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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17] 몽마르뜨와 친구들과 아시아인과


     그게 기억이 나?

라는 것이 여행기를 쓰고 있다고 했을 때 보통의 반응이다.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여름이건 겨울이건 실제로 그러했던 일이 잘 없었다. 먹을 것에 후한 성미 때문에 엥겔 지수가 1에 매우 근접하기 때문이지만, 아무튼, 따라서 내가 ‘여행’을 입에 담는다면 그것은 거의가 일 년 반 전 다녀온 유럽 횡단이다. 당연히 기억이 흐릿하다. 앞으로는 더할 것이다. 앞서 쓴 도시에서 있던 일이 나중에야 기억나기도 한다. 그러나 씨줄과 날줄 사이에는 일 미리라도 틈이 있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를 해 본다.

마침 지난달(6월 19일)부로 여정의 동지들은 나를 빼고 이제 모두 군대에 있게 되었다. 이름도 희한한 ‘동기’가 마지막으로 입대했다. 닥쳐왔던 기말고사를 핑계로 못 보고 있던 친구다. 입대 날 아침에 얼굴이나 보러 갈게, 라고 했지만 늦잠을 자 버렸다. 꽉 찬 진심을 ‘결과적 빈말’로 만들고야 마는 나의 관성이었다.

         그랬냐? 갔다 올게.

녀석은 입영 직전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 기가 차는 친구를 그냥 웃어넘겨버린 것이다. 이런 녀석이다.

한창 재수생활이 무르익던 가을이었다. 두 명의 과외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국어(!)와 한국지리(!!)라는 틈새시장에서 돈을 번다는 것도 놀라운데 둘씩에게 선생질을 – 그것도 재수생이 – 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천운에 가까운 요행이었고, 지금까지 재현된 적 없는 역사다. 나에게 입시를 맡긴 이 죄 없는 이들은 모두 고등학교 삼 학년이었고, 그 중 하나는 여학생이었다.

교통비라도 짜내서 여행을 갈 작정이었으므로, 보통 독서실에서 이 친구의 집까지 이십 분 정도를 걸어갔다. 주말에는 남학생 수업이 끝나자마자 여학생 수업을 하러 걸어가기도 했다. 칠팔월은 지났다 해도 가을 땡볕은 더 높이서 작렬하는 것이니 아마 굉장한 땀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거실 테이블에 앉자마자 선풍기 켜도 되냐며 머리를 긁적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다지 멋있는 선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제법 잘 가르치는 과외교사였다. 성적이 나쁘지 않았고, 학부모도 나를 그럭저럭 믿었다. 그 집에서 매번 내주는 간식으로 한 끼를 때우기도 했다. 연습문제를 준 뒤 기다리는 시간에 빵이나 샌드위치를 집어먹었다. 어려운 문제를 생각보다 빨리 풀 때는 나도 그만큼 빨리 씹어야 했다. 그러다 가끔 사레가 들렀다. 어딘가 서술이 다 궁상으로 귀결되는데, 가감 없는 사실이다. 내 공부는 언제 했냐고? 재수생치고는 지나치게 방자한 이 생활의 결말은 2편에서 이미 적은 바 있다. 알고 보면 이 여행기는 두괄식이다.

아무튼 이 친구까지 가르치고 나니 아홉 시 쯤이 됐다. 독서실로 돌아가 새벽 두 시까지 있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마침 그 집이 축제가 열리고 있던 근처 대학 앞이었다. 그 시각 바로 동기와 진수가 주점에서 술을 먹고 있었다. 온 김에 잠깐 들렀다 가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하며 가방을 챙기고 있었더니, 자기도 가고 싶단다.

         미쳤니?

         센세(‘선생님’, 나를 이렇게 불렀다)도 가잖아?

         …

나는 결국 이 녀석을 말석에 끼워주고 말았다. 나는 그다지 좋은 선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높새바람과 봄철 가뭄의 인과관계를 가르칠 때는 몰랐던 그녀의 붙임성을 그 날 처음 봤다.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모두 그녀에게 푹 빠졌다. 여행을 떠날 무렵, 동기는 그 친구와 한 달 째 사귀고 있었다. 파리 숙소에서 깨 보면 둘은 아침마다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물론 저녁에도 그랬다. 그러면 나는 에이 지랄한다, 를 붙이면서도 어딘지 뿌듯하면서도 또 어디는 허전한 마음으로, 빨래를 걷었다.

