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 여성위원회에서 진행하는 별 자리 인터뷰 글을 글쓴 이 동의 하에 이음에도 게재합니다. 이은주님은 부천 원종복지관에서 성차별•부당해고에 맞선 싸움을 2년째 하고 계십니다. 학생운동을 하다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운동판에서 ‘사라진 여성 운동가’가 되었다가, 지역 시민사회 운동가였다가, 지금은 해고자가 되어 성차별과 부당해고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가장 힘이 되는 것은 페미니즘’이라고 말하는 이은주님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우선 어떻게 사회운동을 시작하셨는지 이야기해주시겠어요?

저는 소위 80년대 학번이에요. 대학 선배한테 ‘간택되어서’ 학생운동을 시작했죠. 학도호국단 폐지하고 총학생회 건설하던 시기였고, 저는 1대 총학생회 학술부장을 했었어요. 뭘 해야 할지도 모르고 우왕좌왕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당시 ‘진짜 운동’이라고 생각했던 노동운동을 하고 싶어서 현장이전 코스를 준비했어요. 그때는 시위에서 ‘동 뜨고’(시작을 알리는 것) 감옥 갔다가 나오면 노동운동 현장에 가는 코스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4개 대학이 ‘영등포 가투’(가두투쟁)를 했었을 때 옥상에서 ‘짭새들’ 못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했었는데, 하필 그때가 유화국면일 때여서 동을 뜬 사람들 전원을 구속시키는 게 아니라 학교별로 상징적 인물만 구속시키더라고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저는 학교 후배들이랑 다 정리하고 이별의식 다 하고 책도 다 주고 울고 헤어졌는데 구속이 안돼서 얼마나 쪽팔려요. 아무튼 구류살고 나와서 85년 하반기에 노동운동 현장에 갔어요. 그렇게 몇 년간 노동운동을 하다가 93년에 전업주부로 살게 되었어요. 아이 낳고 키우고. 2003년에 부천으로 이사를 왔어요. 그 뒤로 지금까지 계속 이 근처에 살아요.

전업주부로 살면서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삶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안정된 생활을 20살 이후로 처음 해보는 거잖아요. 항상 방세도 못 내고 쫓기며 살다가. 안정된 생활, 가족, 동네에서 아이들 현장학습·체험학습 한다고 놀러 다니고, 엄마들 모아서 2008년에 촛불집회도 가고요. 부녀회장, 동대표도 하고, 뉴타운반대주민공청회도 우리 아파트에서 제일 처음으로 했었는데 제가 지역 부회장도 했었어요. 그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던 시간이었어요. 이때가 그전까지 제 삶에서 막혀있었던 감각들이 다 열렸던 기간이었던 거 같아요. 그전엔 당위성이나 옳음을 가지고 운동을 했다면요. 어느 날 애들을 데리고 엄청 오랜만에 대학에 나들이를 갔는데 학교 캠퍼스가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전에는 그게 하나도 안보였던 거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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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2016년 6월 5일 원불교 봉도청소년수련관에서 열렸던 ‘노동당 여성당원캠프 자매애는 강하다’에서 패널로 이야기 중이신 이은주님의 모습. 모두를 웃기고 울렸다.]

노동당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2008년 촛불 계기로 애들 둘 데리고 아줌마들이랑 광화문 가고 김상곤 무상급식 운동 보면서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진보신당 가입을 했고요. 처음에는 당원으로 활동할 생각은 없었어요. 우연히 김상곤 선거운동 때 알고 지내던 시민 사회 쪽 대표 이 지역에 선거운동 해줄 사람이 없다고 부탁을 하셔서, 다른 건 모르겠는데 김상곤의 무상급식 의제는 확 끌렸어요. 그렇게 선거운동을 했는데 나중에 같이 했던 분들이 말해주시기로는, 제가 선거 운동 하러 나타났을 때 80년대 운동권처럼 방에 선전물 가지고가고, 집집마다 뿌리고 다니고 그래서 뭐 저런 애가 있나 했대요. 저의 기억에서 선거는 중요한 선전선동의 장이었으니까 그렇게 했던 건데(웃음) 다른 분들한텐 되게 오버 같았을 거예요.

