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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10] 비싼 수업료를 내다


우리가 사흘을 묵게 될 아파트의 공동현관은 밖에서 자석으로 된 키를 대야 열렸다. 그 철문은 기차역에서 본 것처럼 무거웠지만, 닫힐 때의 마찰음은 없었다. 이끼 같은 녹색 페인트에 이따금 녹이 슨 듯 붉은 빛이 돌았다. 만지기만 해도 파상풍을 앓을 것만 같았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곧바로 로터리가 있었다. 바로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금빛의 높은 건물이 눈에 띄었다.

삼박사일 간 지켜본 모스크바 시내의 건물은 화려하지 않았다. 대개 거대하지만 특징이 없어 보인다. 기껏 크게 지어봤자 네모난 콘크리트 건물에 잿빛을 도배한 것이 태반이니. 건물만으로도 한 블록이 되는 자리를 차고앉았어도 생색은 않는 듯 한 무뚝뚝함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고대의 성채를 연상케 하는 그 건물은 보통의 경우를 벗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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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묘사를 그리 했지만 멋진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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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아르바트 거리]


정부조직의 청사라는 추측은 할 수도 없었지만, 뜻밖에도 러시아 외무성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모두 내려다보는 높이는 모든 나라를 압도하겠다는 의욕을 흘렸다. 일견 우아해보이는 황금빛도 마찬가지였다. 실은 가까이 가 보면 누렇게 바랜 외벽에 금빛 조명을 쏜 것이라, 낮에는 예의 회색 건물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강대국을 자임하는 마초의 나라, 그 체면은 모두 이런 식으로 세우는가 싶다. 외무성 맞은편의 큰 상점가는 ‘아르바트 거리’다.‘맥도날드’나 ‘스타벅스’, ‘쉐이크쉑 버거’ 따위의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모여 있다. 넓은 길이 뻗어 있었음에도 유달리 한산한 거리의 이름이 그 유명한 ‘아르바트’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아르바트 거리를 모두 지나가면 지하철 2호선 ‘스몰렌스카야’ 역이 나온다. 러시아의 지하철역은 대부분 지상에 있었다. 물론 지하도를 통한 출구도 있었지만 티켓을 끊는 본 역사는 그랬다. 플랫폼으로 가려면 거기서 높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다. 정말 빠르고, 정말 깊다. 우리 넷은 한국에서처럼 오른편에 쪼르륵 한 줄을 섰다. 하지만 누구랄 것 없이 빠른 걸음을 재촉하는 현지인들 덕에 곧 발을 떼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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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스몰렌스카야역의 플랫폼. 스크린 도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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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모스크바 지하철의 에스컬레이터]


맘속에서 ‘인내’를 찾자면 한참씩이나 걸릴 모스크바 시민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닫히는 지하철 문틈으로 발을 밀어 넣는 사람이 없었다. 이 동네 기관사는 문을 안 열어주나 싶었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스크린도어가 없는 역에는 승강장 벽면에 시계가 붙어 있다. 그리고 지하철이 출발할 때 시간이 ‘00:00:00’으로 되돌려져 초를 센다. 무슨 ‘출발 드림팀’처럼… 통상 일 분이 채 되기도 전에 다음 전동차가 들어왔다. 일 분. 기막힌 배차간격은 그만큼만의 여유를 준다. 기관사들의 입장은 다르겠지만.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고, 1호선 ‘오호트니 랴트’ 역에 내려 붉은 광장으로 갈 수 있었다. 지상에 있었던 출구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역시 크렘린…이 아니었다. 갈색, 주황색 따위의 요란한 염색을 한 비둘기들이었다. 웬 비둘기? 가만 보니 덩치가 큰 백인 청년들이 열댓 마리(정말이다)를 온 몸에 두르고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Take Picture’를 연발하고 있었다. 관광명소에 종종 있다던 사기단임이 당연하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얘들아, 나 사진 찍어줘~

들뜬 목소리에 뜨악하며 뒤를 돌아보니, 맨 뒤에서 걷던 친구의 양 팔에 이미 세 마리씩이 앉아 있었다. 웃는 얼굴이 참 예쁜 녀석은 우리 중에서 가장 키가 작았다. 그들은 우리 셋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사진을 찍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다섯 단계가 필요하다던가. 우리가 사기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도 그랬다. 첫 단계는 ‘부정(Denial)’이다. 녀석은 여전히 해맑았다. 어깨에 얹힌 비둘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 친구(이름은 ‘지환’). 그 웃는 얼굴이 현실을 흐렸다. 어, 아닌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

       Great, Money!

그럴 리가 없었다. 속을 잠깐 비집고 들어온 나의 순진함에 실소가 나왔다. 그 다음엔 분노(Anger)를 겪게 된다. 나는 곧장 ‘우리가 언제 찍어달라고 했냐’고 (영어로) 열을 올렸다. 그래도 돌아오는 건 그저 ‘Money’ 뿐이었다. 평균 키 174.5cm의 우리는 그보다 한 뼘 큰 슬라브인 여섯과 대치하게 됐다. 무시하고 갈래도 손목을 잡아끄는 이들을 완력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주먹질이라도 해야 풀릴 것 같았던 화를 억지로 눌러야 했다.

세 번째는 흥정(Bargaining)이다. 지환이는 일단 돈을 주자고 했다. 나중에 사비로 채우겠다며. 그렇게 천 루블(당시 환율로 약 만 육천 원)을 줬다. ‘오케이?’라고 물었더니, 놈들은 그래도 ‘Money’다. 가만히 들어 보니 여섯 마리 값을 다 주라는 얘기였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 깎은 택시비를 너희 양아치들에게 상납할쏘냐.

언제까지 여기 붙잡혀 있어야 하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누가 매뉴얼이라도 팔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신고를 해야지. 나는 나머지 셋을 남겨두고 경찰을 찾았다. 구석에 모여 담배를 피우던 경찰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회화책 하나 없이 한국을 떠나왔다는 게 역시 발목을 잡았다. 손발을 써가며 아무리 지껄여 봐도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네 번째 단계가 왔다. 공포(Depression)였다.

아무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를 앞에 두고 스스로 제 풀에 지칠 쯤, 누군가 나타나 그들에게 뭐라 설명을 했다. 금발에 백팩을 맨 젊은 청년이었다. 이 사람도 한 패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던 찰나, 그가 손가락으로 우리 일행 쪽을 가리켰자. 그러자 경찰이 사기꾼들에게 다가가 또다시 뭐라고 말을 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못 하더니, 놀랍게도 순순히 자리를 비켰다. 알고 보니 그 청년이 우리를 도와준 것이다. 그는 나에게 대신 사과를 했다. 그가 영어로 하는 말을 다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fraud’, ‘shame’은 확실히 들었으니 대충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나는 두 손을 잡고 고마움을 표한 뒤, 끝에는 역시

       스파시바!

를 붙일 따름이었다. 다행히도 그 청년 덕에 마지막 단계 ‘체념’은 마주치지 않아도 됐다. 천 루블, 공금에서 꺼낸 비싼 수업료는 그날 저녁 마신, 레드 라벨 위스키로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 녀석은 아직도 비둘기만 보면 욕지기를 씹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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