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짧은 소설은 20101월에 어느 웹진에 실렸으나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무제-1

예상은 빗나갔다. 선택형 자살약 바이바이(buy-bye)의 시판이 허용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시판 직후부터 바이바이는 연일 판매량을 갱신했다. 바이바이의 성공은 무엇보다 자살성공률에 따라 세 종류의 제품으로 나누어 판매한 데에 있었다. 각각 성공률 100퍼센트, 75퍼센트, 50퍼센트인 바이바이 삼종은 그 자체로 화제였고, 그 중 성공률 50퍼센트 바이바이가 소비를 주도했다.

‘안녕을 사세요(buy-bye)!’라는 친근한 카피를 내세운 광고도 주효했다. 특히 자살로 생을 마감한 유명 인사들과 비슷하게 생긴 모델들을 내세운 광고의 효과가 컸다. 칼을 든 백인 미녀가 “바이바이가 있었다면 손목을 긋지 않았을 텐데…”라고 한다거나, 고층빌딩 꼭대기에 서서 “바이바이가 있었다면 뛰어내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라고 읊조리는 광고는 바이바이의 장점을 잘 보여줬다. 또 총기자살로 생을 마감한 미국의 유명 뮤지션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가 “바이바이가 있었다면 두개골을 부수지 않아도 되었을 걸…”이라고 중얼대는 광고도 있었다.

기존의 자살 방법들을 대개 참담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장기와 두개골을 파손시키는 방법이나 혈관을 끊어 과다출혈로 죽는 방법, 그리고 물에 뛰어들거나 목을 매 질식사하는 방법들은 심약한 사람들에게는 쉽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체에 심각한 훼손을 남겼다. 제법 낭만적으로 치부되었던 총기자살과 약물자살의 실상은 더욱 참혹했다. 모두 독한 용기가 필요했고, 실패할 확률도 높았으며, 때론 극심한 고통을 동반했다. 병원에서 약물주사를 통해 안락사하는 방법 말고는 자살이라는 동물적 행위 자체가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바이바이의 등장은 이것을 바꿔놓았다. 구매와 복용이 간편하고 일체의 고통이 없음은 물론 약간의 환각효과까지 있었다.

처음엔 바이바이의 처방을 누가 하는지가 문제였다. 의사가 해야 마땅하지만 사실 그들이 바이바이를 처방해준다는 건 스스로에게도 곤란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판허용 때와 마찬가지로 의사 처방이 필요 없는 약품으로 분류되었다. 대신 바이바이 구매자는 ‘채무 및 범죄가 없음’이라는 인증을 받아야 했다. 채무와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한 자살을 막기 위한 사회적(실은 사회를 위한) 안전망이라고들 했다. 또 고속도로 주행 중 바이바이를 복용하고 자살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자 운전 중 바이바이의 복용 및 소지가 금지되어 적지 않은 과태료와 함께 면허취소 등의 강력한 제재 조치가 취해졌다. 방송은 바이바이 복용자에 의하여 무고한 어린이들과 단란한 가족이 처참하게 사망하는 내용의 공익영상을 제작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바이바이 포장에는 ‘어린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하세요’ 등의 경고문구 삽입이 의무화되었다.

논란이 없지는 않았다. 십대들이 나이를 속이고 바이바이를 구입해 자살을 기도하는 일이 잇따르자 어느 칼럼니스트는 ‘죽음을 파는 시대에 고한다!’라는 제목의 제법 비장하고 비판적인 칼럼을 썼고, 각종 단체에서는 안티-바이바이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모 기독교 단체는 ‘바이바이 퇴치를 위한 구국기도회’까지 기획했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자진하여 철회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하지만 바이바이의 판매량은 매달 증가했다. 지하철 선로 사고 급감에 대한 보도와 사회적 비용절감에 대한 논의 등으로 순기능에 대한 인식도 확산되었다. ‘죽음을 파는 시대에 고한다!’를 쓴 칼럼니스트마저 바이바이를 먹고 자살하는 일이 발생하자 바이바이는 트렌드가 되었다(그는 50퍼센트 바이바이를 복용한 것으로 알려져 보다 체험적이고 비판적인 글을 쓰려 했을 것이란 풍문도 있었다). 이어 예쁜 여배우를 커버에 내세운 ‘바이바이와 함께 하는 음악 컬렉션’이 발매되고, 『바이바이를 먹기 전에 꼭 보아야할 책과 영화 20선』, 『바이바이와 떠나는 마지막 여행지 12선』 따위의 책들도 출간되어 적잖이 팔려나갔다.

