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년 #12]

그날 이후

필자와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 이른바 ‘X86’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흔히 과거의 화려한 무용담 자랑을 즐긴다. 가두에서 화염병 던지며 치열하게 투쟁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과거가 그토록 화려했다면 우리 운동의 초라한 현재 모습은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가 처한 현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다. 찬란한 과거와 초라한 현실의 괴리는 무엇인가? 단지 과거 속에서 각자 끄집어내고 싶은 기억의 차이일 것이다. 화려(?)했던 과거의 추억을 음미하는 것으로는 지금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으며 미래를 위한 교훈을 도출할 수 없다.

이 연재물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화려한 무용담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글의 목적은 과거의 찬란함을 자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도달한 이유를 말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세대는 오늘의 현실을 만든 데 대해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부제가 ‘잃어버린 30년’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날 이후

2011년 9.4 당대회가 끝나고 사무실에 돌아왔다. 1년 묵은 문서들을 파쇄했다. 대부분이 전국위원과 대의원 성향 분류 명단이거나 회의전술 문서였다. 통합이냐 독자냐의 당 내 투쟁으로 1년 세월을 허비했던 것이다. 원하는 결과를 얻었지만 보람 없는 일이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당 내 정치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믿었다. 내부가 아니라 바깥을 향한, 대중을 바라보는 정치를 하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중앙당으로

통합파의 대거 탈당에 의해 당을 재건해야 했다. 11월에 4기 대표단 선거가 실시되었다.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며’ 출마를 결의한 홍세화 선생이 대표에 당선되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이수현 동지가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어느 날 이수현 사무총장이 만남을 청했다. 통합파의 이탈로 텅 빈 중앙당을 전면 재구성해야 한다며 조직실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고마운 제안이었으나 망설임 없이 고사했다. 필자는 그 당시 전진 재조직을 위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통합 논쟁 때문에 오랜 기간 지체된 일이었다. 또한 통합논쟁으로 조직 내부는 더욱 분열되고 훼손되어 있었다. 나 말고는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었다. 조직실장 제안을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며칠 동안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조직실장 직을 수락하라는 권유였다. 맡은 일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일단 당부터 살리고 봐야한다며 이구동성으로 독촉했다. 고민되었다. 후임자를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떠나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일이었다. 주변 동지들의 독려를 더 이상 뿌리칠 수도 없었다.

결국 조직실장 직을 수락하고 사무실을 폐쇄하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내가 없으면 누구도 지킬 사람이 없는 공간이니 어쩔 수 없었다. 급히 사무실을 내놓았지만 2월말에야 나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기에 일단 사무실을 비워두고 중앙당으로 가기로 했다.

2011년 12월 19일 월요일, 중앙당 조직실장으로 임명되어 첫 출근했다.


전진에 관한 기억

이듬해 2월말에 남영동 전진 사무실을 정식으로 폐쇄했다. 사무실을 이사한 경험은 많지만 폐쇄는 처음이었다. 사무실 집기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처분해야 하기에 이삿짐센터가 아닌 중고매매센터에 연락했다. 중고매매센터에서 나온 사람이 집기를 둘러보더니 7년 된 에어컨 말고는 값을 치를 물건이 없다고 말한다. 7년 된 에어컨… 전진의 역사를 정확히 맞춘 셈이다.

회비 인출 및 지출을 비롯한 모든 업무를 최종 마감했다. 집기를 모두 처분하고 컴퓨터 본체 하나와 17호까지 발간한 전진 기관지 1권씩을 챙겨서 집으로 가져갔다. 그것으로 전진의 7년 역사와 나의 5년 활동이 함께 종료되었다.

 

전진은 이중적 성격을 가진 조직이며 공과가 엇갈리는 조직이다. 그 안에서 활동하며 많은 갈등도 겪었다. 함께 활동한 동지들에게는 애증이 교차한다. 그러나 전진이 지향하는 이상은 선입견과 분명히 다른 지점들이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전진에서의 활동은 시야를 넓히는 기회가 되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오직 노동계급이 해방되면 만사형통하리라는 도그마를 넘어서 다양한 가치를 접할 수 있었다.

 

전진 상근자로 들어가서 제일 먼저 맡은 직책 중 하나가 장애인사업팀 간사였다. 나에게는 잠시 불편한 일이 누군가에겐 일상이 될 수 있다는 것,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넘을 수 있는 (있는지조차 모를) 작은 문턱이 누군가에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된다는 것을 비로소 보게 되었다. 아둔하게도 생전 처음 장애인운동을 접하고서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농민사업팀, 여성사업팀(공식 간사는 아니었으나 회의 소집과 준비 등을 맡았으니 간사 격이었다.) 등의 활동도 전진이 아니면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지만, 나에게 다양한 활동의 기회를 준 한석호 동지, 그리고 언제나 진지하게 중지를 모아준 여러 동지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그들 각자와 언제 어떻게 헤어졌든, 한동안 각각의 시점까지 사선을 함께 넘은 동지들이다.

