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년 #17] 당의미래출범과 재편파집권

2014년 지방선거와 재보선에서의 잇따른 패배로 노동당의 진로에 관한 동요가 재현되었다. (구)통합파가 ‘재편파’라는 외피를 갈아입고 재등장했다. 당 내 주류 그룹인 녹사연도 치열한 내부 논쟁 끝에 재편파에 가담하기로 결정했다. 필자는 사실상 정의당과의 합당을 뜻하는 재편 주장에 동의할 수 없기에 녹사연을 탈퇴했다. 당 내의 달라진 구도 속에서 새로운 선택이 필요했다.


재편파와 신좌파의 양립

녹사연이 재편파에 가담함에 따라 노동당 내에서는 확대된 재편파와 비주류 그룹인 신좌파의 첨예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신좌파가 재편파에 대항하는 유일한 독자파 그룹이 되는 것은 위험한 구도였다. 새로운 독자파 그룹이 필요했다.

재편파와 신좌파의 양자대립 구도가 위험한 것은 무엇보다도 신좌파의 기존 인상 때문이었다.

사회당과 진보신당이 합당하고 3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과거의 당적을 갖고 구분하는 진영논리가 남아있었다. 신좌파는 과거의 당적을 막론하고 구성된 조직이지만 (구)사회당 출신 당원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피상적으로는 사회당 출신이 주도하는 조직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2012년 대선과 2013년 당명 부결 사태로 빚어진 부정적 인상과 연결되었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신좌파가 적극 협조한 일은 널리 알려지지 못하거나 (때로는 의도적으로) 망각되었다. 신좌파는 여전히 비협조적이며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상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기본적으로는 과거(또는 한동안)의 활동방식에서 비롯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적 근거를 갖는다. 이를 바탕으로 일정한 오해와 선입관이 더해지기도 했다. 이렇게 형성된 부정적 인식은 때로는 특정한 정치적 의도에 의해 조장되기도 했다.

더욱 넓은 시야로 보자면 역사성을 갖는다고 볼 수도 있다. 노동당 내에서 (더 크게는 진보정당운동에서) 출몰했던 온갖 정파들은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돋보였다. 당원들은 대체로 정파의 필요성은 원칙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실존하는 정파 일반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정파일수록 부정적으로 인식되거나 심지어 고립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좌파와 별개의 비주류 그룹으로서 새로운 정파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 같은 판단 자체는 지금 생각해도 올바른 것이었다. 또한 재편파와의 투쟁이라는 당면 과제를 완수하는 시점까지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위에서 설명한 정파 일반의 부정적 모습이 극적이며 최악의 형태로 드러났으니 말이다.


당의 미래출범

녹사연이 재편파에 가담함으로써 새로운 독자파 조직을 형성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은 협소해졌다. 지역책임자 수준의 중견 활동가 중에서는 함께 할 대상이 많지 않았다. 기존에 정파 활동을 하지 않았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초동주체를 조직할 수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의기투합한 상대는 당시 정책위의장 겸 대변인을 맡고 있던 윤현식 당원이었다. 녹사연에서 재편파에 반대해 함께 탈퇴한 회원들도 일부 참여했다. 이를 중심으로 주로 전업활동가가 아닌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당의 미래’(이하 당미)라는 조직이 탄생했다.

당미의 인적 구성은 장점과 단점의 가능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었다. 기존 정파 활동가가 아닌 참신한 인사들이 모여 새로운 조직 문화를 창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에 아마추어리즘이 횡행할 위험성도 있었다. 후자의 문제점과 더불어 생각지 못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조직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였다.

필자는 오랜 세월 정파 활동을 경험하면서 체득한 것이 있다. 조직의 위상과 역할은 자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조직은 자기 실력에 따라 위상과 역할이 다를 수 있다.

내가 속했던 조직 중에서는 정치조직을 자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예컨대 녹사연은 정치조직이 아니라 당 내 현안에 대응하는 활동가 네트워크 수준이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자리매김했으며 정치조직으로의 발전은 훗날의 과제로 삼았다. 당미는 녹사연보다 더욱 초보적인 조직이었다. ‘당에 의견을 제시하고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는 참신한 당원모임’ 과 같은 위상과 역할이 어울렸다. 그럼에도 회원들은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다. 정파 활동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낯선 것에 대해 경계하기도 하고 때로는 환상을 갖기도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의사결정 과정이 어수선하다는 점이었다. 의결단위와 집행단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초기의 논의 구조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모든 회의에 회원 모두가 참석 대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매번 참석자가 달랐다. 새로 참석한 회원들은 지난번 회의의 결과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매번 회의 때마다 논의는 원점부터 다시 시작되곤 했다. 이러한 구조는 느슨하고 자유분방한 모임에는 어울린다. 다양한 회원들의 의견을 거르지 않고 수렴하며 참신한 아이디어를 모으는 데는 적합하다. 즉 내가 상상한 당미의 위상과 역할에는 맞을 것이다. 그러나 회원들이 과도하게 부여한 위상과 역할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신중하고 무거운 결정이 필요한 국면이라면 치명적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이 곧 드러나게 되었다.


