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18]

두 번째 결전

2015년 1월 노동당 6기 대표단 선거에서 재편파가 승리하여 당권을 장악했다. 당은 또다시 진로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로부터 5개월간 첨예한 대결이 펼쳐진다.


당을 지키는 이유

그 시점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나의 판단에 대해 근원적으로 고민했다. 그간 당연하게 여기던 문제, 갈라지고 왜소해진 노동당을 지키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을 정리해봤다.

대략 1950년 전쟁을 계기로 한국의 좌파역량이 말살되었다. 음지에서 명맥을 이어가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의미 있는 부활은 30여년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1980년대 들어서 비로소 좌파운동이 부활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

이제 또다시 소멸할 위기에 직면했다. 이번에는 전쟁과 학살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지배에 의해서다. 궁극적으로는 역사를 낙관한다. 언젠가는 또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 ‘언젠가는’이라는 시점은 더 이상 나의 몫이 아니고 후세의 몫이 될 것이다.

당을 물신화하지는 않는다. 운동을 위해 당이 있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다른 어느 곳에 대안이 있다면 굳이 이 당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어디에도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숨 쉬고 움직이고 있는 지금, 좌파의 최후 보루를 지키고 이어가는 것이 훗날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마지막 역할이라고 믿는다.

다시 생각해도 변함없이 명확했다. 4년 전의 싸움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한시라도 빨리 끝내야 한다.


중앙당을 떠나다

2015년 2월 1일, 6기 대표단의 공식 임기가 시작되었다. 그날은 일요일인지라 다음날인 2월 2일에 첫 대표단회의가 열렸다. 나경채 대표는 중앙당 인사에 관해 가급적 현재의 구성원을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당사자가 원한다면 당직자 전원을 유임하겠다는 뜻이었다. 의외였다. 중앙당 당직자 중에서 국장과 부장은 고용이 보장된다. 그러나 실장급 이상은 정무직으로서 대표의 권한으로 임면한다. 대표가 바뀌면 정무직은 신임 대표의 필요에 따라 교체한다. 더구나 재편파가 집권했기에 전면적인 교체가 예상되던 터였다. 당직자 전원 유임 의사를 표한 나경채 대표의 발언은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거취를 확정한 상태였다. 다른 자리라면 몰라도 조직실장 자리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나경채 집행부의 핵심 공약인 재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직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재편을 위한 당 내 의사결정 관철에 복무하거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사보타지 하는 수밖에 없다. 둘 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자는 나의 정치노선을 스스로 배반하고 부역하는 길이며, 후자는 당직자의 임무와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다.

나경채 대표는 이후 수일에 걸쳐 당직자들과 차례로 면담했다. 나의 차례가 왔다. 대표단회의에서 언급한대로 유임을 권했다. 고마운 말씀이지만 수락할 수 없었다. 대표님의 공약 실천에 복무할 수 없을 것이기에 현직에 남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생각을 바꿀 수는 없겠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지금 이 자리는 대표님과 당직자의 면담 자리이지, 당의 진로를 논쟁할 자리는 아닌 것 같다며 대화를 마쳤다.

중앙당에서 함께 일하던 당직자들 중에서는 재편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떠나는 마당에 염치없는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가급적 남으라고 권유했다. 나는 업무의 성격상 부역하거나 태업할 수밖에 없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부서들도 있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꾹 참고 자리를 지키라고 당부했다.

들어올 때는 인수인계를 받은 바 없다. 자기 생각과 다른 결정에 불복하고 무책임하게 당을 떠난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과 같을 수는 없었다. 후임자가 어떤 정견을 가졌든 누구의 편이든 상관없다. 당의 업무를 넘겨주는 소중한 일 아닌가. 인수인계를 철저히 했다. 부족한 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2015년 2월말에 공식 재직기간이 끝나고 중앙당을 떠났다. 남영동 전진 사무실을 떠나 중앙당으로 들어가고 3년 2개월 남짓한 세월이 흐른 것이다.


재편 논쟁

중앙당을 떠나고 3월로 접어들었다. 이제부터 나의 목표는 지금의 상황을 조속히 끝내는 것이었다. 전략이 필요했다. 승부는 의결기구에서 가려질 것이기에 먼저 세력구도를 살폈다. 그해 1월에 있었던 당직선거 결과 의결기구에서 ‘신좌파당원회의’(이하 신좌파)가 다수 의석을 얻었다. ‘당의미래’(이하 당미)는 소수파였다. 그러나 역할은 달랐다. 재편 논쟁 국면에서 재편파와 신좌파가 정면 대결하는 양상은 유리할 수 없었다. 당미가 전면에서 싸우고 신좌파는 다수 의석을 통해 의결에 도움을 주는 방식이 바람직했다. 그 방향으로 전략을 세우고 그에 따른 회의전술을 구사했다.

그 시기에 당미의 조직체계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회칙을 제정하고 조직의 대표 격인 운영위원장으로 윤현식 당원을 선출했다. 그러나 집행단위에 포진한 회원들은 여전히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의지의 문제였다. 당미 회원들도 재편에 반대하는 입장은 뚜렷했다. 다만 상황을 조속히 끝내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투쟁 의지가 부족했다.

