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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 19] 몽쥬


우리는 아직 얼얼한 손목을 어루만지던 지환이를 데리고 언덕을 내려왔다. 몽마르뜨는 숙소(17구) 근처의 18구에 있었다. 다음 행선은 노트르담이었는데, 그 전에 들른 곳이 ‘몽쥬 약국’이었다. 여기가 유명하다며 가자던 진수는 물론이고 넷 모두가 입구에서부터 조금 ‘벙찌고’ 말았다. 웬걸, 사람이 너무 많았다. 식상하지만 적확한 표현이 ‘도떼기시장’ 되겠다. 그리고 거의가 동양인, 또 그 중에서 십중팔구가 한국인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아예 “한국인이에요, 저한테 물어보세요.” 라던 직원이 있을 정도였다.

전날 오후에 한인마트를 찾았었다. 모스크바부터 매일 대동소이했던 우리의 식단이 드디어 지겨워졌던 것이다. 제대로 요리를 했다기보다는 데워 먹은 것에 가까웠던 토마토 파스타, 후추를 곁들인 목살 볶음, 냄비 밥이 거의 다였다. 물론 가끔 변주를 시도했다. 연어를 굽는 데 도전하거나 치킨스톡을 풀어 닭을 삶아 먹은 일이 있었다. 모두 뻬쩨르에서였다. 그런대로 의의가 있는 도전이었지만 일단 전자는 처참히 실패한 바 있다. 바로 다음날이었던 후자의 경우, 치킨스톡은 엄지손톱만한 큐브로도 마법을 부렸기 때문에, 매우 성공적이었다.

밥 때만 되면 이성을 잃는 나는 닭고기를 모두 건져 먹고 국수에 밥까지 말아먹었다. 그러고 나니 모두가 질린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몇 년간 녀석들과의 겸상에서 볼 수 있던 그, 감탄 반 어이없음 반의 그 얼굴들. 뭘 새삼스럽게 이러냐는 말을 붙일 때 쯤 깨달은 것이 있었다. 녀석들은 이미 익숙한 나의 식성에 질린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포만감으로도 지울 수 없는 묘한 텁텁함과 느끼함이 몰려와 가닿은 것이다.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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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한인마트. 간접광고가 아니다.]

다음날 우리는 곧장 마트를 찾았다. 김치는 물론 된장찌개와 김치찌개거리를 샀다. 파리의 비싼 물가에서 그 ‘K-MART’는 해방구였다. 두부며 감자가 가히 염가였다. 한 팩에 오백 그램 하던 수육용 돼지고기가 아주 쌌던 기억이다. 두 팩을 샀다. 한 팩을 더 사자고 우기던 나를 모두가 뜯어말렸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파 줄기가 고개를 내민 흰 비닐봉투를 들고 귀가했던 것이다.

저녁을 해먹으려고 찾은 곳이니 아마 오후 다섯 시쯤이었을 그 한인 식료품점의 고객 구성은 다음과 같다. 일단 우리처럼 타지에서 한식을 고파했던 여행자, 또는 교포들이 있었다. 정육 코너와 매대를 비롯해 합쳐 예닐곱은 될 점원들이 또 모두 한국인이었으니 합쳐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중국인과 일본인을 찾을 수 있었다. 또 절반쯤을 차지하는 것이 팔에 장바구니를 끼고 미간을 찌푸리는 현지인들이었다. 백인이 흑인보다는 조금 비율이 높았던 것 같다. 백인들은 대개 헤드폰을 끼고 있었고, 흑인들은 이어폰을 주로 착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물론 표본은 매우 적겠지만, 파리에 있는 내내 겪었던 경향이었다. 파리지앵들이 야외에서 음악을 청취하는 방식은 인종별로 좀 달랐던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나갈 때 쯤 짧은 터번을 쓴 이가 하나 들어와서 소고기 다시다를 살펴보기도 했다. 음…

그러니까 – 몽쥬 약국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자 – 이 한국인의 한국인을 위한 가게조차도 이렇게 구성이 다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일개 약국이 이렇게 오로지 한국인으로만 붐빌 수 있단 말인가. 귀성열차 플랫폼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가공할 혼잡도에, 나는 홀리듯 풋 크림을 구매하고 말았다. 발바닥에 굳은 살이 많아 자주 갈라지는 아버지 생각이 났다. 독일제였는데 7.9유로였다. 얼마 전 시골 집에 내려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아직도 미개봉 신품 상태로 방치중이다. 무던한 우리 집안 사내들이 으레 그렇다.

약국은 이름답게 몽쥬 가(Rue Monge)에 있었다. 그래봤자 2차선인 도로 맞은편에 가게를 하나 더 열어놓았는데, 향수와 화장품 따위를 파는 곳이었다. 나중에 다른 후기를 살피니 바로 옆에 미용실과 건강용품 상점도 있다 한다. 각자 여유가 되는 대로 립밤이며 핸드크림을 골랐고, 진수는 어머니 드릴 화장품을 샀다. 포장은 또 하나같이 그 비닐 봉투였다. 바게트가 담긴 갈색 종이봉투를 안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림은 파리에서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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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쥬 가를 따라 슬슬 걸어가면 발음이 어려운 작은 공원(Square René Viviani)이 보이고, 그 공원 앞으로 곧장 세느강변이다. 그리고 건너편에 노트르담 성당(Cathédrale Notre-Dame)이 섰다. 파리의 중심, 시테 섬이다.

러시아의 성당들에서는 가볍지 않은 입장료를 내고도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우리가 러시아 정교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교회당이나 성당이 있으면 겉을 둘러보고 사진이나 찍고 마는 정도였다. 공연히 돈 쓸 일이 있냐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달랐다. 우선 티켓이 없었다. 누구나 간단한 검색만 거치면 별 절차 없이 입장할 수 있다. 또 그 날도 꽤 많은 거리를 걸었기에 쉴 곳이 필요했고, 약국에서 여비를 적이 쓴 마당에 이제 스타벅스 같은 커피숍을 찾기는 부담이었다. 온 김에 들어가자는 합의가 도출된 것이다.

성당 앞 광장(요한 23세 광장)엔 여기도 여행사 깃발, 저기도 여행사 깃발이었다. 아까의 약국 못잖게 시끌벅적하다. 일 년에 천만 명 가까운 관광객이 찾는 곳이니 당연하다. 그러나… 내부에 발을 들이면 그 소음이 일순 멀어진다. 입구에서 성수로 귀를 씻기라도 하는 듯이. 거대한 신성(神性)에 압도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고개를 쳐들고 스테인드글라스를 올려다보기를 거듭하며 걸었다. 입을 채 못 다물고 맨 앞 세 번째 정도 되는 의자에 주르륵 앉은 네 남자는, 이제 보니 영락없는 미물들이었다. 그제야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봉다리가 신경쓰였다. 우린 그걸 옆에 내려놓을 때의 소리조차도 망령될까 조심했다. 그렇게 된다. 선데이 크리스천이던 진수를 빼고는 종교와는 인연이 없던, 실은 신의 존재조차도 고민해본 일이 없던 넷이었다.

그렇게 앉아 있자면 인간의 모든 소리를 누르는 웅장한 음성이 느껴진다. 음성이라기보단 밑에서 내는 소리가 높은 천장으로 울려서 생기는 공명일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만에, 모두가 말을 멈추게 됐다. 미사를 집전하려 촛불을 밝히는 사제들을 그저 바라보았다. 여행 보름을 훌쩍 넘긴 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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