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20. 찾기


우리의 여행을 거칠게 요약하면 세 가지가 남는다. 먼저 걷는 것이다. 낯선 곳을 어지간히 헤매다 보면 발바닥에 통증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관광지를 찾아다닐 때 그랬고, 교통비를 아끼려고 일부러 걷기도 했다. 걷는 걸 좋아하는 나였기에 웬만큼 긴 거리도 걷자고 우기기도 했다. 하루 동안 스마트폰 앱에 찍힌 걸음 수가 2만에서 3만 보에 육박하기도 했다. 그 다음은 먹는 것이었다. 점심에는 거의 햄버거였고 저녁엔 – 주지하다시피 – 요리를 했다.

끼니만 때운 것은 아니었다. 지환이는 맥주를 좋아했고, 진수는 소주를 좋아했다. 동기는 아르바이트 경력 탓에 양주를 잘 알았다. 나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안주를 특히 좋아했다. 모두 음주에 일가견이 있던 우리였기에 식료품을 사면서도 주류 매대를 돌아다녔다. 자연히 ‘걷기’ ‘먹기’에 이은 세 번째 특징과 이어지는데, 그것은 ‘찾기’다.

photo_2017-09-29_13-47-10
photo_2017-09-29_13-47-11

우리는 한국보다 절반은 저렴했던 양주를 즐겨 찾았다. 기껏해야 블랙 라벨이나 12년산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렇다면 이 귀한 술을 무엇과 곁들일 것인가? 그 취향도 주종(酒種)만큼이나 다양했다. 보통 – 역시나 값싼 – 콜라와 먹었지만, 특히 간절했던 것은 고소한 우유였다. 함께 먹으면 덜 취하고, 깔끔하고, 무엇보다 맛있으니까. 문제는 유럽 슈퍼마켓에서 우유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전에 러시아에서 탄산수와 생수를 구별하는 법을 적은 바 있다. ‘유럽에서 우유 찾기’는 뭐랄까, 그 퀘스트의 레벨 업 버전이었다.

미안할 정도로 활짝 웃는 젖소 얼굴이 그려진 종이 팩에, 심지어 ‘MILK’라 적혀 있는 건 – 당연히 – 우유가 맞으리라. 그러나 그 안일한 생각은 이 땅에선 유효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번에 골랐던 것은 시큼하고 걸쭉한 호상 요구르트였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 중 몇이 다음날 아침의 쾌변을 맛보기는 했으나, 그 정도의 값싼 위로는 쌉싸름한 맛을 달래는 고소한 맛을 달랠 수 없었다. 여행을 마칠 때까지 명쾌한 구분법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요행스럽게도 ‘신중히 흔들어 보는 것’ 만으로 꽤 정확한 적중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무료 와이파이를 간절히 좇기도 했다. 휴대폰에 고개를 박고 비밀번호 없이 와이파이를 틀어 놓을 만 한 가게 앞을 서성였던 것이다. 나는 로밍을 해 오지 않았다. 숙소를 예약하러 이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해야 할 때면 항상 친구들의 아이폰을 빌려야 했다. 따라서 내 휴대전화는 사실상 시계 노릇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애물단지가 뜻밖에 공공의 주크박스 역할을 맡기도 했다. 로밍이 먹혀들지 않던 시베리아 횡단열차였기 때문이다.

맘에 드는 노래는 꼭 음원을 모으는 습관이 있었고, 휴대폰은 그 저장고였다. 물론 ‘스트리밍’ 1) 횟수가 ‘멜론 탑 100’의 가늠자요, 곧 인터넷의 화제와 음악 방송 1위의 척도인 시대다. 그래도 나는 음원을 모았고,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CD 플레이어도 없이 음반을 샀다. 남들도 그러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한달 ‘다운로드 이용권’보다 ‘스트리밍 이용권’이 쌌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가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은 이미 나와 달라져 있었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건 아니다. 누구나 좋은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랑스러운 노래에 대한 제일의 대접이 멜론 재생 목록 맨 윗자리 정도라는 건 좀 미안한 일이다.

그런 습관만큼 나의 음악적 취향도 범상하지는 않았다. 그게 말은 그렇지만 그리 특이한 것도 아니다. 마이 앤트 메리 2) 나 나루 3) 가 정말?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협소한 생활반경에서는 누구도 그들을 알지 못했다. 이것이 나의 유년 시절을 뒤틀고 말았다. 남들이 잘 모르는 것을 향유한다는 느낌을 즐겼고, 묘한 ‘마이너 감성’을 내 것인 양 했다. 그것이 한창 심할 때 “가요는 안 들어” 따위의 대사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모두가 나의 우상에 시큰둥하다는 것이기도 했다. 때때로 겪는 실망의 횟수와 비례하는 높이의 벽을 쌓았다. 지금이야 거리낌 없이 ‘가요’를 듣지만, 아직도 이놈의 마이너 ‘근성’이 꿈틀거리곤 한다. 누구에게 내놓지 못하는 설익은 속내를 여전히 쥐고 있다. 이렇게 어리고 찌질하고 궁상맞고 깨지기 쉬운 것이 나의 속내다. 분명한 건 두 가지다. 그걸 달래주는 것이 다름 아닌 음악이라는 것, 그리고 그동안 가슴에 많은 노래가 남았다는 것.

상술했듯 노래는 물리적으로도 남았다. 하드디스크와 휴대폰에 이천 개가 넘는 음원이 담겨 있었다. 숱한 고수들이 비웃을 양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긴 유년기를 함께 보낸 코 묻은 돈이 숱해봤자 예금의 세계에서는 모두 푼돈이 아니었던가. 돼지 저금통에 동전만 담기지는 않는 것이다. 어른의 허전함을 수(數)로는 다할 수 없는 기억이 메우는 법이다. 어쨌든 그렇게, ‘멜론’이 없는 나라에서 ‘가을방학’이나 ‘브로콜리 너마저’같은 밴드의 노래가 침대칸을 채웠다.


  1. 멜론, 엠넷 등 음원 유통 사이트를 이용한 실시간 음원 청취.
  2. My Aunt Mary. 언니네 이발관과 델리 스파이스와 함께 홍대 1세대를 이룬다. 명반으로 꼽히는 3집 <Just Pop>의 이름이 그렇듯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대중적 밴드다.
  3. 본명 강경태. 밴드 솔루션스를 결성하기 전에는 원 맨 밴드로 활동했다. ‘Yet’, ‘무지개’ 등이 좋다.

 

Comment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