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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13] 슬픈 독백이 없는 곳


얼마 전 안과에서 ‘안검하수’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드 렌즈 착용이 힘들 수도 있다고 했다. 아니 그 정도인가, 하다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려 보니 납득이 됐다. 나는 두툼한 두덩에 눈이 처진 꼴이 아버지를 꼭 닮았다. 물려받지 않았으면 좋았을 법도 하다. 이마 근육을 움직여야 눈을 치켜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수백 년째 남해도(南海島)를 고향으로 삼은 집안에서도 피할 수가 없는 북방계의 외양인 것이다.

처진 눈의 부자는 언젠가 함께 ‘영화 구경’을 했었다. 영화 구경, 야구 구경 어쩌구 하는 건 60년대 이전에 태어난 어르신들이 으레 하는 표현이다. 그들의 젊은 날에는 특별한 일이었으리라. 21세기의 우리에게도 그랬다. 같이 영화를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국제시장’을 봤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되었던 백화점을 지나 극장에 갔는데, 아버지가 새 건물의 천장을 휙휙 둘러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집을 이렇게 지어놨냐…”

아버지는 마감 없이 전선을 노출한 천장을 마뜩잖아 했다. 요즘 유행하는 인테리어는 숱한 대단지 아파트를 지어낸 전직 현장소장에게는 그저 기가 차는 것이었다. 우리가 눈매만큼이나 닮은 팔자걸음으로 걸을 때면 그런 소리를 종종 듣곤 한다. ‘무슨’에서 시작해 ‘~냐’로 끝나는 특유의, 사실 이마저도 내가 오롯이 물려받은, 시니컬한 말씨. 보통 혼잣말이다.

가까이에 이런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시라. 해방 열흘 뒤에 태어났을 것. 열네 살부터 서울에서 살았을 것. (자의보단 타의로) 서울을 떠난 지 십 년이 넘는다면 더 정확하다. 그와 다닐 일이 있다면 귀한 이야기를 구할 수 있다. 종각역의 계단을 내려갈 때면, 시청 토목과 공무원이었던 그는 지하철 1호선 개통식 날의 일화를 늘어놓을 것이다. 영부인이 피격당한 날이 아니냐며 추임새도 넣으시라. 그래 얼마나 을씨년스러웠는지 아냐, 할 것이다. 명동성당이 보이면 저 붉은 외벽의 보수를 맡았을 때를 회상하기도 하고, 외국인으로 꽉 찬 거리에서는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한참 오긴 왔는가베, 하고 뿌듯해할 것이다.

그런 그가 청자(聽者) 모를 독백을 읊조리는 일이 있다. 뭐가 이리 다 바뀌었냐, 저거는 완전 파이로 지어 놓은 기야, 아니 이게 언제 없어졌지, 여기는 길이 이리 복잡해졌냐… 유독 높은 건물이나 새로 만든 도로 앞에서 그런다. 아버지의 시절은, 지났다면 지난 것이지만, 사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는 너무 많은 것에 어리둥절해한다. 여기 뭐가 있었어요? 라고 물었을 때 그가 부답(不答)하며 짓는 표정을 글로 담기가 어렵다. 걸음을 옮기면 다시 낮은 탄식을 한다. 상경 이후 58년 동안 서울말에 희석해버린 사투리가 혼잣말을 할 때 짙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근 오십 년을 산 도시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일을 겪는 것이 말이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1960년쯤 되었을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오는 길에나 그랬어야 한다. 전차를 타고 또 버스를 갈아타고 판자촌에 있던 집으로 돌아오면서나 그랬어야 한다. 청춘을 바친 도시에서 낯설음에 한탄을 뱉는 이들을 마주치는 것은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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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대도시권을 품은 모스크바에 비하면 뻬쩨르는 소담스럽다. 물론 겨우 삼박을 한 여행자가 몰라서 하는 소리겠지만, 인상이 그렇다. 관광지가 몰려 있기도 하고, 도시 곳곳에 스며든 네바 강의 지류는 작은 운하를 만들고 있었다. 또 뻬쩨르에는 높은 건물이, 그러니까 아무리 뒷걸음을 쳐도 머리를 한참 치켜야 눈에 담을 수 있는 얄궂은 빌딩이 없었다. 높아봤자 오층 정도 되는 야트막한 건물들이 명백한 주류였다. 그런 건물들의 반절은 소련 시절 지은 공동 아파트들이고 나머지 반절은 18~19세기의 고풍이 그대로 보존된 것이다.

