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들녘 (1)

가을들녘 (4)

마을 곳곳이 황금물결이다. 예전엔 그림책에서나 볼 수 있던 풍경을 발걸음만 좀 떼면 어디서나 볼 수 있으니 이것도 귀촌이 준 크나큰 선물이겠지. 누렇게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인, 누렇다는 말로는 뭔가 아쉬워 저절로 ‘황금빛’이란 말이 나오게 만드는 풍경. 추수를 갓 앞두고 보이는 논마다 콤바인 들어갈 자리만 깔끔하게 다져놓았다. 저 자리만큼은 사람들이 낫으로 벼를 베더라. 옛날에는 저 많은 벼들을 손으로 다 벴을 터. 마을 곳곳에 펼쳐진 황금 들녘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자니 내 것은 아니지만 무척이나 뿌듯하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게 내 마음이 다 부자가 된 듯하다.

그러다 생각나는 사람들, 소작농들. 제 논은 아닐지라도 뼈 빠지게 온몸 바쳐 한 해 농사를 짓고 추수철이 되면 반 너머 지주에게 바쳐야 했던 서글프고도 애달픈 우리네 조상들. (땅엔 본디 임자가 없는 거인디, 그게 맞는디!) 그네들도 지금 나처럼 벼가 누렇게 익은 논을 바라보며 뿌듯하고 가슴 벅찰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믿고 싶다. 뜨거운 여름 팥죽땀 흘리며 일구어 낸, 자연이 함께 만들어 준 그 기적 같은 열매를 보며 저절로 탄성이 나왔을 거라고. 내 땀 한 방울 보태지 않은 들녘을 보면서 게으른 허당 텃밭 농부인 나도 하물며 이리 감탄이 일어나는데.

소작농과 닮은꼴은 아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다. 논농사는 특히 더. 땅 빌린 값을 ‘도지’라는 이름으로 한 마지기당 쌀 한 가마쯤(곳 따라 사정 따라 아주~ 많이 다름.) 땅 주인한테 내는 걸로 들었다. 내가 천성이 못돼서 그런지 땅 빌려서 농사짓는 건 죽어도 하기 싫었고 지금도 여전하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농사 정식으로 시작하기 싫어서 만들어 낸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요 황금빛 들녘이 참 황홀하게 알흠다운 나머지 남의 땅 빌려서라도 벼농사 지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슬며시 일어난다. 내가 먹을 쌀, 생명을 잇게 해 주는 곡식을 내 손으로 일구고 싶다는, 해마다 이맘때면 주책없이 고개를 내미는 그 헛된 욕망과 함께. 허나, 주제를 알아야지. 아무리 기계가 다 알아서 해 준다지만 논농사에 사람 손이 얼매나 바쁘게 움직이는지 내 눈으로 똑똑허니 봤는디. 요 작은 텃밭농사도 말아먹는 내가 언감생심 벼농사를? 예끼! 꿈도 꾸덜 말아라.

그래도 참말 다행시럽고 고마운 건 나보다 먼저 귀농 귀촌한 많은 이들이 유기농 쌀을 열심히 농사짓고 계신다는 것. 그네들 덕분에 나는 건강한 쌀을 맘껏 살 수 있나니. 서울 살 땐 진짜 아무 쌀이나 막 사서 먹었는데, 여기선 그게 안 된다. 흰쌀도 현미도 콩도 꼭 유기농을 산다. 텃밭 채소 먹다 보니 입이 고급이 된 거라기보단, 힘들게 유기농 농사짓는 분들이 눈에 아른거려 나부터라도 그분들 것 사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가 못하는 그 귀한 일을 해내는 분들이 나는 정말 고맙고 존경스러울 따름이니.

나름 그분들께 고루(?) 기쁨을 주고픈 맘에 올해는 새로운 주문처를 정하였다. 그리곤 참 맴이 뿌듯하였지. 아무래도 나는, 참말 열심히 유기농 짓는 분들께 힘도 보탤 겸, 어설픈 벼농사, 곡식농사 실패담 만들지 말고 앞으로도 주욱 사 먹는 게 낫겠다 싶으다. 서울 살 때도 안 먹던 유기농 곡식을 시골 살면서 지어먹기는커녕 사서 먹는 변명이 쫌 길어져뿟네~~^^

가을들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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