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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18] 텀블러


쓰다가 만 반쪽짜리 장기판이 스테인리스 대야를 받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현대 바둑의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이 분명한, 경첩이 달려 반으로 접히는 바둑판이다. 원목이 아니라 합판 아니면 MDF를 썼겠지만 대신 가볍고 편하고 저렴하다. 무엇보다 양면이라 장기판이 뒤에라도 그려질 수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그것을 사들고 왔다. 그리고 당신이 바둑을 직접 가르치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바둑은 나에게 불가능한 운동이었다. 집중보다는 산만에 가까운 성질에다 정석보다는 요령을 좇는 지금의 버릇이 어릴 적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공고 토목과 동문 가운데 손에 꼽히는 국수가 아버지였지만, 안타깝게도 인내력 있는 선생까지는 못 되었다. 부자의 바둑교실은 이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래도 그가 덤으로 사온 장기 말 움직이는 법칙은 외울 만 했다. 그래봤자, 시작하자마자 졸(卒)을 한 칸 뒤로 물리고 포(包)를 앞세워 궁(宮: 漢, 楚)을 방어한다, 까지가 내가 익힌 요령의 전부였다.

장기마저도 싫증이 났을 때 싸구려 바둑판은 애물단지가 됐다. 경첩마저 망가졌을 때 버리려고 내놓았던 것이 ‘스뎅 다라이’ 밑에 깔려 있다. 나머지 반쪽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아마 엄마는 알지도 모르겠다. 실은 바둑판이나 난초 화분이나 빛바랜 액자처럼, 아버지와 내가 쓰다가 흥미를 잃은 물건이 수두룩하다. 그것을 어떻게 다시 살려내 쓰임새를 만드는지 엄마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거기에 이골이 났다. 그녀는 버리고 던지는 데에 익은 우리 집 남자들의 뒤치다꺼리를 묵묵히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선풍기를 쐬다 문득 발견한 한낮의 베란다 구석이었다. 물론 파리가 아니라 에어컨 없는 서북서 방향 우리 집의 이야기다.

어느 외인(外人)이 ‘서울 1호 맥도날드’를 찾는다면 조금 이상할 테지만, ‘파리 1호 스타벅스’라고 하면 퍽 느낌이 다른 듯도 하다. 내부가 아주 예쁘고 고풍스러워 일부러 찾는다고들 하는 곳이다. 오페라 극장 동쪽 대로변에 있는데,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우리가 파리에서 최초로 찾아낸 스타벅스였다. 실은 ‘파리 1호’였다는 건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유럽의 여느 날이 그랬듯 비는 흩뿌리다가도 돌연 세차기를 거듭했다. 앞에 크레페를 파는 노점이 있었다. 자리 잡기가 대단히 힘들어서 현지인 여럿과 눈치싸움을 벌였다.

그래봤자 둘씩 찍어져 앉은 노란 조명이 나른한 카페, 우리는 프라푸치노를 먹었다. 한국과는 조금도 다르지 않은 맛이었다. 거세진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빗줄기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다 2.5유로짜리 크레페를 사먹었다. 정확히는 친구들이 산 것을 한 입 얻어먹었다. 내용물은 누텔라 크림과 바나나, 누구나 아는 맛이지만 그래서 누구나 좋아하는 맛이기도 했다.

하나를 사먹을 법도 했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깨진 캐리어 탓에 가방을 새로 사야 했다. 뜻밖의 지출이 생겨버린 것이다. 1199루블(당시 한화로 약 18,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좋은 여행 가방을 득하긴 했지만, 그러지 않아도 빡빡하던 경비는 더 줄어버렸다. 밥값과 관광비용으로 쓸 이런저런 공금을 빼고 내가 쓸 돈엔 거의 여유가 없었다. 실은 기념품 비슷한 무언가를 집에 가져가고 싶었다. 돈을 아끼고 아껴 가긴 했어도, 엄마 갖다 줄 선물은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고른 것이 텀블러였다. 스타벅스는 다국적기업답게 도시마다 각각 다른 디자인의 머그컵이나 텀블러를 판매한다. 모스크바는 크렘린이 그려져 있고, 파리엔 에펠탑이 새겨져 있는 식이라 수집욕 있는 여행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식당으로 출근하는 엄마는 항상 보온병을 싸들고 다녔다. 머그컵이 더 예뻤지만 그게 생각나 덥석 구매한 ‘파리’ 텀블러. 무려 11.95유로였다. 그 때는 그럴 듯 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 생각해보니 아니었던 것 같다. 열쇠고리보단 낫다고 여겼지만, 왜 뒷골목 공방이라도 돌아다녀 볼 궁리라도 하지 않았을까. 소박한 진심보다는 서투른 생색에 가까웠을 얄궂은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엄마 손아귀보다 식기세척기 속에 더 오래 있었던 텀블러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전히 기껏 사다드린 새 것 대신 오래 써 온 ‘마호병’을 쥐고 나서고는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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