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13] 2012년 대선, 혼란과 갈등

통합 논쟁의 여파로 대규모 이탈 사태를 겪은 상태에서 2012년 총선을 치렀다. 축소된 당세를 냉정하게 보여주는 결과가 나왔다. 돌이켜보자면 4년 전에 명망가들의 참여 없이 ‘얼어 죽을 각오’로 분당하자고 결심했을 때 예상되었던 대략 그 정도의 처지에 직면한 것이다. 이제 정말 얼어 죽을 각오로 갈 수밖에 없었다.


녹색 사회주의 연대

전진이 해산하고서 후속 조직을 만들기 위한 사업은 당분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가 중앙당 당직자로 들어가면서 이를 추진할 상근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국 단위의 정치조직을 만드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누군가는 모든 시간과 노력을 전적으로 투입하여 조직해야 할 사업이다. 현업을 가진 자가 남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정치조직을 만드는 일은 뒤로 미루더라도 각종 당 내 현안을 논의하고 공유할 최소한의 네트워크는 당장 필요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녹색 사회주의 연대’(약칭 녹사연)이었다. 핵심 주체는 (구)전진 중앙지도부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중앙에 약간 명으로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광역시도별 지역책임자를 선임하여 중앙과 지역을 느슨하게 연결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완결적 정치조직이 아니라 당 내 현안 대응을 위한 네크워크 수준인 것이다.

녹사연의 당면 목표는 당 밖에 남아있는 ‘노동계 단체’를 진보신당에 결합시켜 외연을 확장하고 재창당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노동계 단체’라 함은 민주노동당 분당 직후에 전진에서 이탈한 중앙파 일부가 만든 단체를 말한다. 양경규 전 공공연맹 위원장을 중심으로 주로 공공부문 활동가들로 구성되었다. 훗날 ‘노동정치연대’라는 이름을 갖게 된 단체인데,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고유명사를 쓰지 않고 ‘노동계 단체’로 표현한다. 그들은 민주노동당을 탈당했으나 진보신당에 참여하지 않고 외곽에서 진보정당 재통합을 독려하는 활동을 했다. 2011년 통합 논쟁 시기에도 진보신당 통합파와 긴밀히 협력하며 통합이 가결되도록 설득하는 작업을 했다. 9.4 당대회에서 통합이 부결된 이후에도 새로운 판을 짜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한다.

2012년 4월 총선 직후에 통합진보당이 부정선거 및 폭력사태 등을 겪으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통합진보당을 중심으로 하는 재통합 논의의 명분이 사라졌다. 따라서 갈 곳 없어 보이는 ‘노동계 단체’를 진보신당에 결합시킨다는 목표는 실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물론 이는 헛된 기대였음이 훗날 입증되었다. 그들은 때를 기다리라며 시간을 끌었다. 총선 이후로 예정했던 진보신당 재창당은 이러한 헛된 기대에 휘말려 마냥 미뤄졌다. 그 때문에 재창당 약속의 한쪽 당사자인 (구)사회당 출신 당원들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갈등은 2012년 대선을 경과하면서 결정적으로 악화했다.


2012년 대선, 혼란과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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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사회연대를 위한 2012년 대선운동’ 제안 기자회견. 그러나 이 제안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진보신당은 2012년 8월 ‘사회연대를 위한 2012년 대선운동’을 제안해 본격적인 대선 대비 체제로 전환했다. 이 제안은 진보신당이 자체적으로 대선후보를 선출하지 않고 ‘사회연대후보’를 공동대선운동기구가 조직하는 민중선거인단 완전경선으로 선출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진보신당은 연립정부 반대와 독자완주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전제에서 진보좌파의 조직적 결집에 동의하는 세력과 대선에 공동대응하자는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구상은 노동조합운동 세력 일각에서 대선후보를 따로 선출하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통합진보당에서 진보정의당이 분리되는 과정 등이 겹치면서 현실적 영향력을 갖고 추진되지 못했다. 따라서 대선 전술에 대한 당 내의 논의는 노동조합운동 세력 일부가 선출하는 무소속 후보를 받아들일 것인지, 진보신당이 독자적으로 후보를 낼 것인지, 사실상 대선을 포기할 것인지 등에 초점이 맞춰졌다. 격론 끝에 당 내의 논의는 노동조합운동 세력 일부가 선출하는 후보를 당의 후보로 받아들이되 무소속이 아닌 ‘가설정당’을 통한 대응을 제안하는 것으로 합의됐으나, 이는 무소속 후보 선출을 추진하는 측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후 진보신당의 지도부는 분열되었다.

이후 김순자 지부장의 출마 기자회견 해프닝과 홍세화 대표의 사퇴가 이어지면서 대선 전술 논의는 혼란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 안효상 대표가 전국위원회에 독자후보 출마 및 좌파당으로의 당명 변경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대선방침안을 제출했으나 이는 부결됐고 안효상 대표는 사퇴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권한대행 체제의 당 지도부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조합운동 세력 일부가 선출한 무소속 김소연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김순자 지부장이 당을 떠나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일부 당원들이 이에 결합하면서 당의 대선 방침은 교란되었고 진보좌파세력의 2012년 대선은 사실상 실패로 막을 내렸다.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5기 이용길 대표단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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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5기 대표단 선거에서 당 대표 후보 경선이 이뤄졌다. 사진 왼쪽부터 금민 이용길 김현우 후보]

대선 실패로 4기 대표단이 물러남에 따라 2013년 1월 동시당직선거에 맞춰 5기 대표단 선거가 실시되었다. 대표 선거는 이용길, 김현우, 금민 후보의 3파전으로 치러졌다. 창당 이래 처음으로 성사된 당 대표 경선에서 이용길 후보가 당선되어 5기 대표로 취임했다.

이용길 대표는 녹사연 소속으로서 진보정치를 ‘재건’하고 ‘재편’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진보정치 재편 약속에 따라 당 내 잔류 통합파도 지지를 결정하고 대표단을 함께 구성했다. 그러나 진보정치 ‘재편’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그 시점에서 가늠할 수 없었으며 각자 다른 모습을 상상했다.

그해 3월 9일 5기 대표단의 첫 전국위원회에서 ‘진보정치 재건을 위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중 핵심은 다음과 같은 4대 원칙이다.

▷자본주의 극복,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 계승하며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이념의 재정립

▷보수야당과 구별 정립되는 진보정당의 독자적 성장 발전노선

▷확고한 대중정당, 현실정당으로서 활동상의 정립

▷패권주의 일소와 민주적 절차 확립

또한 합당 시에 약속한 재창당을 상반기 정기당대회에서 완료하기로 결정했다.

6월로 예정된 정기당대회에서 새로운 당명, 강령, 당헌 등을 제정(재창당이기 때문에 ‘개정’이 아니고 ‘제정’)하여 재창당을 완료하기 위해 당대회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산하에 3개 소위원회(강령소위, 당헌당규소위, 장기성장전략소위)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필자는 당헌당규소위원회 간사를 맡았다. 개정이 아니고 제정이기 때문에 당헌과 당규를 전면 재검토했다. 타 정당의 사례까지 비교 분석하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관심이 집중된 것은 당명 결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상상 이상의 우여곡절과 갈등이 발생한다. ■

14편 예고 : 당명 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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