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11편]

통합 논쟁

민주노동당 선도탈당파는 애초에 명망가들 참여가 없어도 분당을 결행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이른바 “얼어 죽을 각오”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2.3 당대회 결과로 명망가들이 분당 대열에 동참했다. 총선 결과 국고보조금을 받게 되어 얼어 죽지는 않을 만큼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확보했다. 행운에 의해 국회 의석도 획득했다. 그러나 당의 장기적 발전 전망과 그에 따른 진로에서 명백한 관점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2010년 지방선거를 경과하면서 표면으로 드러나 충돌하게 되었다.


2010년 지방선거

2010년 지방선거는 진보신당 창당 이래로 두 번째 치르는 전국단위 선거였다. 임시 체제를 마감하고 정당 체제를 완비한 이후로는 첫 번째 시험무대가 되었다. 이명박 정권의 실정과 폭정에 의해 광범위한 ‘반MB연대’ 구도가 조성된 터라서 소수정당이 독자 돌파하기에 힘겨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당의 주요 인사들이 광역단체장 후보로 포진하는 등 전면적으로 선거에 임했다. 노회찬 대표가 서울시장 후보로, 심상정 전 공동대표가 경기지사 후보로 출마했다.

본격적인 선거전이 시작되면서 예상대로 후보 사퇴 압박이 들어왔다. 부산시장에 출마한 김석준 전 공동대표가 후보단일화에 합의하고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에 대한 반발로 이용길 충남지사 후보가 사퇴하는 등 흉흉한 일들이 잇달았다.

선거 막판에 더욱 큰 사건이 벌어졌다. 투표일을 사흘 앞둔 5월 30일 일요일에 심상정 경기지사 후보가 사퇴하고 유시민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명백한 당론 위배였다. 후에 심상정 후보는 당기위에 제소되었으나 경미한 징계로 마무리된다. 징계 절차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 사건이 당 진로에 관한 논쟁과 분열을 초래하는 신호탄이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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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정당득표 3%를 넘김으로써 2008년 총선보다 근소하게 향상된 결과를 얻었다. 총선이라면 비례대표 의석 획득도 가능한 득표였다. 분당을 결행하고 신당을 만든 험난한 길에서 단기간에 그 이상의 획기적인 약진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진보신당이 일취월장하는 기적을 창조하지 못해서 불만인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 명망가와 그 추종자들에게는 하루속히 금배지를 되찾는 것이 중대한 관건이었다. 그들의 눈높이는 한때 국회의원 10명을 보유하던 영광스런 시절에 맞춰져있었다. 그들은 똑같은 결과를 놓고 진보신당이 존속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끄집어냈다. 장기적 발전 전망과 그에 따른 진로에서의 관점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선도탈당파의 변절

지방선거 결과에 책임지고 노회찬 대표단이 총사퇴했다. 10월에 3기 대표단 선거에서 조승수 의원이 단독 출마하여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나의 옛 동료였던 한석호 동지가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선도탈당파의 핵심 인물들이 대표와 사무총장으로 포진함으로써 당 내 동요는 진정될 것으로 보였다. 물론 이런 생각은 인간이 자기 소신을 3년 만에 뒤집을 수도 있음을 간과한 착각이었다. 그들은 진보신당이 존속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3년 전에 비장하게 건너자던 루비콘 강을 다시 건너기로 결심한 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바뀔 수 있다. 똑같은 정세 속에서도 판단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얼어 죽을 각오’라며 설파하던 분당이 3년 만에 실패했다면 애초에 명백한 판단 착오와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에 대해 인정하고 반성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말’이 바뀌었을 뿐이다.

3년 전에 분당을 결행한 데에는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 중에서 바뀐 것은 전혀 없었다. 이 정도의 고난은 각오했기에 결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원인이 변함없는데 과거로 회귀하자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통합이냐 독자냐의 논쟁에서 나의 판단과 내 조직의 입장은 분명했다. 당을 지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통합 논쟁