고양이_기생충_(6)

앞서 지적했듯이 바이바이의 성공 비결은 확률 선택형이라는 데에 있었다. 특히 50퍼센트 바이바이는 자살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자살기도를 통하여 몇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고(예를 들면 어떤 이들에게 슬픔이나 고통을 줘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환기시킨다거나), 실패했을 경우엔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함으로써 다시 생을 시작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었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었다. 50퍼센트 바이바이를 5회에 걸쳐 복용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확률적으로는 가능한 일이라 3회 복용 후 생존자들도 종종 있었지만 5회까지 생존한 그는 특별히 취급되어 명사가 되었다. 제약사는 그에게 사은품으로 75퍼센트 바이바이 10정 구매권을 주었으나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섯 번째로 자살을 기도했을 때에도 그는 50퍼센트 바이바이를 복용했다고 한다. 그는 이 때 사망했다.

이처럼 치사율이 정확한 약을 만들어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제조법도 극비였다. 한때 경쟁사가 바이바이와 유사한 효능의 약품을 개발하여 시판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50퍼센트 바이바이보다 낮은 49퍼센트 자살 알약, 즉 ‘순한 자살’을 판매한다고 하여 전문가들 사이에 때 아닌 논쟁을 일으켰다. 확률이 반 이하라면 자살기도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순한 자살’ 49퍼센트는 좋은 판매 성과를 보였고, 기존의 하얗고 약간 써보이던 바이바이 대신 ‘커피맛’ ‘딸기맛’ ‘쵸코맛’까지 개발하는 열의를 보였다. 이때부터 바이바이의 시장점유율이 감소하였지만, 상황은 의외로 허탈하게 종료되었다.

‘순한 자살’의 실제 성공률이 광고와 달랐던 것이다. ‘순한 자살’ 49퍼센트의 성공률은 시판 초기엔 70퍼센트 정도였음이 드러났고, ‘커피맛’ ‘딸기맛’ ‘쵸코맛’ 개발 이후엔 4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경쟁사는 과장광고 논란에 휩싸였으며 결국 ‘순한 자살’에 전량 리콜이라는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이후 바이바이가 다시 시장을 독점했지만 매출실적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수익증가율도 둔화되었다. 업계에서는 주 고객층 중 상당수가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새로운 소비자층을 만들어 내거나 소량생산과 고가마케팅전략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전망이 어둡다는 분석이 우세했다.

바이바이가 재기를 노리고 있을 무렵, 선거 열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선거 후 주문형 바이바이의 반짝 특수를 기대해고 있을 때 일이 터졌다. 바이바이 제약사의 임직원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이 뉴스가 전해지자 일각에선 드디어 살인죄나 살인방조죄가 적용된다는 예단도 있었지만, 곧 약품 허용 및 시판 과정에서의 불법 로비 혐의임이 알려졌다. 다시 바이바이의 비윤리성에 대한 성토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것이 지난 정권의 유력인사와 정치인들까지 소환되는 정치 스캔들로 발전하자 포커스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이후 바이바이 임직원들에 대한 재판 및 판결은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다만 이 과정에서 바이바이의 공동개발자로 제약사의 핵심임원이었다가 지분 다툼 와중에 밀려난 인사에 의하여 바이바이가 자랑하는 정확한 자살성공률의 비밀이 공개되었다. 그리고 짤막하게 보도되었다.

비법은 간단했다. 가장 중요한 작업은 치사율이 100퍼센트이며 고통 없는 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실험에 성공하자 다음은 쉬웠다. 100퍼센트 바이바이는 모두 이 약을 포장하여 판매했다. 75퍼센트 바이바이는 독약, 그리고 수면제와 환각제를 섞은 무해한 약을 각각 75대 25로 제조하여 판매했고, 50퍼센트 바이바이는 50대 50으로 제조하여 판매했다. 즉 가장 인기 있었던 50퍼센트 바이바이는 100개의 알약이 포장될 때 그 중 50개만 독약이었던 셈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유통금지 이후에도 성행하던 바이바이 암거래는 자연스레 사라졌다.■

(2006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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