어디를 걸어도 트롤리 버스의 전선만 뺀다면 하늘이 트여 있었다. 물론 여전히 흐린 하늘이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숨통을 열만 한 곳이었다. 프로파간다에 쓰이는 화려한 건물이 주로 모스크바에 지어진 덕분이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곳곳의 명소는 찾아가기가 어렵지 않았다. 낮은 건물들 덕에 멀리서도 성당의 첨탑이 잘 보이고, 아니면 아예 도로가 그 곳을 향해 나 있다. 그래도 지하철을 적극 이용하기로 했다. 질척였던 길 사정 때문이었다. 지하철엔 모스크바와 달리 스크린도어가 있었다. 정말이지 검고 육중한 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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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모스크바 지하철은 티켓을 넣어야 탈 수 있다. 왼 편의 티켓은 관광객용 정기권. 오른 쪽의 토큰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의 토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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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뻬쩨르 지하철의 플랫폼. 붉은 기둥 사이가 다 스크린도어다]

한국으로 치면 종로쯤 되는 ‘넵스키 대로’가 도시의 축이었고, 을지로쯤 되는 곳에 숙소가 있었다. 도심이었다. 그러니 한 블록 정도만 걸어도 웬만한 것이 다 있었다. 스타벅스, 맥도날드부터 펍이나 은행이 가까웠다. 이런 환경에서 떠나온 지 열흘을 넘기고 있었다. 이 때부터 네 명의 여행 스타일이 확연히 갈리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 모두 느물느물 노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 중에서도 두 명이 특히 더 그랬다. 그 둘은 동네를 거닐고, 나와 또 한 명은 도시 이곳저곳을 다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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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예르미타주 박물관 앞 광장. 정말 미끄럽다]


그렇게 처음 간 곳은 예르미타주(Hermitage, Эрмита́ж) 박물관, 이른바 겨울 궁전이요 차르의 정궁이었던 곳이다. 저 유명한 ‘피의 일요일’, 기아에 지친 노동자들이 성당 대신 찾은 곳이기도 하다. 1905년 1월 22일이 그 날이니, 우리가 있던 날짜와 비슷하다. 영하 삼도에서 영상 삼도쯤을 오가던 날씨도 크게 달랐을 것 같지 않다. 제국의 다른 도시보다는 푸근했겠지만, 굶주림을 서럽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기온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박물관에 들어가진 않았다. 어차피 뭐가 뭔지 잘 모른다. 그 앞의 광장은 대단히 넓었지만 날씨 탓에 빙판이 되어 미끄러웠다. 그 바닥을 딛고 사진을 찍었다. 여기 어디쯤에서 황제의 군대가 일제사격을 했고, 일천이 넘는 인민이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기병대가 돌진해 칼을 휘둘렀다. ‘현장(現場)’이란 이런 곳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노동자가 세상을 뒤집은 후, 누군가는 겨울 궁전을 다시 찾아 감격했으리라. 혁명이 처음의 결기를 모두 잃었을 때도 백발의 누군가 돌아와 참담한 탄식을 흘렸을 것이다. 좋은 기억으로든 아니든, 누구나 옛날을 떠올리고 무엇이든 반추할 권리가 있다. 그 기억을 댕길 현장은 온전해야 한다. 예르미타주 다음으로 보았던 카잔 성당도 성 이삭 성당도 피의 성당도 또 그 곳으로 가는 길도 모두 수백 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기억을 홀대하는 곳은 좋은 삶터가 아니다. 반대로 쉽게 변하지 않는 곳에서 사람은 소외되지 않는다. 우리처럼 사진을 찍고 광장 구석에서 머핀을 사먹는 객(客)들에게도, 부러운 일이었다. 도시의 정경이 한 삶 동안 낯익다는 것은 말이다. 슬픈 독백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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