필자의 당 활동 경력 중에서 선출직 당직을 맡은 경우는 딱 한번뿐이다. 2011년 1월에 당대회 대의원에 당선되어 2013년 1월까지 2년간 재임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2년 임기 동안에 다섯 번의 당대회를 경험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중 세 번이 2011년에 있었다. 통합이냐 독자냐의 논쟁으로 한해를 보낸 통한의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1인의 대의원으로서 참석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독자파의 한 축인 전진의 집행위원장으로서 방침을 수립하고 현장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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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27일에 정기당대회가 있었다.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종합실천계획’이 제출되었다. 타 정당과의 통합 협상에서 기준이 되는 문서였다. 독자파 입장에서는 기준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문서 내용이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겠으나 싸움은 그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5개의 수정동의안을 준비했다. 각각의 수정안에 제안설명자와 토론자를 정하고 발언순서까지 정했다. 수정동의안 내용을 충분한 수량 인쇄해서 대의원들에게 배포했다. 구분하기 쉽도록 안건별로 용지 색깔까지 각각 다르게 했다. 이처럼 치밀하게 준비하여 대응한 끝에 5개의 수정동의안을 모두 가결시켰다. 그때까지도 대의원 다수는 통합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것이다. 당대회가 끝나고 독자파는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문서는 문서일 뿐이었다. 통합 협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3월부터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라는 이름의 통합 협상이 진행되었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 진보신당 조승수 대표, 사회당 안효상 대표, 그리고 민주노총을 비롯한 대중조직 대표자들이 대거 참여하는 자리였다. 협상의 성패는 당대회가 결정한 문서가 아니라 대표의 정치적 의지에 달려있었다.

2개월 정도의 협상을 진행한 끝에 5월 31일에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 2011년 9월까지 통합에 의한 새로운 정당을 건설한다는 내용의 최종 합의문이 나왔다. 사회당이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양당 대표자가 서명했다. 이제 남은 절차는 당대회 승인뿐이었다. 6월 26일 임시당대회가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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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운명을 결정할 당대회를 앞두고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통합 승인이 부결될 경우 당이 깨질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단지 소문이 아니라 충분히 근거 있는 것이었다. 각종 공개석상에서 당 지도부에게 당대회 결정 승복 여부를 묻는 질문이 쏟아졌다. 조승수 대표는 진보신당 깃발이 남아있는 한 당에 남겠다고 약속했다(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노회찬 전 대표는 살 길이라면 따르되 죽을 길이라면 따를 수 없다며 불복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했다. 당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3개월 전에 5개의 수정안을 호기롭게 가결시킨 대의원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당대회가 다가오면서 양측 모두 불안했다. 통합파는 가결을 장담할 수 없었고 독자파는 부결 이후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타협안이 제시되었다. 통합 합의문 승인을 보류하고 추가 협상을 진행하여 8월말을 전후해 최종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즉 결전을 미루자는 것이다.

6월 26일 당대회 당일에 위와 같은 내용의 특별결의문이 의장단 직권으로 발의되었다. 내용과 절차 등을 놓고 장시간의 논쟁을 치른 끝에 표결에 의해 가결되었다. 이로써 당 진로 결정은 2개월 남짓 미뤄졌다. 당이 깨질 것이라는 협박과 공포가 낳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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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개월여 후인 9월 4일에 당대회가 다시 열렸다. 통합 합의문 승인의 건이 다시 상정되었다. 2개월의 시간을 낭비한 것 말고는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번에는 결전이 불가피했다. 치열한 찬반토론을 마치고 표결에 들어갔다. 재석 410명, 찬성 222명으로 의결정족수인 2/3에 미달하여 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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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전인 3월 당대회 당시에는 5개의 수정동의안을 가결시킨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독자파가 과반을 점했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9월에는 통합에 찬성한 표가 과반이 되었다. 이 또한 협박과 공포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어쨌거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대의원들은 통합을 의연하게 부결시켰다.

이로써 2011년 한해를 지새운 지긋지긋한 통합 논쟁이 끝났다.

당이 깨질 것이라는 공포는 현실이 되었다. 당을 상징하던 노회찬 심상정 전 대표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대거 탈당했다. 당 깃발이 남아있는 한 남겠다던 조승수 대표도 탈당 대열에 합류했다. 그에게 의원직을 안겨준 당원들의 피와 땀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나마 조용히 떠나지도 않았다. 집단 탈당을 조직하고 사람과 재정, 심지어 자료까지 남은 것들을 초토화했다. 적진에서 철수하면서 남은 물자를 파괴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다. 여기에는 분명한 전제조건이 따른다. 거기가 적진이고, 상대가 적군일 경우다. 그렇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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