에 소극적인 입장도 있었다. 전진 내부에서도 의견 대립이 있었다.


전진 내부의 분당 논쟁

분당 논쟁으로 전진 내부는 혼돈과 분열이 발생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정세에 따른 능동적 논의와 대응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극복 불가능한 종파적 패권 관철로 인해 민노당의 지속 불가능함에 대한 의견은 이미 제기되고 있었다. 이는 진보정당운동에서 주사파와의 정파연합 노선이 실패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분당 논의가 본격적으로 촉발된 것은 2007년 11월 민노당 중앙위에서 비례대표 선출방식 등이 일방적으로 처리된 사건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그 전까지 조직 내에서 진보정당운동 노선의 전면적 재검토에 관한 공식적 논의는 부재했다. 일부 문서를 통해 대안 모색에 관한 문제의식이 제출된 바 있으나, 우회적 표현방식으로 수정되었으며 공론화하지 못했다.

이는 정세 변화에 따른 운동의 전망에 관한 고민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며, 한편으론 당내에 분명히 존재하는 정파대립구도에 있어서 수세적 자기검열의 결과라는 측면도 있다. 즉 진보정당운동의 대안에 관한 논의를 공론화하는 것 자체를 주저하고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둘째는 전진 회원들의 활동 조건 차이다.

분당 논의가 본격화한 이후 조직 내에 명백한 의견 대립이 있었다. 민노당의 지속 불가능함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으나, 분당 시기에서 이견이 있었다. 이는 정세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점도 있으나, 각자의 활동 공간에 따른 활동 조건의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이 컸다.

당 활동가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대체로 분당에 찬성한 반면에, 노동(중앙파) 활동가들은 (역시 전부는 아니지만) 분당에 반대했다. 운동 일선에서 직면하는 현실이 서로 다름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당 활동가 중에서도 노회찬 심상정 등 명망가들과 가까울수록 분당에 반대하거나 신중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의견 대립은 훗날 전진의 조직진로와 함께 진보정당운동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


 

  1. 지금의 전국위원회. 그 당시 명칭은 중앙위원회였다.
  2. 2004년 총선에서 울산 북구에서 당선되었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여 전직 의원 신분이었다. 2006년 당직선거에서 범좌파의 지지로 당대표에 출마했으나 NL이 지지한 문성현 후보에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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