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년 #15]

–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둔 우여곡절

재창당을 완료한 후에 당면 과제는 2014년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노동당 이름으로 치르는 첫 선거였으며 2012년 총선으로 국고보조금이 끊긴 이후 최초의 전국단위 선거이기도 했다. 축소된 조직과 재정을 갖고 전국단위 선거에서 성과를 내기 위한 전략 수립이 필요했다.


초동논의

지방선거에 대비한 초동논의는 5기 대표단이 출범한 직후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2013년 2월 1일에 이용길 대표가 취임하고 3월 9일 첫 전국위에서 사업계획을 채택했다. 그에 따라 대표단 산하에 지방선거기획단을 설치했다.

기획단 회의에서는 작은 역량으로 성과를 내기 위한 전략을 짜내려고 다들 고심했다. 그러던 중에 파격적인 의견이 나왔다. 고승희 살림실장이 ‘광역의원 다수 출마 전략’을 제시했다. 광역의원(지역구) 후보를 집중 출마시켜 전국 합산 2% 이상 득표를 목표로 하자는 것이다. 동시에 실시하는 4개 지방선거 중에서 광역의원이 가장 경쟁이 덜하다는 조건을 고려했으며, 다수 출마에 의한 2% 이상 득표를 통해 국고보조금 확보라는 재정적 성과를 얻어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찬반 의견이 엇갈렸다. 전례가 없는 전략이기에 판단하기 어려웠다.

살림실장의 의견에 대해 조직실장인 필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뭔가 부족했다. 광역의원 다수 출마에 의해 2% 득표가 가능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가능하다 해도 재정적 성과 이외에 정치적 성과는 없어 보였다. 정치적 성과를 기대하려면 광역단체장 후보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광역의원 다수 출마 전략이 실제 득표로 이어지기 위해서도 광역단체장 선거가 필요했다. 물론 노동당의 역량으로 4년 전처럼 광역단체장 선거에 대거 출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른 지역은 출마하지 못하더라도 전국적 관심이 집중되는 서울시장 후보는 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서울시장 후보를 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찬반이 엇갈렸다. 투입되는 역량에 비해 성과가 없다는 것이 반대 취지였다. 서울시장 선거 자체의 득표만 보자면 가성비가 떨어질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선거는 서울시민 뿐만 아니라 전국적 관심이 집중된다. 당의 존재를 알리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눈에 보이는 숫자만으로 성과를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집중전략 수립은 쉽게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다. 광역의원 다수 출마와 서울시장 출마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선택이 필요했다.

지방선거기획단 회의가 거듭 진행되면서 대체로 광역의원 다수 출마 전략에 의견이 기울었다. 그럼에도 흔쾌하게 합의되지는 않았다. 기획단은 상반기까지 기본계획을 만들어서 전국위에 제출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단일한 집중전략 합의는 쉽지 않았다. 결국 기본계획 단계에서는 두 가지 방향을 모두 제출하고 이후 종합계획 단계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안을 만들었다.


첨예한 이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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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31일, 3기 4차 전국위원회가 열렸다.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당규를 제정하여 재창당을 완료한 날이다. 그에 못잖게 중요한 안건이 지방선거 기본계획 채택이었다. 기본계획안 중에서 집중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당의 정체성을 높이고 지방선거를 통해 당이 ‘유효정당’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집중전략을 추진한다. 단, 광역의원 다수 출마와 특정 광역단체장 출마 두 전술 중 하나를 선택해 정치적 집중전략으로 추진한다. (이하 생략)

몇 개의 수정동의안이 나왔다. 요약하면 원안에 대해 두 가지 흐름의 불만이 있었다. 특정 광역단체장(사실상 서울시장) 선거를 반드시 치려야 한다는 의견과 반드시 치르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두 가지 모두 수정동의안으로 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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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당시 대표단 5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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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노동당 당가를 부르는 가수 정윤경. 3기 4차~6차 전국위원회는 노동당 상징과 당가가 발표된 자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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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오른쪽 구석에 앉아 있는 필자의 모습]


이날 전국위는 경부선 철도 사고 때문에 영남권 전국위원들이 대거 불참하여 의사정족수인 40명을 겨우 채운 상태에서 개회했다. 한명이라도 이석하면 유회되는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표결을 진행했다.

하나를 선택하지 말고 두 전술 모두 추진하자는 (즉 서울시장 선거를 치르자는) 수정안은 재석40명 찬성16명으로 부결되었다.

특정 광역단체장 출마를 삭제하자는 (즉 서울시장 선거를 치르지 말자는) 수정안도 똑같이 재석40명 찬성16명으로 부결되었다.

수정안이 모두 부결되어 원안을 표결했다. 재석40명 찬성21명으로 1표 차이로 가결되었다.