그해 6월의 정기당대회 전까지 3차에 걸친 전국위가 있었다. 그때마다 필자는 재편 추진 경로를 저지하거나 타격할 안건들을 구상했다. 당미가 안건을 발의하면 신좌파의 도움으로 가결한다는 전략에 따라 차근차근 일을 진행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당미 지도부가 능동적으로 제안한 안건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필자가 먼저 작성해서 제안하고 당미 지도부가 소극적으로 수용하는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4기 1차 전국위원회
[사진 – 노동당 4기 전국위원회 1~3차 회의는 첨예한 논쟁의 장이었다]

필자의 강경한 방식에 대해 일부 회원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분위기도 감지되었다. 몇 안 되는 당미 소속 전국위원들 중에서는 전국위 표결에서 조직의 방침과 다르게 투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대전의 모 회원은 단 한 번도 조직 방침을 따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 책임을 묻는 경우는 없었다. 필자도 불만이 쌓여갔지만 이러저러한 잡음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기만적인 당원총투표

6월 정기당대회를 앞두고 마침내 결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쟁점은 당원총투표였다.

6월 4일에 정의당, 노동당, 국민모임, 노동정치연대 4자 대표가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공동 선언]이라는 것에 합의했다. 실질적 내용은 없는 하나마나한 원론적 선언에 불과했다. 거간꾼 비슷한 두 단체를 끼워 넣고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표방했지만, 사실상 핵심은 정의당과 노동당의 합당을 뜻했다. 재편파는 이 공동선언을 당원총투표에 붙이자며 당원총투표 부의의 건을 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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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이른바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공동 선언” 4자 대표들. 왼쪽부터 국민모임 김세균 대표, 노동당 나경채 대표, 정의당 천호선 대표, 노동정치연대 양경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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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정기당대회를 앞두고 각 그룹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벌인 끝장토론. 좌로부터 윤현식(당의 미래), 채훈병(무지개사회주의자연대), 김종철(범 재편파), 나도원(신좌파당원회의)]

당 진로에 관한 최종 결정권은 당대회에 있다. 당원총투표는 최종 결정 절차는 아니다. 공동선언을 당원총투표로 승인하고, 그 후에 구체적인 합당 협상을 진행하며, 최종 협상 결과를 갖고 당대회가 최종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명백한 꼼수였다. 당원총투표 결과는 가장 높은 정치적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당원총투표로 결정한 것을 당대회가 부결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원론적 선언을 당원총투표에 붙인다면 가결될 것이다. 이후 협상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당대회를 이를 부결할 수 없게 된다.

즉 당원총투표는 최종 결정도 아니면서 이후의 모든 절차를 규정하고 압박하는 수단이 된다. 당원에게 최종 결정권을 주지도 않으면서 당원 총의를 빙자하여 이후의 결정 과정을 압박하려는 기만적 수단인 것이다. 당헌 당규 절차를 무력화하고 민주주의 일반 원리와 정치적 상식을 뒤집어엎는 처사다.

이처럼 기만적인 당원총투표는 반드시 부결시켜야 했다.


두 번째 결전

당대회 임박한 시점에 재편파가 타협책을 제시했다. 4년 전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당원총투표 안건의 결정을 두 달 미뤄 8월 말쯤에 결정하자는 제안이었다. 가결에 자신 없는 재편파가 결전을 미루자는 것이었다. 6월 말에 있을 결정을 8월 말로 미룬다는 점에서 시기도 4년 전과 신통하게 비슷했다. 똑같은 결과를 놓고 두 달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뼈저린 교훈을 기억했다. 이번에는 결코 미루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당미 내부 논의에서 단호히 거절 의사를 밝혔으며 결국 그렇게 결정했다.

2015 정기당대회
[사진 – 2015년 노동당 정기당대회]

2015년 6월 28일, 또 하나의 역사를 가르는 정기당대회가 열렸다.

지하철역에서 하차하여 당대회장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갈아타려다 전남의 박혜선 대의원을 우연히 만났다. 멀리 여수에서 오신 분이라 서울에서 쓰는 교통카드가 없었다. 나의 카드로 2인분을 결제하고 함께 승차했다. 선행을 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여러 안건을 처리하고 마지막으로 당원총투표 부의의 건이 상정되었다. 찬반토론은 보통 각3인씩 하는 것이 관례다. 이덕우 의장께서 안건의 중대함을 고려하여 각5인씩 발언권을 줬다. 각자의 의견을 충분히 주장할 수 있었다.

치열한 찬반토론을 마치고 표결에 들어갔다.

재석 284명, 가결정족수 143명, 찬성 118명

압도적인 부결이었다.

이로써 나의 당은 또다시 독자 존립을 선택했다. 재편파가 당권을 장악한지 5개월만의 일이었다.

2015_정기당대회_당원총투표_부의의_건_표결_결과
[사진 – 당원총투표 부의의 건은 압도적으로 부결되었다] 

2015 정기당대회 폐회 후
[사진 – 2015년 정기당대회 폐회 후의 한 장면]

부결 이후의 사태는 4년 전과 비슷했다. 나경채 대표를 비롯한 재편파 활동가들이 대거 탈당했다. 또다시 분열을 겪은 것이다. 이번에도 적진에서 철수하듯이 곳곳에서 초토화 작전이 벌어졌다. 당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당직자가 당원명부를 이용하여 당의 전화로 탈당을 조직하는 일들이 난무했다. 심지어 집단으로 보낸 탈당계 중에서 본인 동의도 받지 않은 경우가 적발되기도 했다. 진보정당 활동가로서의 사명은 따질 필요도 없고 사회 일반적 규범과 인간으로서의 양심마저 팽개친 범죄행위였다.

나는 또다시 상처뿐인 승리를 얻은 것이다. ■


<나의 현대사> 시즌1은 다음 편을 마지막으로 연재가 잠시 중단됨을 알려드립니다. 다음 주는 필자의 에필로그로 찾아뵙겠습니다.

<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년>은회고록 성격의칼럼으로  <이-음>은 필자의 글을 존중하며, 독자의 반론을 위한 공간 역시열어두고 있습니다.

편집자(laborgg@2-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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