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14] 일상은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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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박 사일, 아니면 사박 오일. 지겨울 틈도 없이 어딘가로 거처를 옮긴다. 보통의 해외여행이다. 방학이나 휴가를 얻어 나온 이들은 어쩔 수 없다. 물론 우리의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질리지 않는 건 좋지만 적응할 새도 없는 기간이다. 상당한 기간을 주기로 가끔 있을 법한 ‘별 일’은 피해가기 좋다. 그러니까 두어 달 일찍 유럽을 갔다면 파리 테러(2015년 11월)에 휘말렸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에피소드로 쓰일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오기 힘든 나날을 우리는 보내고 있었다.

그와 비례하여, 우리는 소소한 일상도 보내고 있었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볼 거냐는 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진한 고민은 이를테면, ‘애매하게’ 남은 파스타 면의 양이었다. 한 봉지를 더 사자니 많을 것 같고, 그렇다고 요것만 삶기는 아쉬운데… 또는 이 ‘애매한’ 모양의 쌀은 안남미인가 아닌가… 같은 것 말이다. 불행히도 그런 고민은 별로 실속이 없었다. 감당키 힘들게 불어난 푸실리를 우적우적 처리하는 일이 잦았다. 냄비 바닥에 눌러 붙은 길쭉한 쌀알을 떼어내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도 일상의 한 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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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말이지 많았던 푸실리]

보름 가까이 함께 살다 보니 서로의 생활 능력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말을 잘 한다거나 공부를 잘 했다는 것과는 당연히 전혀 무관하다. 먼저 청소…랄 건 없었다. 침대에 있는 장애물(주로 젖은 수건, 입었다 팽개친 옷가지)이 있으면 한 쪽으로 치우는 일이 가장 청소 비슷한 일이었으므로. 그 다음은 빨래였는데, 보통 나였다(12편을 보시라). 사실 빨래를 챙기는 건 내가 유일했다. 옷이 별로 없다는 게 제일 컸다. 양말이나 속옷을 하루 이상 입는 걸 의외로 못 견디기도 했다.

요리엔 모두 욕심을 냈다. 다들 어느 정도는 했다. 나는 계란 프라이 하나는 기가 막히게 튀길 줄 알았다. 모두들 파스타를 볶거나 냄비 밥은 할 줄 알았다. 목살을 언제 뒤집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매하게 모험을 걸 때 사단은 난다. 뻬쩨르에서 둘로 나뉘어 도시를 돌아보니 저녁때가 가까워졌다. 집 근처에 남았던 둘이 장을 봤다는 연락을 했다. 그 중에 하나가 ‘진수’였다.

어차피 군대에도 있겠다, 오늘은 이 친구 얘기를 해보자. 나는 녀석과 고등학교 일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분명 남녀공학인데 일학년은 분반이었다. 어쩐지 억울함이 흐르는 남고생 사십 명이 앉은 교실, 시계가 걸린 복도 쪽 분단 가운데 자리가 진수의 것이었다. 나는 정확히 반대편이었다. 처음부터 친한 건 아니었는데, 어느 날 얘가 갑자기 일어나 1.5리터 콜라를 ‘원 샷’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물론 반의 반 쯤 먹다 뿜어버렸다. 이어진 수업시간에 연발하던 트림은 덤이었다. 웃기는 역할은 내 건데, 하고 경계했던 기억이 난다.

이학년이 돼서도 같은 반이 됐다. 녀석은 그새 20kg 가까이 살을 빼 미남이 됐다. 하지만 어딘가 맹한 모습이 잦아져서, 악마에 뭘 판 거 아니냐는 생각도 했다. 진수의 매력은 어느새 재기발랄한 동문서답이 됐다. 시월쯤 사건이 하나 터졌다. 진수가 수업시간에 잠깐 잡담을 했다. 선생님이 그걸 보고 녀석의 책상에 종이를 하나 휙 던졌다. 삼학년 때 위탁교육(직업교육)을 받을 학생을 모집하는 공문이었다. 공부하기 싫으면 여기서 기술이나 배우라는 것이었다. 진수가 큰 눈동자를 그렇게 굴리는 모습을 처음 봤다. 횡단열차를 놓칠 뻔 했던 일 전에는. 부아가 치미는데 입이 안 떨어졌다. 아무 말도 못해준 게 부끄러웠다.

그 다다음주가 중간고사였다. 그 선생님의 문제에 논란이 있었다. 따졌다. 선생님은 어디서 목청을 쓰고 눈을 부라리면서 따지냐고, 무슨 태도냐고 했다. 그때도 내 눈이 작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눈을 부라리는지 잘 모르실 걸요, 라고 생각했다. 그 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나갔었나보다. 아니 그럼 애한테 기술이나 배우라는 건 뭐 좋은 태도입니까?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른다. 놀란 김에 한 시간 넘게 대거리를 했다. 진수는… 조용히나 있지, 맞장구를 쳤다. 소동이 있은 뒤 나는 소소한 손해를 봤고 진수는 생글생글 며칠을 고마워했다. 뒷얘기가 중요한 건 아니다. 녀석은 그런 친구다. 그 밖에도 일화는 많다. 내가 재수를 할 때는 느닷없이 과제를 도와달라거나 도서관에서 책은 어떻게 빌리냐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홈페이지에서 로그인을 해,

      어떻게?

      용구 뭐하니?

      과제냐.

      어떻게 알았냐…

이런 식이었다.

다시 빼쩨르로 돌아가 보자. 저녁 재료를 샀다는 둘은 연어를 한 팩 샀다고 했다. 러시아치고도 비싸서 엄두가 안 나던 것이었다. 둘 중 누구의 작품일까 짐작이 됐다. 음… 예산을 다시 곱씹어야 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예상 범위 안이었다. 그래, 언제까지 파스타에 목살만 먹겠니. 녀석은 내친 김에 요리에까지 손을 댔다. 인터넷에서 찾은 레시피를 보고 나름대로 간을 하던 진수는 의외로 그럴듯한 모양으로 연어를 구워냈다. 그리고 그건 정말, 발트 해 연안에서 갓 잡은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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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실패작]

간이 돼 있는 연어에 또 소금 간을 한 게 문제였다. 우리는 생선 살 한 점에 밥을 한 움큼씩 집어먹다 그만두었다. 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처분은 단호해야 했다. 우리는 진수에게 요리유예 2주를 선고했다. 녀석은 아마 설거지도 자진해서 하지 않았었나 싶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은 못다 느낀 감칠맛을 치킨스톡으로 가득 채우는 것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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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성공작]

아파트에서 보내는 날도, 초록 철문도 익숙해진 빼쩨르의 아파트는 그런 소박한 이야기들로 가득 찼다. 오래 전 지어진 건물, 숱한 가족과 여행가의 이야기가 흘러왔을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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