아무튼 지역에 얼굴 내밀다보니까 그 뒤로 계속 얽히게 됐어요. 게다가 제가 또 진보신당 당원이었던 거죠. 당 모임에도 나가게 되고, 당 활동을 하게 됐죠. 노동운동 그만둘 때 다신 운동 안한다고 했었거든요. 진보신당 당원 가입 할 때도 며칠을 고민했었어요. 우리 시절에 ‘당’은 모든 걸 다 바치는 거고 모든 운동의 결정체인데, 내가 그걸 할 자격이 있나 하고요. 잘 살아야겠다고 삶에 대한 반성도 하고. 당이 저한텐 그런 거였던 거 같아요. 나의 어떤 정치적 신념뿐 아니라, 나의 삶까지 투영될 수 있는 곳. 지금 생각하면 좀 웃겨요.

진보신당 독자통합 논쟁 때 불행하게 전국위원이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저는 참여계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반성과 성찰 없이 하는 거에 대해서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되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탈당하고 당협이 한 2년 동안 거의 올스톱이 됐어요. 몇몇 당원들의 간곡한 부탁과 또 책임져야한다는 생각도 있어서 당협 사무장 일을 맡았어요. 2014년 지방선거 때에는 도당위원회에서 도비례후보가 없다고 사정을 해서, 제가 능력 있고 실력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없다는 얘기 때문에 후보도 했어요. 당협에서 선거운동을 열심히 잘 했고, 그 뒤로 당협이 굉장히 활성화되었었어요. 그런데 선거 후 한 당협 행사에서 제가 성희롱 피해를 당했어요. 저는 그전까지는 당 여성위원회에서 성폭력 문제 자꾸 공론화 하는 게 싫었거든요. 왜 여성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시끄럽게 만들지 생각했었어요. 저는 여러 사람을 두루두루 모으는 역할이었으니까 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제 일을 당하니까 알겠더라고요. 제 일은 당협 내에서 해결되긴 했는데 여러 가지로 부족했고 아쉬움이 많아요. 그때 좀 날개가 꺾인 것 같아요. 그 뒤로 새로운 방향에 대해 고민할 때 마침 원종복지관에서 활동을 제안 받았어요. 얼른 좋다고 했고, 활동의 장을 넓히는 것이 앞으로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며 간 거 같아요.

그렇게 시작하게 된 원종 복지관에서 동료 복지사 A의 임신 소식을 들은 부장이 “가임기 여성은 다 잘라 버려야겠네”라는 말을 했었죠. 사과를 요구하는 동료 복지사 A와 함께 싸우시다가 부당해고 되었고, 성차별과 부당해고에 반대하는 투쟁을 2년째 해오고 계시고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고 어떤 마음으로 하고 계신지 알려주시겠어요?

저는 사실 처음 사건을 알게 되었을 때 공모사업 해서 최우수마을상도 받고 하면서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을 때였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A 선생님이 겪는 조직 내 왕따 등 심적 고통에 대해 고민을 들어주는 정도였어요. 왜냐하면 홍갑표 관장이 괜찮은 사람이니까 말하면 상식적으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복지관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토론회를 하는데, 이 때가 피해자 선생님의 사과요구가 관장에 의해 실질적으로 거부된 상태였거든요. 고개를 숙이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앉아있는 A 선생님 얼굴을 보는 순간 직원들끼리 웃고 토론하는 게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도 A 선생님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게 너무 힘들었고요. 그래서 그때 제가 발언을 했었거든요. 동료의 인권문제를 외면하며 복지나 인권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요. 그리고 그 사건의 방향이 이은주가 A씨를 선동하고 조직을 분란시킨다는 조직 보위 논리와 하고 피해자와 조력자들을 쳐내는 방식으로 흘러가더라고요. 동료와 지역의 몇 분에게 저를 자르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고, 그래서 싸워야겠다고 결심을 했어요.

A 선생님이 저한테 이렇게 얘기했었어요. 그 전에 자기가 일하던 곳에서 성희롱 피해를 입었었는데, 회사한테 말했더니 회사에서 ‘(가해자가) 한 가정의 가장이고 하니 A 선생님이 참아야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그냥  그만뒀대요. 근데 그게 잊혀지지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는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얘기했어요. ‘나도 이런 일이 있었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건 나인데, 그때에는 그게 다 제가 미안한 일이었더라고요. 제가 미안한 일로 기억되어있는 거예요. 그게 내 삶을 굴절시켰던 거예요. 그게 다 성폭력이었는데. 그때 페미니즘이 많이 힘이 되었어요. 제가 지금 54살인데, 이제 와서 페미니즘을 통해서 제 삶이 재구성이 되더라고요. 페미니즘 강의나 SNS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다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겠어요. 온 몸으로 들어오더라고요. 제가 굉장히 많은 성폭력의 희생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제 삶에 있던 굴절의 과정이, 내가 의지가 부족하고 그래서 도망갔던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이런 운동의 풍토 속에서 상처를 받은 거였다는 걸 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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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성차별·부당해고에 맞선 부천원종복지관 규탄 집회는 매주 금요일 열린다. 집회에서 마이크를 들고 발언하고 있는 이은주님의 모습]

페미니즘과는 만나게 된 얘기를 더 해주실래요?

