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년 #10] 진보신당 창당하다

대선이 끝나고 2008년에 접어들면서 분당 움직임이 급류를 탔다. 직접적인 계기는 비례대표 후보 선출 방식의 일방적 처리와 대선 결과였다. 그러나 이미 수년간 누적된 돌이킬 수 없는 근본 원인이 있었다. 분당은 비극의 원인이기 전에 비극의 결과였다.


마침내 갈라서다 – 2.3 당대회

대선 결과에 책임지고 문성현1)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가 총사퇴했다.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심상정 의원이 비대위원장을 맡았다. 범좌파의 지지를 받는 명망가 국회의원이며 또한 분당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당을 수습하기에는 적격으로 보였다. 비대위의 임무는 당 혁신방안을 마련하여 당대회에 제출하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혁신안이 마련되었다. 여기에는 일심회2) 관련자 제명안도 포함되었다. 사실 혁신안은 선도탈당파와 종북파 모두 만족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선도탈당파는 노회찬 심상정 두 명망가의 동참이 없어도 분당을 결행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심상정 비대위의 혁신안은 이를 무마할 최후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만일 종북파가 혁신안을 수용하거나 또는 일부라도 받아들였다면 두 명망가들의 이탈은 없었을 것이며 분당의 규모는 훨씬 축소되었을 것이다.

NL 계열 내에서도 온도 차이가 있었다. 일부는 양보하여 분당을 막아보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경기동부연합’의 입장은 강경했다. 혁신안 일부분도 동의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2008년 2월 3일. 역사적인 ‘2.3 당대회’가 열렸다. 장시간 격론 끝에 결국 표결에 의해 혁신안은 전면 부결되었다. 이로써 분당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심상정 비대위는 총사퇴했으며 두 명망가를 비롯한 범좌파의 대거 탈당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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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역사적인 2.3 민주노동당 임시 당대회]


진보신당 창당

분당을 결행한 시기는 4월 총선이 임박한 시점이었다. 빠른 시일에 신당을 창당하고 총선을 치려야 했다. 우선 임시 정당 체제로 창당하고 총선 후에 재창당하기로 했다. 아직 새로운 정당에 결합하지 않은 인사들을 규합하는 일이나 정당 체제를 완비하는 일은 총선 이후로 미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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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진보신당 창당, 5인 공동대표단]

이러한 합의에 따라 2008년 3월 창당대회를 열어 ‘진보신당 연대회의’라는 이름으로 공식 창당했다. 말 그대로 임시 체제였다. 정식 당헌과 강령도 제정하지 않고 중앙선관위에 등록할 임시 당헌과 정강정책으로 대신했다. 창당대회에서 간선을 통해 김석준, 노회찬, 박김영희, 심상정, 이덕우 5인을 공동대표로 선출하고 그중 노회찬 심상정 2인이 상임공동대표를 맡았다. 직선 대의기구도 구성하지 않고 시도당위원장으로 구성된 ‘확대운영위원회’가 의결기구 역할을 했다. 이렇게 임시 정당 체제를 갖추고 곧바로 총선 치러야 했다.

진보신당은 2008년 4월 총선에서 노회찬 심상정 2인의 지역구 당선과 정당투표 3% 이상 득표에 의한 비례대표 의석 획득을 목표로 했다. 가능할 수도 있는 목표였다. 그러나 결과는 아쉽게 실패였다. 노회찬 심상정 두 후보는 지역구에서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다. 정당투표에서는 2.94%를 득표하여 0.06%라는 박빙의 차이로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매우 아쉬운 결과였으나, 지역구 비례대표 합산 평균 2% 기준을 넘김으로써 국고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정당으로서 생존 조건은 갖춘 것이다.

총선 직후에 진보신당 당원을 증가하게 만든 두 가지 현상이 벌어졌다.

하나는 이른바 ‘지못미’ 현상이었다. 아깝게 의석 획득에 실패한 데 따른 동정 여론이 조성되었다. 덕분에 당원 숫자가 증가했다.

또 하나는 광우병 촛불 투쟁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취임 직후에 실시한 2008년 4월 총선에서 압승하여 안정적인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 권력 기반을 다진 이명박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반동적 정책들을 강행했다. 특히 광우병 위험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협상에서 대폭 양보하여 쇠고기 시장을 추가 개방했다. 그에 따라 광범위한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촛불 투쟁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진보신당을 돋보이는 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노회찬 심상정 진중권 등 스타 인사들의 활약과 이를 시민들에게 생생히 전달하는 인터넷 방송 칼라TV의 활약이었다. 그 덕분에 당원 숫자는 더욱 크게 증가했다.