 

텅 빈 사무실을 나서며 만감이 교차했다. 지나간 일에 대한 회한과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걱정이 뒤엉켰다. 중앙당 당직자는 내 인생의 그림에 없던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전진 집행위원장도 내 인생의 그림에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점점 더 중앙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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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낡고 비좁은 남영동 전진 사무실에서 찍은 필자의 모습. 이때만 해도 안색이 양호하다.]


사회당진보신당 합당

생전 처음 중앙당에 출근하여 조직실장이라는 생소한 직책을 맡았다. 전임자는 당을 뜬지 오래이기에 인수인계 따위는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지난 수년간 정치조직을 관리해왔고 전국의 시도당위원장들이 직간접적으로 인연이 있는 분들이라서 업무를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당장 4개월 후에 있을 총선을 준비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또한 홍세화 대표의 공약대로 총선 전에 새로운 진보좌파정당 건설을 추진했다. 실제로 합당할 수 있는 상대는 사회당 말고는 없었다. 사회당과는 (구)전진 시절부터 교류가 있었기에 낯설지는 않았다. 특히 2011년 통합 논쟁 시기에 안효상 대표, 금민 전 대표, 신석준 사무총장 등과 전진 지도부가 자주 회동했다. 진보신당의 통합 논쟁이 일단락되면 두 정당이 합당하고 그 안에서 두 조직이 협력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한 바 있었다. 이제는 그 약속을 지킬 때가 된 것이다.

2012년 2월 19일 임시당대회가 열렸다. ‘진보좌파정당 1차 추친(사회당과의 통합)에 관한 건’이 상정되었다. 표결 결과는 재석 204명 찬성 189명으로 압도적 가결이었다. 이날은 9.4 당대회에 따른 혼란사태 이후 첫 당대회였다. 회의를 마치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합창했다. 미지의 길에 함께 나서기를 결의하며 눈물을 흘리는 대의원들도 있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사회당 당대회에서도 통합안이 가결되었다. 2012년 3월 4일 통합대회가 거행되었다. 두 정당이 하나가 되었다.

진보신당 홍세화 대표가 상임대표를, 사회당 안효상 대표가 공동대표를 맡았다. 당명은 ‘진보신당’을 우선 쓰되, 총선 이후에 새로운 당명으로 재창당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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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사회당 진보신당 통합대회]


총선, 풍찬노숙

2012년 4월 11일 19대 총선은 여러모로 열악한 조건에서 치러졌다. 통합 논쟁 결과로 노회찬 심상정 두 명망가를 비롯한 주요 활동가들이 대거 이탈하여 당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조승수 의원이 탈당하여 원외정당이 됨으로써 비례대표 정당기호는 추첨에 따라 16번을 받았다.

비례대표 후보는 ‘배제된 자들의 서사’ 전략에 따라 김순자 울산연대노조 울산과학대지부장이 1번으로, 홍세화 대표가 2번으로 배정되었다. 지역구는 경남 거제에 출마한 김한주 후보가 유일하게 당선을 기대할 수 있었다. 더구나 김한주 후보는 후보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에서 승리하여 야권 단일후보가 됨으로써 당선 가능성을 높였다.

그러나 총선 결과는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다. 정당투표에서 1.13% 득표에 그쳤다. 거제의 김한주 후보는 개표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근소한 차이로 아깝게 낙선함으로써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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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아버지 납골당을 참배하며 전광판으로 소원을 빌었지만…]

총선 결과에 너무 낙담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선도탈당파가 각오한 그대로 노/심 명망가 없이 신당을 만들었다면 딱 이 정도 결과가 나왔으리라고 자위했다. 물론 그렇게 출발하는 것과 그렇게 축소되는 것이 같은 수는 없었다.

국고보조금이 끊겼기 때문에 당장 축소된 재정에 맞춰 당 운영 방식을 바꿔야 했다. 파견당직제 1) 를 폐지하고 중앙당 당직자 숫자를 30여명에서 절반으로 감축했다. 당 조직력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풍찬노숙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

  1. 광역시도당 당직자 각1인씩을 중앙당이 파견하는 제도. 실제로는 광역시도당 당직자 1인분의 임금을 중앙당이 지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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