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형구, 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년 #14] 당명 대란

2013년 재창당을 앞두고 무엇보다도 당명 결정에 관심이 모아졌다. 어디에서든 이름은 중요하기 때문에 가장 큰 관심 사안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 내 다양한 집단과 개인들이 당명을 통해 각자 중요시하는 가치를 담아내고자 경합하게 되었다. 여기에 이러저러한 정치적 고려가 개입되었다. 당명 논의는 어느덧 정파(또는 경향성) 간에 당위성과 힘을 겨루는 과열 경쟁으로 변질했다.


녹사연이 선택한 당명 녹색사회노동당

당명 결정을 앞두고 녹사연 내에서 당명에 관한 방침을 논의했다. 회원투표에 의해 ‘녹색사회노동당’(약칭 노동당)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가치로서 녹색사회주의를 지향하고 노동자를 주체로 한다는 녹사연의 이념을 담아내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동당’이라는 약칭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이는 가치와 주체가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노동운동 중앙파의 결합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선호하는 당명을 택한 것이다. 이후 차선책으로 (정식 명칭)‘노동당’을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명 선정 과정

당명 결정의 첫 과정은 당명 후보 공모였다. 무려 50개의 당명이 응모되었다. 이를 대상으로 일차로 당원 선호조사를 실시하여 상위 5개 당명을 선정했다.

2013년 5월 11일 전국위원회에서 5개 당명을 대상으로 표결을 실시했다. 전국위원 1인2표 투표를 통해 다득표 순서로 3개 당명을 선정했다. 표결 결과 ‘노동당’, ‘녹색사회노동당’, ‘좌파당’이 선정되었다. 녹색사회노동당은 녹사연이 지지했고 좌파당은 주로 (구)사회당 출신 당원들이 지지했다. 이들 3개 당명을 대상으로 당원 전수조사를 실시하여 최종 1개 당명을 당대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6월 8일부터 19일까지 당원 전수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선호도 1위 : 녹색사회노동당(약칭 노동당)

선호도 2위 : 노동당

선호도 3위 : 좌파당

이로써 녹색사회노동당(약칭 노동당)이 당대회 원안으로 제출되었다.

당명 원안이 결정되자 곳곳에서 논란이 일어났다.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약칭이 노동당이 됨으로써 다양한 가치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었고, 특정 정파의 의견대로 결정된 데 대한 반발도 있었다.

당대회를 앞두고 일부 당원들이 ‘무지개사회당’ 수정안 발의를 추진했다. 여기에 동의하고 참여한 당원들의 동기도 복합적이었다. 다양한 가치를 포괄하자는 취지에 동의하는 당원들도 있었고, 당권파에 대한 견제(내지는 반발)도 작용했다. 무지개사회당 지지 흐름은 당명 자체의 문제를 넘어 ‘반대파연합’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당명 대란

6월 23일 정기당대회가 열렸다.

강령 제정의 건을 먼저 다뤘다. 수많은 수정동의안이 제출되었다. 각각의 부문과 전문성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일부 불필요한 의견도 있었으나, 당 강령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자기 당의 강령을 정하는 자리인데 얼마나 할 말이 많겠는가.

장시간의 논의 끝에 일부 가결된 수정동의를 포함하여 강령 제정을 완료했다.

이어서 말 많고 탈 많은 당명 결정의 건이 상정되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당명은 당헌에 포함되지만 중요성을 감안하여 당헌 제정의 건과 분리해서 별도의 안건으로 다룬 것이다. 당헌 사안이기 때문에 재석 2/3 이상 찬성이 필요했다.

수정안으로 발의된 ‘무지개사회당’을 먼저 의결했다. 치열한 찬반토론을 거치고 표결에 들어갔다. 부결되었으나 만만치 않은 찬성을 얻었다. 당명 자체의 호불호 외에도 당명 결정 과정에서의 불만과 더 나가 당권파에 대한 반발 등이 집약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원안인 ‘녹색사회노동당(약칭 노동당)’에 대한 의결에 들어갔다. 수정안이 부결되었으니 비록 불만이 있더라도 원안은 가결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표결 결과는 의외였다. 2표 차이로 부결된 것이다.