이로써 지방선거 기본계획을 채택했으나 첨예한 이견을 확인하게 되었다. 1표 차이 가결에 대해 ‘가결이 아니라 부결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자조적 농담도 나왔다. 이날 확인된 첨예한 이견은 단지 지방선거 방침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당 운영 방식과 진로에 이르기까지 길고 깊은 의견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날 전국위에서는 지방선거 기본계획을 채택한 후에 지방선거준비위원회를 설치했다. 이봉화 부대표가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대표단 분열과 선거준비 지체

대표단 산하의 기획단을 전국위 산하의 준비위로 대체함에 따라 지방선거 준비 단계가 격상되었다. 준비위는 연말까지 지방선거 종합계획을 전국위에 제출하고 이후 새해 들어서는 본격적인 선대본 체제로 전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방선거 준비는 그해 가을부터 지체되기 시작했다. 전국위에서 집중전략을 채택하며 표출된 이견은 당 내 경향성의 대립으로 드러났다.

대립의 한편으로는 비주류 그룹의 결집이 있었다. 당명 논쟁 과정에서 ‘무지개사회당’을 지지한 흐름의 일부가 세력화해서 ‘신좌파당원회의’(이하 신좌파)라는 정파조직을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근본적인 대립이 발생했다. 녹사연이 진보정치 재편 종료를 결정함으로써 대표단을 함께 구성했던 (구)통합파와의 협력관계가 파기된 것이다.

이로써 대표단은 분열되었다. 대표단 5인 중에서 이용길 대표와 장석준 부대표는 녹사연, 이봉화 부대표는 관악파, 박은지 부대표는 하나로, 정진우 부대표는 신좌파 소속이었다. 크게 나눠도 세 쪽으로 분열된 셈이었다.

당장 지방선거 준비에 차질이 왔다. 이봉화 부대표가 위원장을 맡은 지방선거준비위는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회의 소집조차 이뤄지지 않는 심각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지방선거 종합계획을 채택할 예정이었던 연말 전국위가 임박했지만 진전된 것은 없었다. 큰 틀의 방향조차 합의되지 않았으며 선거방침이 불명확함에 따라 당 내 혼란이 발생했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태였다. 변화가 필요했다. 결국 종합계획 수립을 유예하고 지방선거준비위원장을 교체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당대표가 직접 준비위원장을 맡기로 결정했다.

2013년 12월 14일, 3기 5차 전국위원회가 열렸다. 예정대로라면 지방선거 종합계획을 채택하고 지방선거준비위를 선대본 체제로 전환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준비위 활동이 부진함에 따라 종합계획은 제출되지 못했다. 다만 ‘지방선거 기본계획 후속방침 승인의 건’이라는 오묘한 제목의 안건을 통해 “2014년 1월까지 광역의원 지역구 후보를 적극적으로 집중 발굴한다.”고 결정했으며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전국위원회를 다시 소집하여 종합계획을 채택하기로 했다. 이는 기본계획에 명시된 집중전략 두 가지 중에서 사실상 서울시장 출마를 포기하고 광역의원 다수 출마 방침을 결정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어서 이용길 대표를 지방선거준비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2014년 2월 15일, 3기 6차 전국위원회가 열려 지방선거 종합계획을 채택했다. 종합계획에서는 ‘지역구 광역의원 다수 출마를 통한 지역구 광역의원 합산 득표율 2% 달성’을 집중전략으로 명시했다. 비로소 선거방침을 확정한 것이다. 이후 본격적인 선대본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후보 발굴 협조를 설득하기 위해 호랑이 굴로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지방선거 집중전략을 수립했으나 목표 달성이 문제였다. 합산 2% 득표 달성을 위해서는 지역구 광역의원 최소 70명 출마가 필요하다는 분석에 따라 광역의원 후보 70명 발굴을 우선 목표로 했다. 당의 역량에 비하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당 내 비주류 그룹의 협조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권파와 결별한 통합파는 지방선거에 노골적으로 사보타주 했다. 자신들이 당선을 기대할 수 있는 일부 기초의원 선거구에 집중했으며 그 외에는 협조를 바랄 수 없었다. 또 다른 비주류 그룹인 신좌파의 협조가 관건이 되었다.

신좌파는 애초에 서울시장 출마를 주장했다. 서울시장 출마가 집중전략에서 배제되면서 지방선거방침(광역의원 집중 방침)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설득이 필요했다. 필자는 후보발굴을 책임진 조직실장으로서 직접 공식적으로 설득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신좌파의 방침을 결정하는 공식 회의에 임석하겠다고 요청했다. 특정 정파 모임에 중앙당에서 축사를 하러 방문하는 경우는 있어도, 주요 안건을 논의하는 자리에 임석하는 것은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다. (참석? 참관? 배석? 적합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임석’이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다행히 요청이 수용되었다. 신좌파의 지역책임자들이 참석하는 ‘전원회의’ 자리에서 직접 발언할 기회가 주어졌다. 당의 처지와 방침 수립의 불가피성 등을 설명하고 당을 위해서 대승적으로 협조할 것을 호소했다.

필자의 발언이 끝나고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대체로 협조하자는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갔다. 당권파에 조건을 제시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최종 결론은 아무런 조건 없이 당을 위해 협조하는 것으로 모아졌다. 신좌파의 지역책임자들이 지역구 광역의원 후보 발굴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결정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들도 나도 모두가 당원이고 당을 위한 결정인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고마워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오늘의 결정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로써 후보 발굴에 숨통이 트였다. 또한 2012년 대선과 2013년 당명 부결사태를 겪으며 악화한 (구)사회당 출신 동지들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분기점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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