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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12] 뻬쩨르


우리는 생각보다도 넓은 땅을 휘저었다. 동시베리아의 설원이나 바이칼 반대편 산맥을 지켜볼 때는 잘 몰랐다. 대륙의 규모를 실감케 해 준 것은 공항에 내릴 때마다 휙휙 바뀌는 날씨였다. 블라디보스톡에서는 눈보라를 맞았지만 바이칼에서는 시리도록 푸른 햇빛을 쬈고, 모스크바에서는 재색 하늘에 질렸다. 그리고 한 시간 반 만에 도착한 상트페테르부르크 풀코보 공항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왔다.

간만에 맞은 영상의 온도에 젖다 보면 어김없이 흥정의 시간이 따라붙는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거둔 쾌승, 그리고 이르쿠츠크에서 맞은 뒤통수와 붉은 광장의 참사. 통산 1승 2패. 이번에는 승리를 적립해 마진을 맞추겠노라. 공항 택시 부스엔 요금표가 붙어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시내 구간별로 얼마씩. 가격은 모두 천오백 루블이 넘지 않았다. 아차 싶었다. 모스크바에도 정해진 금액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스포츠도 실점을 늦게 일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선두타자에 홈런을 내주어도 투수는 계속 던질 수 있다. 공이 담장을 넘는 순간 실투를 깨끗이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마운드를 다지고 와인드업을 할 재간이 남는다. 심지어 실점을 미리 대비할 수도 있다. 베이스에 주자가 차면 투수는 견제구를 던지고, 팔을 내려 세트포지션을 잡으면 된다. 그렇다. 흔히 야구를 인생에 비유하지만, 우리의 나날은 사실 많이 다른 것이다. ‘2800’ 또한 바가지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나흘만큼의 유예가 있었다.

단 천삼백 루블에 숙소까지 갈 수 있었다. 희뿌연 하늘은 여기가 아직 러시아라는 걸 굳이 부언했다. 택시에 내리는 빗방울은 유달리 소리가 요란했다. 지붕을 무슨… 양철로 만들었나, 같은 싱거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만한 친구는 있었는데, 룸미러로 보니 자고 있었다. 공항을 오가기를 어느덧 다섯 번째였다. 쨍하는 빗소리가 촘촘히 쏟아지는 가운데, 이따금 헐거워진 틈으로 와이퍼 미끄러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여기서 나흘을 보내면 러시아를 떠나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현지인들은 ‘뻬쩨르’라고 하는 것 같다.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독일식 이름이다. ‘베드로’가 영어로 ‘피터’, 독어로는 ‘페테르’가 된다. 노어로는 다시 ‘표트르’. 이 도시를 명명한 사람이 저 유명한 표트르 대제이니, 자기 이름을 그대로 넣은 것이다. 그게 이백 년을 갔다. 제국이 혼란하던 시절, 역시 혼란한 제국이었던 독일과 전쟁을 했다. 그 때는 이름이 꺼림칙하다며 ‘페트로그라드’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레닌이 죽고 나서는 ‘레닌그라드’가 됐고,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는 다시 원래의 명칭을 쓴다.

하여, 명찰을 숱하게 바꿔 단 기구한 도시, 라고들 한다. 실은 한가한 소리다. 온통 늪이었던 무인지경의 땅, 바닥 모를 구덩이에 흙을 우겨넣어 만든 도시. 말이야 매립이지 살인에 가까웠으리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인명이 죽어나갔다. 지금도 석회질의 지반 어딘가에 스웨덴 패잔병이나 핀란드 포로의 유해가 묻혀있을 것이다. 이름을 골백번 바꿔도 타향인 곳에서 북방전쟁의 희생자들은 말이 없다.

숙소에 닿으니 어느덧 하늘이 새까맸다. 일곱 시. 아침을 거르고 비행기로 고작 한 시간을 왔는데도.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옮아가는 그 하루는 항상 모자라다. 아직 도시는 낯설고 배는 고프니, 과업은 하나다. 저녁 재료 사기. 우리는 어딜 가든 ‘살고자’ 했다. 그래서 호텔보다는 아파트를 빌렸고, 코트보다는 ‘츄리닝’을 입었다. 새로운 곳에 오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식료품점이었다. 한 군데를 ‘뚫으면’ 줄기차게 거기서 장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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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연안의 달력은 해빙을 가리키고 있었다. 칼바람에서 멀어졌지만, 녹다 만 땅바닥이 질척였다. 그러면서도 유럽의 일원임을 생색내듯 겨울비가 그치지 않았다. 우리의 계획에 우산은 없었으므로 대강 모자와 후드티에 의지해야 했다. 숙소에서 한 블록 앞으로, 또 그 다음 블록을 끼고 왼쪽으로 돌면 마트가 있었다. 작은 주차장을 전면에 둔 일층짜리 건물 지하였다.

미국발 셰일가스 선풍으로 러시아 경제는 박살이 났다. 먹거리의 가격이 터무니없이 저렴했기에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돼지고기 목살은 1kg에 우리 돈으로 3~4000원 정도 했다. 여기까지 와서도 굳이 찾은 쌀은 2kg정도 되는 한 팩에 60루블, 천 원이었다. 그만한 쌀이면 넷이 이틀은 먹었다. 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한 끼를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가게 깊숙한 곳에 있던 맥주 코너를 용케 찾아냈다. 카트를 세우고 한 사람당 홀린 듯 두세 병을 집어 들고는 해서, 밥값에 준하는 술값을 매일 지출했다.

매일 돌아가면서 요리를 하고, 밥을 다 먹을 때쯤 설거지 당번을 정했다. 나는 가위바위보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으므로 당번은 주로 나였다. 설거지는 오래 해야 깨끗하다. 싱크대를 정리하고 나니 모두 잠들어 있었다. 피곤했지만 빨래는 하고 자는 것이 여행 내내 버릇이었다. 어느 숙소를 가도 삼성이나 LG 세탁기는 없고, 모두 일렉트로룩스 제품이었다. 검은 옷 따로 양말 따로, 두 번 돌린다. 버튼을 눌러놓고 잠깐 졸다 깨면 빨래가 다 돼 있다. 수온은 ‘60도’에 맞춰놓으면 빨래가 따뜻하다. 적막한 밤에 그만한 온도는 대단히 포근한 것이다.

빨래를 널어놓을 라디에이터의 위치와 내일 쓸 가루비누의 용량 따위를 생각하다가 완전히 잠들어버렸다. 모스크바를 떠나온 첫 날, 다른 생각이 틈입하지 않는 첫째 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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