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년 #16]

다시 돌아온 통합 논쟁

노동당은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분열되어 있었다. 한편으론 당명 결정 과정에서의 갈등에 의해 대립이 발생했다. 다른 한편에선 진보정치 재편 공약에 관한 견해 차이로 전선이 그어졌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선거 방침을 결정했다. 광역의원 다수 출마 방침을 위한 비주류 그룹의 협조도 얻어냈다. 본격적으로 후보 발굴에 박차를 가했다.


70명의 후보

광역의원 다수 출마 방침을 처음 논의하던 중앙집행위원회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 충분한 후보 발굴이 가능할지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자 어느 도당위원장이 이렇게 일갈했다.

‘당이 죽으라면 죽을 사람이 100명도 안 된단 말입니까!’

그 분의 비장한 의지와는 다르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광역의원 다수 출마 방침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70명 이상의 출마자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있었다. 최소한이라는 70명 출마도 축소된 당의 역량에서는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더구나 당론이 분열된 상태에서 전당적 협조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처지에서 ‘신좌파당원회의’의 협조 결정은 큰 힘이 되었다.

출마자 조직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선거 결과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최선을 다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노력한 끝에 결국 출마 목표 70명을 달성했다. 정신없이 후보를 조직하다 보니 어느덧 여성할당 30%와 장애인할당 5%도 채워져 있었다. 할당 달성은 목적의식적 노력 때문이 아니었다. 70명의 후보를 발굴한 후에 확인한 결과일 뿐이다. 순전히 여성 당원들과 장애인 당원들의 헌신 덕분이었다


2014년 지방선거 전략은 적절했는가?

2014년 6월 4일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출마자 목표를 달성했으나 실제 선거에서 득표 목표에는 현저히 미달했다. 70명의 후보 중에서 개인 사정으로 2명이 출마하지 못하여 68명이 후보등록을 했다. 최종 개표 결과 광역의원 지역구 전국 합산 1.02%를 득표했다. 목표인 2%의 절반 수준이었다. 17개 광역시도 중에서 13곳에서 출마한 광역의원 비례대표 정당투표에서는 1.17%를 득표했다. 2년 전 총선에서의 정당득표 1.13%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 같은 결과는 기본적으로 당의 역량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취약한 조직과 재정이 주어진 조건이라면 선거 전략의 적합성에 관한 평가도 필요할 것이다.

70명 가까운 후보가 출마했음에도 목표의 절반 수준을 득표했다면 전략 자체가 오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전국적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이른바 ‘공중전’을 병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광역의원 다수 출마에 집중하느라 광역단체장 선거는 광주와 울산 두 곳만 출마했다. 광역단체장 후보가 출마한 지역은 비교적 득표율이 높았다.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취약한 역량으로 광역단체장에 대거 출마할 수는 없겠으나, 다른 곳은 못하더라도 전국적 관심이 집중되는 서울시장 출마는 필요했다. 물론 엄청난 물량이 소요되는 서울시장 출마와 광역의원 다수 출마를 병행함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었을까?

차라리 서울시장 출마와 17개 모든 시도에 광역의원 비례대표 등록을 병행하는 것이 나았으리라 생각한다. 17개 광역시도에 비례대표 후보를 출마시키는 것은 지역구 다수 출마에 비해서 훨씬 적은 물량이 소요된다. 투자 대비 성과도 나을 수 있다. 13개 시도에 출마해서 얻는 비례대표 득표가 1.17%로서 2012년 총선에서의 득표를 약간 넘어섰다. 17개 모든 시도에 비례대표를 출마시키고 서울시장 선거까지 병행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얘기들은 그저 부질없는 결과론일 뿐이다. 광역의원 다수 출마 방침 최초 제안자인 고승희 실장은 나름대로 면밀한 분석과 고민 끝에 파격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지방선거준비위, 대표단, 전국위원회 등의 결정도 진지한 고민의 결과다. 필자는 애초에 서울시장 출마와 17개 모든 시도에 비례대표 등록을 병행하자는 입장이었지만, 끝까지 확신을 갖고 주장하지는 못했다. 함께 결정했으니 함께 책임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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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지방선거 공동선대위원장단. 좌로부터 이덕우 금민 이용길 이갑용 김영규 김혜경 안효상 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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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노동당 지방선거 출마자들] photo_2017-04-19_10-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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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3년 전 세월호 진상규명과 박근혜 퇴진투쟁에 앞장 선 노동당 후보들]


재보궐선거에서의 정파 할거구도

지방선거가 끝나자 곧바로 재보궐선거 논의가 이어졌다. 6월 4일 지방선거에 이어서 7월 30일에 재보선이 있기 때문에 시일이 촉박했던 것이다. 전국 15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재보선을 치르는 꽤 큰 선거였다. 그중 당이 참여하는 곳은 3개 지역이었다.

