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경제가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사고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상식에 현저히 반한다. 당장 지난 19대 대선에서 정치인 문재인 후보는 5년 동안 약 121조 5천억원이 추가 소요되는 복지 관련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는데, 문 대통령의 정치가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사고는 근대 경제학이 수립되는 기본 원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고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조선일보>의 지난 6월10일치 사설 “김동연 경제팀, ‘정치’ 아닌 ‘경제’만 보면 성공할 것”이라는 제목이 좋은 예다. 이 사설의 목적은 새로운 경제팀이 정치 논리를 배격하고 경제 논리에만 충실하다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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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경제를 정치로부터 분리시키는 다양한 제도가 실제로 존재한다. 통화 정책을 수립하는 중앙은행의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이 대표적이다. 자유무역협정(FTA)에서 개방화 역진 방지 조항은 협정의 한 국가가 한번 도입한 시장 개방에서 더 이상 후퇴하지 못하도록 한다. 유로존 국가에 적용되는 안정·성장 협약은 회원국의 재정적자 수준을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제한한다. 이 모든 장치들의 목적은 정치 공동체가 정치적 필요에 의해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거나 제약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 민주정치의 원리와 충돌한다.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와 제라르 드브뢰가 1950년에 발표한 ‘애로-드브뢰 모형’은 일정한 조건하에 수요와 공급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균형가격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여기에서 일정한 조건이란 시장이 완전경쟁 상태에 있을 것, 시장 참여자들이 미래의 상태를 완벽하게 내다보고 오직 합리적인 경제행위만을 한다는 것 등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경제 상태의 증명에 집중한 것은 다른 교란 요인이 없을 경우 시장경제가 자원을 가장 합리적으로 배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는 대표적인 교란 요인이다. 이로부터 신고전파 경제학은 현실에 존재하는 시장경제를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라, 당위적으로 요구되는 시장경제를 찬미하는 규범의 성격을 갖게 된다. 규제 완화, 민영화, 고용 유연화 등은 모두 이상적인 시장경제의 작동을 위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그런데 각국의 선거제도에 따른 재분배 수준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가, 인류가 민주정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표의 등가성이 보장되는 평등선거의 정도에 따라 복지 수준이 다르다는 분석은 충분히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국가 중에서, 모든 의원을 비례대표제로만 선출하는 벨기에, 지역구 제도는 두고 있지만 전체 의석수를 정당득표율에 일치시키는 독일, 지역구 최다득표자를 당선시키는 미국 3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율은 2014년 기준으로 각각 30.7%, 25.8%, 19.2%이다. 이런 선거제도의 유형에 따른 차이는 다른 오이시디 국가들에서도 뚜렷이 확인된다.

미국과 같은 소선거구제의 나라 한국의 지디피 대비 사회복지지출은 오이시디 국가 중 꼴찌 멕시코보다 약간 높은 10.4%이다. 한국이 선거제도를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전환할 경우 2016년 지디피 1637조원의 15%인 연 245조원의 복지 재정을 확보할 정치 환경이 조성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약 150년 전에 정치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소수파의 의견도 대표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근거로 비례대표제를 옹호했다. 2000년대에 정치경제학자 토르벤 이베르센과 데이비드 소스키스는 재분배 제도로서 선거제도를 고찰했다. 이들에 따르면 소선거구제 다수대표제에서는 중위소득자들이 고소득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에 투표하는 현상이 계속된다. 한국의 선거제도와 소득 계층별 투표 행태는 이들의 가설을 확증한다. 문재인 정부가 자신의 공약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서는 증세가 불가피하다. 증세와 재분배의 정치경제학은 비례대표제로의 전환이 근본적이고도 안정적인 복지 재정 확보의 수단이라고 알려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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