첫째 날은 저녁만 먹고 둘째 날 개선문과 에펠탑을 갔으므로, 셋째 날은 당연히 몽마르뜨 언덕에 가는 것이 순서다. 아, 우리는 개선문의 야경을 본 뒤 에펠탑으로 걸어갔다. 그 감상을 얘기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매체에서 접하는 그대로다. 그냥 그렇다. 정각마다 일 분씩 온 탑이 반짝이며 빛나는 것은 물론 장관이었다. 에펠탑에 가까이 가면 온갖 언어로 호객을 하는 흑인(편견은 없다. 정말 다 흑인들이다)들을 만날 수 있다. 열쇠고리 아니면 셀카봉을 파는데, 이 사람들이 귀신같다. 우리에게 일본어나 중국어로 말을 걸 법 한데도 ‘안녕하세요, 일 유로!’를 외치는 것이다. 물론 비슷한 부류의 호객행위는 어디를 가나 있었다.

몽마르뜨 ‘거리’가 있고 ‘언덕’이 있는데, 서로 조금 멀다. 파리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관광지는 ‘언덕’이기 때문에 주의해서 찾아가야 한다. 선배 여행가의 후기에서 인이 박히도록 들은 정보였지만, 역시나 우리는 한참을 헤맸다. 예의 가랑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었고, 그 와중에 목이 말라 맥주 한 병씩을 사먹었다. 500ml 에비앙이 1유로였고, 같은 용량의 맥주 값은 그보다 0.5유로 정도 비쌌을 뿐이라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걸 또 다 비우고 나서야 우리는 행인에게 길을 물었다. 마침 우리 앞에 자전거를 세우는 동양인 아저씨였다. 그는 미화원들이 입는 것 같은 노란색 형광 고어텍스를 입었는데, 아주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아저씨는 베트남 출신이라고 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은 동남아인들의 그것이기도 했지만, 천진한 웃음에 어린 주름을 보면 꼭 그래서만도 아닌 것 같았다. 뭣 때문에 그렇게 타셨소, 라고 금방 물어볼 만 한 영어가 안 되었던 우린 역시 ‘메르시’에 그와 작별했다.

         반가웠어, 우린 아시안이잖아!

라며 눈을 찢어보이던 아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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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7-1. 이런 골목이 한 두 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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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7-2. 그렇게 찾은 언덕의 경치]

그리고 내려올 때 다시 호객을 겪었다. 이번에는 아주 고약했다. 언덕 밑에 호객꾼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관광객들에게 다가온다. 말로만 호객을 하는 게 아니고, 어깨를 잡거나 팔목을 끌어댄다. 이 때 팔찌를 채우려고 하는데, 팔찌 값을 요구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붉은 광장 백(百)둘기의 습격’보다 규모는 작되 훨씬 능동적인 방식인 것이다. 호된 예방주사를 맞고 온 우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익히 알려진 수법인 터라 더욱 그랬다. 심드렁한 ‘노 땡큐(즉 ‘꺼져’)’를 흘리며 그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역시 내가 앞장을 섰고, 맨 뒤에는… 아, 맞다! 싶을 때 고성이 났다.

가장 덩치가 작은 지환이가 또 목표물이 되고 만 것이다. 키가 족히 백 구십은 되어 보이는 흑인(정말 편견은 없다. 하지만 진짜로 다 흑인이었다)들이었거니와 그 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한민족의 신체조건을 절감하는 넷이 달려들어서야 탈출할 수 있었다. 큰 소리를 내고, 적극적으로, 무섭게, 저항해야 놓아준다. 새 건물이 들어선 지금은 어떨는지 모르지만, 몇 년 전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면 상인들이 저녁 시간 때쯤 가게 앞에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삼촌 기회를 줘” 따위의 대사를 날리며 손님들을 끌고는 했다. 하지만 눈을 피하기만 하면 됐던 노량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호객의 세계가 파리에 있었다.

내려와 지하철역을 찾으며 다시 욕을 한바탕 했다. 그러자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나쁜 말을 했으니 고해를 해야 한다. 노트르담 성당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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