서울 동작(을) 선거구에 김종철 전 부대표가 출마했고, 경기 수원(정) 선거구에 정진우 (그 당시 현직) 부대표가 출마했다. 쌍용자동차가 있는 경기 평택(을) 선거구에는 노동당 후보는 없으나 진보단일후보로 출마한 무소속 김득중(금속노조 쌍차지부장)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7.30 재보선에서는 당 내 정파 구도가 그대로 반영되었다. 각각의 정파들은 자파 회원이 출마한 지역을 집중 지원했다. 녹사연은 김종철 후보가 출마한 동작에, 신좌파는 정진우 후보가 출마한 수원에 집중했다. 여기까지는 인지상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무소속 김득중 후보가 출마한 평택은 투쟁사업장 후보에 대한 지지라는 취지가 무색하게도 통합파의 알리바이로 활용되었다. 노동당 후보에 대한 지원을 외면하면서 평택 지원을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예컨대 나경채 관악당협위원장은 노동당 후보가 출마한 인근지역 동작 지원을 외면하고 멀리 평택으로 파견을 자청하기도 했다.

이처럼 3개 지역구에서 각 정파가 할거하여 치르는 선거의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게다가 김종철 후보가 세 번째 출마하는 동작에서는 정의당 노회찬 후보가 지역구를 옮겨 출마하는 일이 벌어졌다. 새누리당 나경원 후보와 정의당 노회찬 후보의 접전으로 압축됨으로써 김종철 후보는 과거보다도 저조한 1.4% 득표에 그치고 만다.


당 진로 논의 재현과 녹사연의 결정

지방선거와 재보선의 잇따른 패배로 노동당은 또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잔류 통합파를 중심으로 당 진로 논의가 재현되었다. 2011년 통합 논쟁의 악몽 때문인지 이름을 바꿔 등장했다. ‘통합’이라는 표현을 대신해서 ‘재편’이라는 외피를 둘렀다. 그래서 ‘재편파’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이번에 등장한 재편파는 기존 통합파만이 아니었다. 불과 1년 전에 진보정치 재편 종료를 결정했던 녹사연 내에서도 노동당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결국 재편 논의는 녹사연 집행위원회 안건으로 올라왔다. 녹사연에는 다음과 같이 6인의 집행위원이 있었다.

구형구 권태훈 김종철 김준수 장석준 최백순 (가나다순)

집행위 논의 결과 필자를 제외한 나머지 5인의 집행위원들이 재편파 입장으로 돌아섰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당 진로에 관한 중대 결정을 집행위에서 전결할 수는 없었다. 최종적으로 총회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8월 29일에 녹사연 총회가 열렸다. 녹사연은 기층회원제 조직이 아니고 주로 중앙활동가와 지역책임자로 구성된 네트워크 조직이기 때문에 회원 숫자는 많지 않았다. 총 회원 42명 중 의결권을 가진 회원은 38명이었다.

당의 진로에 관해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집행위에서의 5대1이라는 압도적 분포와 다르게 총회에서의 의견분포는 팽팽했다. 결국 양쪽 의견이 모두 부결됨으로써 방침을 결정하지 못했다. 총회를 다시 열기로 했다.

9월 13일에 두 번째 총회가 열렸다. 이번에도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장시간 토론한 끝에 이견을 확인하고 결정 방식을 논의했다. 워낙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고 중대한 사안인지라 참석한 회원들만으로 결정하기는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구성원 전원을 대상으로 회원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9월 22일, 23일 양일에 걸쳐 온라인 회원투표가 진행되었다. 진보정치 재편에 적극 나서자는 입장을 원안으로 해서 과반수 투표에 과반수 찬성을 가결정족수로 정했다. 의결권을 가진 38명의 회원 중 34명이 투표해서 찬성 18표가 나왔다. 1표 차이로 과반 찬성을 얻어 가결된 것이다. 이로써 녹사연은 당 진로에 관한 입장을 1년 만에 뒤바꾸고 재편파로 돌아서게 되었다.


녹사연을 떠나다

원안에 반대한 입장에서 1표 차이 가결은 아쉬운 결과였다. 그러나 요행히 부결되었더라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두 번에 걸친 총회에서의 논쟁과 의견분포를 보건대, 어느 쪽으로 결정되더라도 조직이 온전히 보존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누구도 자기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일사불란하게 따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중대한 문제였고 첨예한 대립이었다.

비록 의견이 다르더라도 조직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조직원의 자세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치노선을 함께하는 조직이라는 당연한 전제가 따른다. 그날의 결정은 녹사연의 정치노선 변경을 뜻했다. 정치조직은 정치노선에 합의한 집단을 뜻한다. 정치노선이 다르다면 더 이상 조직을 함께 할 이유가 없다. 이는 조직 결정을 따르는 회원의 의무를 넘어서 회원 정체성의 문제다. 따라서 정치노선 변경을 회원투표라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의결에 의해 불가역하게 확정한 그 시점에서 나는 녹사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취지의 글을 남기고 녹사연을 탈퇴했다. 2014년 9월 24일의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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