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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6] 잠시 서행(西行)을 멈추고

겨울의 여행은 휴양보다는 체험에 가까웠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언가를 자꾸 겪어야 한다는 것이 좋은 점이었다. 마음은 낯선 공기에 맡겼지만, 어디로 팔려가도 소문 없이 사라질 몸뚱이에 바짝 힘을 줘야 했다. 행로를 정하고 여비를 계산하고 추위를 피하면서 뭔지 모를 음식을 맛보는 사이 정신없이 여러 날이 지나갔다. 그럼에도, 즐거웠다. 2016년 1월의 나에게는 더없이 마땅한 여행이었다. 예비 삼수생인지 예비 대학생인지 모를 신분에서 잠깐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려버린 컵라면이 두 개가 남고, 한국에서 챙겨온 감기약이 다 떨어졌을 때 도착한 곳이 새벽 다섯 시의 이르쿠츠크였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새벽 한 시. 삼일 내내 무서운 표정만 하고 있었던 우리 칸 차장이 웃어주었다. 두 명은 감기가 걸려 있었다. 한기가 뼛속까지 스몄고, ‘수증기’는 더 선명히 반짝였다. 어느 곳보다도 진했던 보랏빛 하늘색이 기억난다.

하루에 한 번 있다는 모스크바행 001편의 도착 시각이 이미 몸에 익은 택시기사들이 역시 우리에게 호객을 들이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유럽에서 가장 많이 마주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만큼 흥정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편익을 비교해도 택시보다는 우월한 것이 러시아의 대중교통 가격이다. 안 들어봐도 2천, 3천 루블을 불렀을 기사들을 피해 역을 빠져나왔다.

이르쿠츠크역은 크고 검고 무거운 출입문을 열어야 드나들 수 있다. 러시아 기차역이 다 그렇다. 멀리서 보면 철문인지 나무로 만들었는지 분간이 안 되고, 닫히기 직전 찢어지는 소리를 낸다. 역전은 뭐랄까,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느낌을 주는데, 자동차가 서너 열로 주차돼 있기 때문이다. 경계선 하나 없이 차들이 정렬돼 있다.

그보다 몇 걸음 앞에서 트램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시베리아 제일의 도시, 그 중앙역 치고는 퍽 소박한 정류장은 사실 표지판도 의자도 없다. 그저 누군가 서 있으면 알아서 버스가 문을 연다. 좌우가 터무니없이 길었던 역 앞을 오가면서 정류장을 한참 찾다, 버스가 역 중앙부 앞에서 서는 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아… 아진(1번) 뜨람바이?

라고 물색없이 물어본 뒤에야 알았던 사실이다.

만화를 만들면 어느 화백이든 똑같이 그릴 법한 인상의 차장이 티켓을 끊었다. 예의 무표정과 후덕한 뱃살. 이거 기차에서도 본 사람 같은데. 한 사람 앞에 15루블, 짐 값은 없었다. 한화로 백 원 남짓. 의자 사이로 푹 꺼진 공간에 캐리어 넷을 우겨넣었다. 트램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객차 맨 뒤에 붙은 노선도뿐이었다. 성에 낀 창이 바깥을 가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는 뜻 모를 노어들을 읽지 못했다. 그러니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목적지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조금의 다른 표본도 없이 모두 백인이었던 승객들은 어리버리한 네 이방인에게 덤덤했다. 그런 꼴의, 환영도 박대도 차별이랄 것도 없는 표정을,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다.

바이칼 호수 안의, ‘알혼(OLKHON) 섬’으로 가는 것이 오늘의 과업이었다. 중앙시장에서 그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탑승하는 것이 그 첫 임무였다. 그렇지만 ‘Central Market’ 비슷한 키릴 문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상점들이 몰려 있는 곳이 시장이겠거니, 하는 감에 의지하다 보니 한 정거장을 지나쳐야 했다.

         누가 봐도 저게 시장 아니냐?

         어쩐지 많이 내리데.

손가락으로 성에를 문질러 지우고, 지나온 길을 몇 번 돌아보고 나서야 내릴 수 있었다. 노면의 철로 덕분에 찾아가기는 쉬운 길이었다. 백 미터 남짓했을 거리에는 눈이 쌓여있었다. 다만 ‘쌓였다’고 하기에는 너무 단단한 빙질(氷質)이었다. 영하 30도, 지붕 하나 없던 시장의 매대는 각각 번호가 적혀 있었고, 물론 모두 비어 있었다. 동이 튼대도 대체 뭘 팔 수 있을까 싶은 날씨였다. 트램에서 내릴 때까지는 몰랐던 한기가 닥쳤다.

러시아에서는 24시간 내내 영업하는 카페나 식당을 좀처럼 찾기 힘들다. 여덟 시에 열린다는, 그러니까 두 시간은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는 큰 쇼핑센터 옆에서 꼬박 두 시간을 보냈다. 차선이었다. 바람을 피하기 적당했던 자리는 제설차에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백색 가로등 밑에서 일부러 땀을 냈다. 그래야 얼어죽지 않을 것 같았다.

아홉시 쯤 시장 건너편의 주차장에 나가면, 여러 목적지의 표지를 걸어놓은 버스들이 보인다. 운전석 앞 창문에 ‘OLKHON’을 내놓은 벤츠 미니버스의 남자 기사는 인상이 셌다. 우랄알타이와 슬라브 사이 그 어디쯤에 있는 생김새였다. 눈을 맞추고 다가가면

         알혼?

         다, 다.

두 마디까지는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기사는 인상과는 달리 무난한 사람이었다. 알혼이 목적지라는 걸 서로 확인한 후, 우리는 기사의 말을 한참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블랙베리 비슷한 바(bar)형 핸드폰을 꺼내더니 ‘800’을 적어 보여줬다. 우리는 휴대폰을 꺼내 ‘800×4’를 보여주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 다’라며 소년처럼 웃었다.

한 사람당 800루블을 내고 버스에 올랐다. 중국인 커플이 뒤에 탔고, 역시나 중국인인 여자 두 명이 더 탔다.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옆으로 난 창으로 밖을 통 볼 수가 없었다. 성에가 꽁꽁 얼어붙어 있어서 긁어내도 금방 다시 얼어버렸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여 앞 유리를 내다보면, 버스는 거침없이 달렸다. 행로는 북쪽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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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내리기 직전, 2등칸의 좁은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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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기차가 30분간 정차했을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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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지하 보도를 통해 역 건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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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르쿠츠크역. 저 트램이 승객을 막 태우고 출발하는 모습이다. 오른쪽에 유리로 외벽을 꾸민 건물이 역사 본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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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트램 노선도. 지금도 중앙시장이 어딘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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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우리가 탔던 1번 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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