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부 마누라 노릇도 아무나 못 하는겨~” 마지막 박 바보처럼 타곤, 흥부전으로 마무리!^^>

박 (1)박 (2)
박 (3)박 (4)

뒤늦게 열린 마지막 박을 땄다. 아직 충분히 익지는 않았지만 서리라도 맞을까 싶어 따야 할 것 같아선. 푸른빛이 어여쁜 길쭉통통한 박을 따면서 어찌나 고맙고 대견하던지. 지난번에 박 말리던 것 거의 곰팡이한테 내어준 아픈 경험이 있는 산골새댁. 그럼에도 다시 박을 말리기로 마음먹는다. 자꾸 해봐야 박 말리는 법을 깨칠 수 있을 듯해서.

전에 딴 박은 껍질이 엄청 단단했는데 얘는 물렁하다. 내 칼질에도 쉽게 반쪽이 나네. 늦게 열려 온전히 익지 못했다는 말이겠지. 호박 속 파내듯이 칼로 박 속을 갈라냈다. 그리곤 그 박 속을 말릴 요량으로 써는데 씨가 어찌나 많은지 씨 빼내느라 시간이 막 흐른다.

박 (5)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심각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박은 호박과 달리 박 속을 먹는 거라고. 그러니 의심 없이 박 속을 썰고 있던 거였다. 그동안 박 손질을 옆지기가 거의 맡았던지라 박 속도 호박 속처럼 긁어내고 남은 살을 먹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분명 옆에서 지켜보기는 했는데 내 머리에선 그 과정이 훌러덩 사라져 버렸다.

박 속을 썰면서 거기 박힌 박씨까지 빼느라고 시간은 하염없이 흐른다. 이상타, 이렇게 시간이 걸릴 일이 아닌데. 점점 짜증이 올라온다. 답답하고 답답한 마음. 다른 일 보던 옆지기가 불쑥 모습을 보이기에 징징대며 하소연을 했다.

“전엔 안 그랬는데 이번엔 왜 이렇게 씨가 많지? 뭔가 이상해, 힘들어 죽겠어~”

그 말을 듣던 옆지기는 기가 막힌 얼굴이다. 박 속 긁어서 버리는 건데 왜 그걸 썰고 있냐면서.

“뭐?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박도 호박처럼 속 파내는 거였어? 어쩐지, 어쩐지..어떻게, 어떻게…나 왜 이렇게 바보지?”

옆지기의 설명에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눈물까지 다 비친다. 더는 칼을 못 들겠는 심정. 나대신 칼 잡은 옆지기께서 십여 분 만에 나머지 일을 싹 마무리했다.

박 (7)박 (6)

정신 좀 차리고 박을 햇볕에 넌다. 박씨 빼느라 고생고생한 박 속, 구멍투성이에 너덜너덜하다. 그래도 끊어지지 않는 걸 보면 박이 참 찰진 성분인 듯. 너덜한 박 옆에 옆지기가 손질한 깨끗 단정한 박이 있다. 하마터면 버릴 뻔한 껍질 가까이 있는 살을 잘 발라낸 모습이다. 그래, 박은 저런 모습이어야지!

작은 박 하나 타면서 시간은 시간대로 걸리고 충격은 충격대로 받고, 마지막 박과 보내는 시간이 참 고생시럽다. 박 따고 타고 할 때만 해도 흥부 마누라라도 되는 듯 흥겨웠는데 박 썰고 널고 하면선 바보 같은 내 모습이 지독히 한심스러워 한숨이 절로 난다.

‘에공, 흥부 마누라 노릇도 아무나 못하는갑다.’

아무리 못나게 했어도 마지막 박을 탔는데 뭔가 기념이 될 만한 일은 하고 싶다. 박 타기 하면 떠오르는 책, 흥부전이나 잠깐 거들떠볼까. 스르륵 책장을 넘기다 한 장면에서 눈길이 딱 멈춘다. 쌀 구하러 나간 흥부가, 쌀은 못 얻었으나 김부자 매를 대신 맞기로 하곤 서른 냥을 받기로 한다.

“여보 마누라, 거적문을 여시오. 읍내 한번 갔다 오니 돈 서른 냥이 뚝 떨어졌구려.”

흥부가 싱글벙글 웃으며 던지는 이 말을 듣곤 흥부 안해가 한다는 말.

“아무래도 길에서 주웠나본데, 돈 잃은 사람이 얼마나 애가 타겠소? 여보 아이아버지. 주운 곳으로 곧장 가서 돈 임자가 나서거든 도로 주고 오오. 고맙다고 행여 한 냥쯤 주면 고맙고. 그것이 바른 일이니 어서 가서 찾아 주오.”

흥부 안해의 이 말을 눈으로 읽으며 난 그만 가슴이 찌르르했다. 자식새끼들 다 굶어죽게 생긴 마당에 주운 돈쯤 쓴다고 죄될 일도 아닐 성싶은데 저리도 올곧은 소리를 하다니! 진정한 성인의 모습, 바로 흥부 마누라였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면 저리 못했을 거다. 흥부 안해 처지였든 지금 처지이든. 너무나 정직하고 순수하고 올바른 흥부 안해를 보면서 다시 또 올라오는 생각. 이번에는 한숨이 아니라 깊은 감동과 함께.

‘흥부 마누라 노릇, 아무나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암, 그렇고말고~^^’

박 때문에 속상했던 마음이 흥부전을 보면서, 미처 몰랐던 흥부 안해의 정직한 마음을 만나면서 싹 풀렸다. 그리고 다짐했다. 아무리 배고파도 흥부 마누라처럼 정직하고 올곧은 사람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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