전진 분열과 재정비

분당을 둘러싼 전진 내부의 논쟁은 2.3 당대회 결과에 따른 급격한 분당과 창당 그리고 총선으로 이어지는 긴박한 정세 속에서 잠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총선이 끝나자 곧바로 혼란과 분열이 재현되었다. 이미 진보신당이 출범한 시점에서 쟁점은 분당 여부가 아니라 전진의 존폐 문제였다. 7편에서 소개한 전진의 이중적 성격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사회주의 정치조직’이라는 성격과 민노당 주사파에 대항하는 반정립적 성격 중에서 무엇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으로 하느냐에 따라 대립이 벌어졌다. 즉 조직의 존재 이유에 관한 근본적 대립이었다.

당 내 반정립적 성격에 방점을 찍은 회원들은 전진의 역할이 마감되었기 때문에 조직을 해산하자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정치조직에 방점을 찍은 회원들은 전진의 역할은 이제부터라고 주장했다.

2008년 5월 25일 대전에서 열린 전진 제4차 정기총회에서 조직 진로 결정을 안건으로 상정했다. 치열한 논쟁을 치르고 수차례에 걸친 수정안 표결을 거친 끝에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4기 집행부는 변화한 정세와 조직위상에 조응하는 정치노선 및 조직노선을 제출하여 임시총회에서 확정한다.

그리고 4기 집행부를 선출했다. 필자가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반 토막이 될 조직을 떠맡는 궂은일이었으며, 진정한 사회주의 정치조직으로 혁신할 무거운 사명이기도 했다.

이후 2개월의 준비와 논의를 거쳐 7월 21일에 임시총회가 열렸다. 정치노선과 조직노선을 포괄하는 ‘전진 총노선’이 제출되었다. 토론과 수정을 거쳐 사회주의 정치조직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총노선을 확정하고 회원 재정비를 결의했다. 이로써 조직 진로 논의는 마무리되었다. 해산을 주장한 사람들은 대거 이탈했다. 떠날 사람 떠나고 남은 사람들이 새로이 출발했다.


물 건너간 재창당

2008년 총선 이후 ‘지못미’ 현상과 광우병 촛불 투쟁에 따른 당원 증가로 진보신당은 활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좋지 않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진보신당은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임시 정당 체제로 창당하면서 총선 이후에 재창당을 예정했다. 이는 당 바깥의 노동운동 조직을 비롯한 다양한 세력을 합류시키고 외연을 확장한다는 목표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원 증가에 고무된 지도부는 현실 안주를 선택하게 되었다. 결국 외연 확장은 이뤄지지 않았고 당 체제를 완비하는 것으로 그쳤다.

창당 1년이 경과한 시점인 2009년 3월 당대회에서 당헌과 강령을 제정했다. 최고의결기구인 당대회와 함께 일상적 의결기구인 전국위원회도 구성했다. 그리고 당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단일지도체제를 채택하고 노회찬 (단독)대표를 선출하는 것으로 재창당을 대신했다. 이로써 당 체제를 완비했으나 1년 전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재창당은 물 건너간 것이다.


행운의 원내진출

2009년 4월에 울산 북구에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있었다. 그곳에서 당선되었던 조승수 전 의원이 출마를 결심했다. 일차 관건은 후보단일화였다. 민주노동당에서는 원래 울산 동구에 기반이 있는 김창현 전 동구청장이 지역구를 옮겨서 출마했다. 두 정당 간에 후보단일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에 합의했고 결과는 조승수 후보의 승리였다. 본선에서도 행운이 따랐다. 집권당인 한나라당 후보와 공천 탈락하여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보가 출마해서 3파전이 되었다. 범여권 표가 분산되는 유리한 구도였다.

원외정당으로서 의석 획득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맞아 전당적 지원이 투입되었다. 중앙당을 비롯해 각급 당부가 총동원되어 지원 유세에 나섰다. 당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도 줄을 이었다. 웬만한 당 활동가들은 거의 대부분 울산을 다녀갔을 것이다. 거당적인 지원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한 끝에 결국 조승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창당 1년여 만에 원내진출의 꿈을 달성한 것이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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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조승수 당선, 저들 3인은 훗날 당을 떠나고…]

그러나 당원들의 피와 땀으로 얻은 소중한 의원직은 훗날 개인의 소유물로 전락하여 물거품이 된다. ■


  1. 원래는 단병호 심상정과 함께 노동운동 중앙파의 핵심 인물로서 이른바 ‘문/단/심’으로 통했다. 그러나 2006년 당직선거에서 NL의 지지를 받고 당대표가 되었다.
  2. 공안기관에 적발된 종북조직의 이름이다. 민주노동당 활동가들의 신상과 동향을 북한 당국에 보고한 이른바 ‘최00 보고서’가 입수되어 당 내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NL측은 공안기관의 탄압이라는 측면만 강조한 반면에, 범좌파는 공안 탄압과 별개로 당의 정보를 북한 권력집단에 유출한 반당적 행위로 규정했다. 이 사건 처리 방향이 당 내 종북 문제 해결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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