당명을 결정하지 못함에 따라 후속 안건인 당헌 개정의 건은 상정하지 못하고 폐회되었다. 당명 부결 사태는 당 내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구)사회당 출신 대의원들이 당명 원안 표결에서 찬성하지 않음으로써 부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구)전진 시절부터 우호적이었던 필자와 사회당 출신 활동가들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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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2013년 6월, 호기롭게 시작한 정기당대회. 그러나 당명 부결 사태로 엄청난 파문이 일어난다]


재창당 완료

무산된 재창당을 다시 시도하기 위해 2013년 7월에 임시당대회를 소집했다.

당명은 원점에서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 대의원 발의 절차에 따라 제출된 복수의 당명을 모두 원안으로 해서 2/3를 득표하는 당명이 나올 때까지 표결하는 방식으로 정했다.

녹사연은 정기당대회에서 ‘녹색사회노동당(약칭 노동당)’이 부결됨에 따라 임시당대회에서는 차선책으로 (정식 명칭)‘노동당’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7월 21일 임시당대회가 열렸다.

대의원 발의로 제출된 9개 당명을 대상으로 의결정족수인 2/3를 득표하는 당명이 나올 때까지 표결을 거듭했다. 무려 39번의 표결을 거친 끝에 ‘노동당’이 2/3를 얻어 새로운 당명으로 가결되었다. 7월 하순의 무더운 여름, 검표위원들은 땀을 비처럼 흘려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당명을 정했기 때문인지, 이어서 상정된 당헌 제정의 건은 표결 없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비로소 할 일을 끝내고 임시당대회를 폐회했다.

2013년 8월 31일, 3기 4차 전국위원회가 열렸다. 당헌 제정의 후속 사업으로 당규 제정의 건이 상정되었다. 방대한 내용이기에 많은 수정동의안이 나왔다. 일부 가결된 수정동의를 포함하여 당규 제정을 완료했다.

반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 당헌과 당규를 전면 재검토하면서 제정안을 마련한 입장에서 기쁘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후 시행 과정에서 많은 허점이 드러났다. 제도라는 것은 완성이 없으며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야 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로써 재창당을 완료하고 ‘노동당’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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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2013년 7월, 임시당대회에서 비로소 새로운 당명을 결정하고 재창당을 마무리했다.]


진보정치 재편 일단락

재창당을 완료했으나 이름이 바뀌었을 뿐 외연은 확장되지 않았다. 결합할 세력이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통합진보당 분열 사태 때문에 갈 곳 없어 보이는 노동단체(중앙파 일부)가 당에 결합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한동안의 헛된 기대였다. 그들은 때를 기다리라며 시간을 보내다가 정의당이 출범하면서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정의당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정의당과 노동당의 통합을 추진하자는 것을 뜻했다.

노동당 재창당이 마무리될 무렵에 그들의 의사는 굳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은 노동당에 참여할 생각이 없으며 정의당과의 통합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었다. 이로써 ‘노동당’이라는 당명을 선택하게 했던 정치적 고려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 당명을 확정하는 시점과 거의 비슷한 시기였으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필자에게 있어서 정의당과의 통합을 추진한다는 것은 2011년의 악몽이 재현됨을 뜻했다. 이용길 대표가 공약한 진보정치 재편에 관한 문제를 확실히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결정하기 위해 녹사연 총회 소집을 요청했다.

재창당을 완료한 직후에 녹사연 총회가 열렸다. 필자는 노동계단체의 참여가 무산되고 노동당이 재창당함으로써 진보정치 재편은 현 시점에서 종료되었음을 확인하자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나의 의견에 동의했으나 일부 반대 의견도 있었다. 진보정치 재편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 즉 정의당과 통합하자는 의견이었다. 이견이 해소되지 않아 결정을 미루기로 했다.

2013년 9월 28일 총회가 다시 열렸다. 이견은 여전했다. 서로를 설득하기는 어려워보였다. 더 이상 논쟁은 무의미했다. 참석한 회원 전원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그 결과 의견 분포가 확인되었다. 굳이 표결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상호 동의했다.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노동당 3기 1차 전국위원회 결정사항인 ‘진보정치 재건을 위한 결의문’이 유효함을 확인한다.

진보정치 재편에 관한 제안이 있을 경우, 당내 논의를 거쳐 결정한다.

얼핏 보면 하나마나한 원론적인 얘기로 보이지만 사실상 정의당과의 통합은 추진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이로써 진보정치 재편 논의는 일단락되었다. 또한 이 결정은 녹사연과 잔류 통합파(이른바 관악파, 하나로)가 함께 구성한 5기 대표단 당권파(이른바 3파연합)의 분열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그로부터 1년 후에 뒤바뀌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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