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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9] 잿빛 도시


못난 마음이 안으로 향하고, 그 껍데기를 열등감으로 감싸는 부류의 인간이 있다. 그런 이들은 보통 스스로의 모양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탄로 나는 것을 걱정한다. 그러면서도 말이 많은 사람은 흔히 사교적인 사람이라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분명, 결코 잘나지 않은 속내를 방어하고 애써 윤색하려 하는 족속이다. 얄궂은 지식을 자랑하고, 별 것 아닌 얘기에도 자꾸 부언을 한다. 남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데서 얕은 안도를 느낀다. 내가 그렇다.

하지만 누구나 겨울을 위한 외투 한 벌쯤은 갖고 있는 것… 자위와 자조를 쉽게 넘나드는 못난이들을 위로할 말을, 요절한 시인은 남겼다. 1) 부자(富者)나 성인(聖人)이 아니라면 버틸 수 없을, 이따금 돌아오는 회의의 기간에 자신을 다시 세울 외투.

그 값어치를 일러주는 구절은 그럴듯한 이유 없이 떠올랐다. 사흘을 머문 호수를 떠나 이르쿠츠크의 심야로 복귀했을 때, 여행가방의 바퀴를 부러트린 한기는 칠만 원짜리 잠바를 뚫지 못했다. 한 벌만으론 분명 모자란 추위가 어느덧 몸에 익어버린 것이다. 러시아로 떠나온 지 고작 일주일 째였다. 내가 상술한 류(流)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과는 다르게.

우리는 끝내 시베리아 열차 횡단을 완주하지 못했다. 많은 곳을 돌아보고 싶었던 데다 미루어진 일정 탓에 여기서부터는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2)  근처의 호스텔에서 하루를 묵고 도착한 이르쿠츠크 공항은 역시 아담했고, 거의 모든 항로가 십 분씩은 연착이 됐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애써 온 일흔여섯 시간이 무색하게, 그만큼의 직선거리가 되는 모스크바까지는 단 다섯 시간이 걸렸다. 러시아에선 비행기가 연착륙할 때 박수가 터져 나온다는 풍문은 이미 오래전 사라진 습관이었다. 조금은 기대한 광경을 단념하고, 대신 바퀴를 내린 활주로 너머만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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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세레메티예보(Sheremetyevo, Международный) 국제공항은 진한 녹색의 침엽수립 한복판을 느닷없이 차고앉아 있었다. 우랄 산맥을 넘으니 조금씩 흐리어지던 하늘과 닮은 콘크리트의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것은 너른 공동(空洞)처럼 보였다. 그 해로 구십구 년이 되던 혁명이 퇴색하고 그와 함께 광장(廣場)도 러시아 땅에서 사라졌으니, 그 모양은 석회질의 공동(空洞)이라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공항 내부는 그 외관보다 훨씬 화사하고 깨끗했다. 우리는 도심의 아파트까지 공항철도(아에로 익스프레스)와 지하철을 타고 갈 예정이었다. 한 명에 오백 루블이니 도합 이천 루블. 숙소에서 태워주겠다던 이천오백 루블짜리 픽업 차량을 거절하고 나니 조금 아쉬운 가격이었다. 바퀴가 하나 떨어진 내 캐리어의 상태도 상태였다. 그래서 공항 안의 ‘Official Taxi’를 속는 셈 찾아갔다.

바이칼에서 이르쿠츠크로 오던 날, 버스가 안 와서 택시를 탔다. 기사는 삼백 루블을 받겠다더니 도착하자 천 루블을 요구했었다. 전 날의 탐탁찮은 기억에도 불구, 우리는 ‘공식’ 택시니 좀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할 줄 알았다. ‘Speak English?’라며 영어를 어필하던 카운터 남자 직원은 신뢰를 더했다. 목적지를 보여주자 그는 잠깐 계산을 하더니,

5800p.3)

를 적어 보여줬다. 그럼 그렇지, 이 자식들아. 방금 전향적인 자세로 가격을 물었던 나는 기어를 ‘거절’에 놓기로 했다. 우리는 이만 한 돈을 주고 택시를 탈 여력이 없다고. 그러자 그는 곧장 ‘4800’을 써냈다. 친구들을 돌아보니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입꼬리 한쪽이 조금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협상’으로 태세를 전환하라는 은근한 신호. 나는 동의했다. 다시 카운터로 고개를 돌리니 그 직원은 다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우리보다 한 뼘은 더 큰 덩치의, 베이지색 외투를 입었던 우람한 사내. 그의 무서운 눈에 다시 초점을 맞췄다.

그래, 시내까지 이 정도 요금은 나올 수 있지(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진짜 가난한 여행자들이거든, 미안

“We are really poor traveler”라고 말하면서는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푹 쉬었다. 연민을 자아내는 능력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나도 놀랐다. 하지만 차비를 깎아 양주 한 병 사먹을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그랬더니 이제는 그가 묻는다.

너희들 뭐 타고 갈건데 그러면. 거기 완전 도심이거든?

, 우리는 아에로 익스프레스 탈거야.

그랬더니 그가 직접 종이에 운임을 쓰며 계산을 해줬다.

– 700 * 4에다가 300 * 4 for luggage(짐값) 4)

– 700 아닌데, 500이잖아.

 

승운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순간이었다. 그는 조급해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를 너무 ‘띄엄띄엄’ 본 모양이었다. 공항철도 값은 분명 오백 루블. 차비도 안 알아보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는 멋쩍게 웃으며 가격을 정정했지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내가 봤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계산을 마치고, 그보다 조금 싼 ‘3800’을 불렀다. 나는 거기에 웃으며 고개를 젓고, 뒤돌아섰다. ‘Sorry’. 그러나 나의 변속기는 아직 ‘협상’에 있었으니…

My Friend!

 

라며 그가 다시 내 어깨를 잡을 줄 알았던 것이다.

2800!

 

이 정도면 ‘콜’이었지만, 조금 망설이는 척을 했다. 연기의 기본은 호흡이라. 마침내 오케이를 외치고 삼천 루블을 줬다. 그들은 거스름돈 주는 것도 끝까지 꾸물댔다. 미간을 좀 찌푸리고‘Change!’를 붙이니 겨우 이백 루블을 줬다. 그제야 다시 밝게 웃으며 땡큐, 스파시바. 그 표정 그대로 악수를 청해야 협상의 완성이다. 그리고 동지들에게 주문했다.

웃지 마, 자극하지 마.

그러나 우리의 만면에 웃음이 피식피식 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자리에서 기사를 안내받고 택시에 올랐다. 혼다였는지 도요타였는지 기억이 흐리다. 기사는 젊은 남자였는데, 내가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매려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마초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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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숙소 근처의 모스크바 강]


  1. 기형도, ‘조치원鳥致院’
  2. 2편 ‘출발’ 참고
  3. ‘p’는 키릴 문자로, ‘r’ 발음이다. ‘루블(рубль, rubble)’.
  4. 유럽 지하철은 큰 가방의 경우 종종 짐값을 받는다. 이르쿠츠크 트램, 러시아와 프라하 지하철에서 그랬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항철도도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다고는 해도 짐값이 저 정도로 비싸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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