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달리 평소보다는 조금 일찍 집으로 돌아왔던 날, 이 시간쯤이면 이웃에게 민폐는 아닐 것이라 위로하며 세탁기를 돌렸다. 세탁기가 탈수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혹시나 누군가 우리집 문을 두드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탈탈탈탈-’ 소리가 집 안을 뒤덮었다. 맘을 졸이는 동안 겨우 빨래는 끝났고, 빨래를 널면서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하아. 이 세탁기를 어째야 하나.’


낡은 세탁기와의 동거

세탁기가 필요해진 건 2010년이었다. 2006년과 2007년에는 대학 기숙사에서 지냈고, 코인 세탁기가 있었다. 2008년에는 동생과 풀옵션(!) 원룸에서 함께 지냈고, 풀옵션에는 당연 세탁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2009년 한 해는 휴학하고서 부모님이 계신 집에서 지냈기 때문에 세탁기가 필요해진 건 2010년, 장마철 비가 올 때면 천장에서 비가 그대로 떨어지고야 마는 낡은 집에 살아야 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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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redmarker7/220819046643]

2009년 겨울이 되어갈 때 쯤, 부모님이 계신 집이 이사를 하게 되었고, 이사를 하면서 10년을 넘게 썼던 세탁기를 새로 구입했다. 그리고 그 낡은 세탁기는 자연스레 2010년에 새로 얻은 나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는 꿈꿀 수 없는, 하지만 깊숙한 골목으로 들어가기에는 두려웠던 나는, 길가에 있는 오래된 주택을 새 둥지로 선택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 짐을 모두 들고 이사하던 날, 이사를 도와주시던 분과 아빠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낡은 세탁기를 집안으로 들였다. 세탁기는 2012년 고양시로 이사를 할 때도 나와 함께 이동했고, 4년 만에 월세에 밀려 또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할 때에도 나와 함께 했다. 20년 가까이 쉴 새 없이 제 몸을 굴려야 했던 세탁기는 어느덧 낡은 세탁기가 되었다.

빨래를 널면서 낡은 세탁기 말고는 괜찮은지 생각했다. 냉장고도 문제였다. 갈수록 냉장고가 내는 소리가 커지고 있다. 냉장고도 세탁기와 같은 운명을 걸어왔다. 2010년에 다시 서울로 오면서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중고 냉장고. 2012년과 2016년에도 자연스레 나와 함께 이사 온 냉장고였다. 도대체 내 집에는 나와 함께 새로운 운명을 시작한 가전제품이 있기는 한 건가. 왜 단 하나도 지금, 내 집에서, 새롭게 시작해봐야겠단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잠시일 뿐일 것이란 착각

물론 대학교 4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던 나에게, 그리고 집에서 밥 해먹는 일이 손에 꼽히는 나에게 새 세탁기와 냉장고는 안중에도 없었고, 부모님 역시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빨래를 널다 보니 더 근본적인 질문을 계속 하게 됐다. ‘자취’라는 것을 결혼하기 전에 ‘잠깐’하는 것이라 전제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되짚어 생각해보니 좋은 가전제품은 결혼하고 장만하는 것이라던 부모님의 말씀도 생각이 났다. ‘자취’라는 말 뒤에 학생을 의미하는 ‘생’자가 자연스레 붙는 것처럼, 자취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학생이나 청년일 것이라는 것, 그리고 누구나 가족을 이루고 살아야하듯이 ‘자취’는 잠깐 뿐일 것이라는 생각, 이러한 생각들이 사람들에게 만연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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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늘어가는 1인 가구, 출처 : http://blog.naver.com/ljb1202/220953033761]


2015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1인가구는 전체가구의 25%를 넘어섰다. 그 중엔 청년들만 있는 것도 아니며, 1인 가구를 쭉 선택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1인가구를 이루기까지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1인 가구의 수가 점점 늘어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점점 늘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한 때(사실 여전히 요구하기도 하지만) ‘알바생’이 아니라 ‘알바노동자’라고 부르라는 요구를 했었다. 용돈을 벌기 위한 잠깐의 노동으로서의 알바를 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 알바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나중에 좋은 일자리를 위해 스쳐지나가는 것이니 나의 권리를 참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고. 지금 주어진 현실 속에서 지금의 나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기 위해서라도 꼭 ‘알바노동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이미 알바는 청년들만의 일자리도 아니었고, 잠깐 스치듯이 하는 노동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1인 가구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렇게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사회에서 어쩌면 1인 가구는 뻔한 답안지 중 하나일 뿐이다. 가족을 구성한다는 선택은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1인 가구’보다 더 선택하기 힘든 답안지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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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는 상대적으로 더 가난하다. 출처: http://blog.naver.com/ljb1202/220953033761]


지금 이 순간, 1인 가구를 위하여

1인 가구로 살고 있는 내게 ‘집’은 언제나 가장 큰 고민이다. 자기 집에 살고 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1인 가구는 주거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소득과 재산이 적은 사람들에게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주거를 지원하는 정책이 아예 없진 않지만, 특히나 1인 가구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얼마나 소득이 적은지를 증명한다하더라도 늘 정책대상의 후순위로 밀리고야 만다. 우리 사회는 ‘가족’ 중심으로 모든 복지제도가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년을 지원한다던 행복주택도 남의 얘기다. 나는 대학생도, 사회초년생도, 그리고 신혼부부도 아니기 때문이다. 1인가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깊숙이 들여다본다면, 몇 년 동안 끊임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주택시장에서 요구하는 보증금을 마련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 현실 속에서 1인가구를 위한 정치가 절실하다. 주거정책을 비롯하여 ‘가족’이 기준이 아닌 ‘개인’을 기준으로 하는 제도를 이끌어낼 정치 말이다. 이미 시장은 1-2인 가구를 맞춰 움직이고 있는데 유독 이 제도는 변화가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나중을 위해 현실을 참고 견뎌내며 지내길 요구받는다. 지금의 어려움을 견디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희망고문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선 현실을 올곧게 인식하고 바꿔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1인 가구가 어떤 단계에 이르기 전에 ‘잠깐’ 머무르는 상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이 순간 이어지고 있는 한 사람의 삶이라는 인식이 생겨날 때 1인 가구에 대한 정책적 지원도 시작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1인 가구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 사회는 요구하지 않는다면, 없는 존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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