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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8] 어영부영

여행을 왜 다녀왔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러면 나는 으레 ‘재수를 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로 시작하는 길고 지루한 얘기를 한다. 물론 알고 있다, 그게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닐 거라는 것을,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궁색한 대답이라는 것을. 한 번도 대한 적은 없지만, 여행에서 뭘 얻었느냐고 누군가 물어 와도 비슷할 것이다. 둘 다, 딱히 없다. 그냥 왠지 가고 싶었다. 가 보니 생각보다 좋았다. 그게 전부다.

다음날 아침에도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나서야 하는 것이 예의 삶이라면, 여행은 그 권태 가운데 주말처럼 잠깐 찾아오는 것이라 믿는다. 늦게 일어나도, 어물쩡 계획 없이 출발해도 누구도 나무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좋았다. 그래서 모진 북방의 겨울이라도 고까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면 맞을 현실이 틈입하는 것도, 다는 아니지만, 막아냈다.

의무가 있다면 보고 느끼는 것이 그 전부인 나날을 즐기려 했다. 이를테면 파리에선 개선문의 야경도 좋았지만, 숙소로 돌아온 밤 전날 사서 모셔놓은 발렌타인에 취하는 것도 그만큼 좋았다.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오늘도 비가 오는구나, 하고 발코니 밖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우리 넷은 ‘견문을 넓히고 세계를 경험하는 것’에는 다들 시큰둥했다. 다들, 조금 다른 느낌이라서 매력적인 일상을 즐겼을 뿐이다.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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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혼 섬에서 보낸 이박 삼일은 그 맛보기였다. 서행로(西行路)에서 벗어난 이튿날은 오롯이 섬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여덟시 쯤 일어난 것 같은데, 전날 예약한 섬 투어 버스는 열한 시에나 있었다.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가릴 모자를 쓰고, 괜히 밖에 한 번 나가보고, 문 밖에 앉아있던 큰 개의 머리를 한번 만져주고, 아까 식당에서 받은 뜨거운 물컵을 난간에 놓고, 몇 분이나 지나야 차가워지는지 실험해보기로 하고, 계단 밑에서 서너 발짝 돌아다니다 휴대폰으로 기온을 확인하자마자 밀려오는 추위를 피해 얼른 들어오고, 안경에 김이 끼고, 그 김이 지워질 때까지 침대에 앉았다가 안경을 벗어 손으로 흔들어보고, 친구들에게 지금 씻을 건지 물어보고, 아무튼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세수도 않은 채로 아침을 먹었다. 아까 놓아두었던 컵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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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오물’과 이름 모를 스프 그리고 절였는지 무쳤는지 모를 밑반찬들]

첫 날과 둘째 날 홈스테드에서 먹은 세 끼가, 우리가 겪은 러시아 백반(?)의 전부였다.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짜 음식’을 사먹기엔 돈도 없었고, 체험에 대한 의지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밥값이 숙박비에 포함되는지 몰랐던 것 같다. 체크인을 하고서 건네받은 전날 저녁 티켓이 매우 뜻밖이었던 기억이다. 아무튼, 매 끼니마다 밥을 주고 거기다 생선을 얹어주는데, 바이칼에서만 잡히는 이 생선의 이름이 ‘오물’이다. 우리나라에서 배식을 할 때도 쉽게 그러하듯, 두껍게 튀겨냈다. 맛은 대구나 명태와 비슷하다. 육고기도 주는데, 대부분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함박스테이크였다. 직원이 하나를 얹어주면 나는 검지 손가락을 들곤 했다. ‘하나 더…’ 그럴 때마다, 말랐지만 날카로운 인상은 아니었던 아주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완전 급식인데.

고등학교 졸업식을 치른 지 일 년이 채 안 되었던 우리는 모두 그런 식으로, 스테이크 한 조각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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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알혼 섬에서 이륜구동은 모두 사멸했다.]

양말 세 개, 타이즈 두 개, 겉옷 하나에 겉옷을 또 입고 섬을 돌아보는 투어 버스에 올랐다. 한적한 길을 이십 분쯤 지나자 버스가 좌우로 한번 요동쳤다. 낮 기온 영하 이십구 도, 눈이 커진 채 모두 창밖만 바라보는 관광객들을 태운 차가 꽁꽁 얼어붙은 호수에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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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긴다는 고무신 모양(이름이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의 큰 바위 앞에 버스가 섰다. 햇볕이 내리는 바위 윗부분 단면에 눈이 듬성듬성 깔려 있고, 그늘을 만드는 측면 무늬를 따라 수염이 자라듯 고드름이 나 있다. 그리고 호수가 바위와 만나는 부분에서, 이미 한 달은 더 전에 얼었을 물살이 거칠게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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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을 물으면 저쪽 구석을 가리키는 가이드의 능청에 처음엔 잠깐 실망했었다. 신성한 바위라면서… 나는 사람들이 읍하며 절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꼭 엄하고 무거워야 성물(聖物)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곧 깨달았다. 범접을 금하고, 침묵을 무겁다 여기는 나라는 어떤 길로 가는지 우리는 이미 목도하고 있다.

어머니처럼 인간을 품는 그 비경을 뒤로 하고 우리는 호수에 눕고, 사진을 찍고, 바위에 기댔다. 일행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걸어보기도 했다. 동행한 사람들이 표면을 밟다 넘어질 뻔 하고, 또 그 일행들끼리 웃는 광경을 여러 번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커지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귀에 익으면 바이칼의 모습 역시 익숙해졌다. 스며들었다.

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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