대표단 선거에 참여

2015년 1월 말로 예정된 5기 대표단 임기 만료를 앞두고 2014년 연말부터 대표단 선거가 시작되었다. 당 진로 논의가 대표단 선거의 최대 쟁점이 되었다. 대체로 재편파와 신좌파의 양자대결 구도가 예상되었다.

당미에서는 선거 방침 논의가 지지부진했다. 의사결정 방식이 산만한 탓도 있지만 당미의 역량으로 당 대표 후보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필자의 생각도 비슷했다. 승산 없는 대표 후보를 내기보다는 부대표 후보를 명부별로 각 1인씩 내서 대표단에 진출하는 것이 현실적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당 내 경선은 민중후보운동과 다르기 때문이다.

논의의 쟁점은 대표 선거에서 어느 편을 지지할 것인가에 모아졌다. 필자는 재편파가 당권을 잡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신좌파 후보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재편파에 반대하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회원 다수는 신좌파 후보를 지지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대체로 위에서 설명한 신좌파의 기존 인상이 증폭되어 작용한 것이다.

재편파에 반대하면서 신좌파 후보를 지지할 수도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후보등록 임박한 시점에 열린 회의에서 이러한 자가당착을 해결할 묘안이 튀어나왔다. 우리도 대표 후보를 내자는 것이었다.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검토한 적이 없는 의견을 어느 날 갑자기 회원 하나가 불쑥 내뱉은 것이다. 그 순간에 박수가 터져 나왔고 별다른 논란 없이 즉석에서 그렇게 결정되었다. 조직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와 어수선한 의사결정 방식이 결합한 결과였다.

누구를 후보로 낼 것인가의 문제도 어렵지 않게 결정되었다. 대표 후보 윤현식, 부대표 후보 김한울, 동시에 실시하는 서울시당위원장 후보 김상철 등을 선출하여 진용을 갖췄다. 부대표 여성명부 후보는 끝내 정하지 못했다.

이처럼 졸속으로 결정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당 내 정파 조직이 당권에 도전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닐뿐더러, 정치노선의 차이가 아닌 한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조직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회원의 의무인 것이다.

이렇게 당 대표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필자는 결정에 승복하고 당미가 선거에서 승리하도록 성실하게 회원의 소임을 다했다.


재편파 집권

각 정파의 후보들이 정해졌다. 대표 후보로 재편파는 나경채 관악당협위원장을, 신좌파는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을, 당미는 윤현식 정책위의장을 내세워 3파전이 되었다. 대체로 당 활동 경험이 짧은 당미 회원들은 미숙하지만 열심히 선거 운동을 했다. 결속력을 다지고 정치활동을 훈련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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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6기 대표 후보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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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대표 후보 토론회를 관전하는 필자 (사진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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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6기 대표 후보들의 비장한 모습]

최선을 다해 선거운동에 임했지만 결과는 역시 냉정했다. 대표 선거 1차 투표 결과는 1위 나경채, 2위 나도원, 3위 윤현식 순서였다. 윤현식 후보가 아쉽게 탈락하고 결선투표는 두 나 씨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2인을 선출하는 부대표 일반명부 선거에서는 김한울 후보가 3위를 차지하여 낙선했다. 서울시당위원장 선거에서는 김상철 후보가 현역 위원장인 재편파의 김일웅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당의 미래의 유일한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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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1차 투표 결과] photo_2017-04-27_09-24-12
[사진 – 결선투표에 진출한 두 나 씨]

일주일 후에 대표 선거 결선투표가 있었다. 당미는 공식적인 방침을 정하지 않았다. 필자는 재편파 당선을 막기 위해서 나도원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윤현식 후보를 비롯한 다수의 회원들은 결선투표를 방치하는 분위기였다.

결선투표에서 나경채 후보가 승리하여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재편파가 당권을 장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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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결선투표 결과]

결선투표가 끝나고 결과가 나오던 날 저녁, 당의 미래 회원들은 임대차 분쟁 사업장인 ‘라떼킹’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율동을 하며 즐기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SNS 상에 퍼졌다. 비록 연대투쟁이라는 명분이 있는 일이었지만,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그 시각에 축제를 즐기는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다분히 진실을 반영하는 영상이었다.

재편파가 집권함으로써 이후 또다시 반년 가까운 세월을 허비하게 되었다. 나는 4년 전과 마찬가지로 보람 없는 투쟁에 내몰리게 되었다. ■


 

<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년>은 회고록 성격의 칼럼으로  <이-음>은 필자의 글을 존중하며, 독자의 반론을 위한 공간 역시 열어두겠습니다.

편집자(laborgg@2-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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