원종사건을 경험하기 전에는 여성주의 관련된 책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어요. 우리 때에는 그런 게 없었고, 선거운동 하면서 복귀했을 때에도 그런 얘기 못 들었고. 좀 까칠한 애들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원종복지관 홍갑표 관장이 말하는 ‘조직분란자들’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여성주의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어요. 제 포지션이 ‘포용력 있는 누나’ 포지션이었고, 왜, 여성에게 그런 포지션이 유리하잖아요. 사람들을 끌어내고 모으고 하는 데에 그게 많이 도움이 됐던 거 같고, 그래서 그 이미지를 더 강화하게 됐던 거 같아요. 근데 원종사건 진행되면서 계속 고민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이걸 잘 풀어야하지? 누구 말이 옳은지 논쟁이 생기고, 마치 양쪽이 다 상처받은 것처럼 되고. 피해자 관점이 왜 옳은지, 왜 피해자 관점을 지지해야하는지 제가 경험을 통해서 알게된 거 같아요. 사람들이 피해자에 대해서 저한테 ‘저 사람 못된 사람이에요. 둘째 안 낳는다고 했었어요’라고 한 적 있어요. 둘째 낳는다고 못된 애라는 거예요, 조직 분란자라고 하고. 조직 내 성폭력·성차별 사건이 어떤 식으로 다뤄지는지 제가 본 거에요. 해고되고 난 다음에 이걸 어떻게 할지 계속 돌아보고 고민하게 되다가 페미니즘을 찾아보게 됐어요. 처음으로 접한 건데, 접하다보니까 딱 맞는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다 맞는지. 사건 해결 과정에서 고민했을 때 제가 생각했던 방향이 다 맞았던 거예요. 엄청 든든하고 용기도 생기고. 공부해야겠다는 결심도 생겼어요.

페미니즘이 가장 큰 힘이 됐고 든든한 빽이 됐어요. 페미니스트 동지들을 만나면 막 대충 말해도 서로 알아듣는 거예요. 민주노총 성평등 강사단 교육과 NGA에서 페미니즘 학교를 들었는데, 수업을 두근두근 기다렸었어요. 세례 받는 것처럼 쏙쏙 스며들었어요. 힘든 시간이었는데 그 공부하며 많이 힘을 얻었어요. 그때 너무 힘들어서 아무 책도 눈에 안들어왔었는데, 페미니즘은 그렇게 쏙쏙 들어오더라고요. 제가 계속 공부하고 싶은 이유는 다른 페미니스트들이랑 만나고 싶어서인 것도 있어요. 가까운 지역에 같은 페미니스트가 없다는 게 아쉬워요. 제가 속마음을 같이 얘기했고 페미니즘 모임도 같이 하자고 하던 40대 초반인 동지가 있었는데 일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버렸거든요. 그래서 왜, 박근혜 탄핵 집회 때 ‘페미존’ 같은 곳에서도 주변에 가보고 했는데 민망해서 막 적극적으로 다가가진 못하겠더라고요.(웃음)

앞으로는 더 같이하면 좋을 것 같아요. 페미니스트 동료들이 많이 없어서 아쉽다고 하셨는데, 노동당에도 페미니스트들이 많지 않고, 노동 운동은 특히 그렇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답답함은 없으세요?

저도 노동운동이나 80년대 운동이라는 같은 토양에서 컸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운동의 한계와 인식의 차이를 잘 알아요. 사회인식 있어서 완전히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이 갭을 극복하기가 힘들잖아요. 노동운동에서 동지여도 여성운동 차원에서 봤을 때는 동지가 아닌 경우 많잖아요, 저도 알아요. 노동문제에는 관심 없지만 여성문제에 관심 많은 동지들도 있고. 저번에 원종사건 집회에서 한 분이 ‘2년 동안 싸우면서 우리가 정말 많이 페미니즘적 시각을 배웠다’고 하시는데, 그 말을 듣는데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이 싸움을 통해서 많이 변하고 배웠다는 게 탁 꽂히면서, ‘아 이 싸움을 통해서 조금씩은 변화가 있긴 있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

일단 저는 그 인식의 차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맑스도 여성의 노동을 자연적 노동으로 이해하잖아요. 자본주의 시초축적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투쟁했고 저항했는지 맑스가 보지 못한 거죠. 맑스 눈에도 여자가 보이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래도 저는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빨리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집단도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본 경험이 있는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해요.

원종 투쟁하신지 벌써 2년이 되었어요. 앞으로 투쟁은 어떻게 될 것으로 보세요?

사과하라는 게 우리의 주된 요구였는데, 복지관에서는 ‘교육 했고 시말서 썼다’고 주장하거든요. 불충분하죠. 인권위에도 진정을 넣었었는데 기각이 됐어요. 6월에 원종 사건으로 국민참여재판이 열릴 거예요. 국민참여재판을 다시 한 번 여론화시키는 계기로 잡고 싶어요. 홍갑표 관장은 사회단체관장들 다 데리고 브리핑하고 그쪽 입장을 다 공유했더라고요. 홍갑표는 다 했는데 우리는 우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서 국민참여재판을 계기로 지역에서 공론화해보고 싶어요. 일터에서의 성희롱은 전사회적인 여성의 문제이고, 왜 이 원종사건이 장기화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야기하는 토론회도 만들고 싶고요. 복지관 직원들도 아마 이 사건을 보면서 내적 갈등이 상당히 많았을 거예요. 피해자가 조직에서 축출되고 분리되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조직원들 모두 2차 가해자가 되고요. 문제는 이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다는 거에요. 홍갑표 관장은 자기가 아직도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고 하거든요. 이 인식을 바꾸고 싶어요.

무엇보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복직한 피해자 A 선생님이 가해자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거예요. 이런 사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공간 분리가 기본이잖아요. 근데 칸막이 하나 두고 같이 있어요. 그래서 A선생님이 정말 힘들어요. 원형탈모가 오고, 칼에 찔리는 악몽을 꾸고, 깨고 나서도 그 느낌이 남아있고요. 항상 체한 거 같고. 숨이 턱턱 막히고. 그러고 일 끝나면 애 둘 데려오고 씻기고 먹이고 하고 있어요. 공간분리, 그걸 빨리 해결해야 해요. 너무 잔인한 시간 같지 않아요? 너무 잔인한 시간이에요. 저는 페미니즘 학교 다니기 직전이 가장 힘들었어요. 상처도 많이 받고 분노도 컸어요. 잠도 잘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페미니즘이 그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해줬죠. 왜 사람들이 가해자 시각을 갖게 되는지 이해가 되고 그러니까 좀 정리가 되더라고요.

피해자 A 선생님하고 요새는 꼭 연애를 하는 거 같아요. 매일 통화하고. 이렇게 아프다고 하면 제가 더 많이 아픈 거 같아요. 투쟁에서 우여곡절도 많았고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크게 얻은 것이 있다면 A 선생님과의 유대감인 거 같아요. 같이 싸우면서 동지가 된 느낌이에요. 사실 우리가 올바르게 살겠다고 해서 여기까지 온 거였잖아요. 근데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나 몸이 안 좋은 가족에 대한 죄책감까지 있으니까 어렵죠. 고통 자체는 사람을 파괴하지만, 이 투쟁이 고통뿐인 힘듦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 좋겠어요. 어렵고 고민이 많이 되는 상황인데, 많이 관심 가져주세요.


인터뷰 일시: 2017년 4월 21일

인터뷰어: 윤영(노동당 여성위원장)

인터뷰이: 이은주

녹취와 속기를 토대로 순서 등을 재구성함


지금 부천원종종합복지관 성차별 피해자는 매일같이 가해자와 같은 사무실에서 유령 대우를 받으며 말그대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분리 조치는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조치입니다. 인권을 말하는 복지관에서 최소한의 피해자 인권을 나몰라라 하고 있습니다.

사과는 커녕 피/가해자 분리조차 안하는 부천원종종합복지관! 나몰라라 하는 부천시청에 항의해주세요!

* 피해자 고통 방치하는 ‘여성행복도시’ 부천시에 항의해주세요!

☎️ 부천시 민원과 032-625-2441

부천시 페이스북 계정 https://www.facebook.com/bucheon.fb/

“성희롱하는 복지관 방치하는 부천시청! 여성행복도시라면서 왜 피해자 고통을 방치하나요? 부천시가 나서서 해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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