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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는 스물일곱 개의 다리가 있다. 누군가 한강을 – 어떻게든 – 내려다본다면 그 많은 대교(大橋) 중 하나 눈에 뜨이는 것이 있으리라. 북단의 연결 도로가 없어 목이 잘린 모양의, 동작대교다.

강북에서 동작대교를 진입하려면 보통 이촌동을 지나야 한다. 사는 사람은 많지만 조용하고 한적해 별 사건이 없는 동네다. 중년의 고관들이나 그들과 비슷한 나이의 연예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까닭이다. 서울에서 강남 3구와 함께 전직 대통령을 가장 많이 뽑아준 곳이다. 그건 그 아버지의 신화가 낳은 그녀의 가장된 신성성을 진지하게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저 부동(不動)하며 안정을 좇는 중산층 이상의 보수적 본능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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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현이나 청담과는 또 다른 분위기지만, 어쨌든 평범한 동네들 같지는 않다. 부인네들이 한가한 낮에 모여 차를 마시는 곳은 ‘파리 바게트’보다는 ‘파리 크로아상’이며, 밤에는 호프집보다 ‘이자까야’ 같은 고급 술집들에서 소주가 아닌 사케로 회동한다. 대교 남단에서 자주 나타나던 퍼런 잠바떼기의 아저씨들은 자취가 없고 반테나 무테의 안경을 한 직장인들이 가끔 보인다. 내일도 입을 기지바지에 국물이라도 튀면 큰일이니, 안주는 참치 오도로나 새우머리 아니면 치킨 가라아게일 것이다.

이들의 대화를 엿들어보면 몇 년 전 용산 택지 개발이 좌절된 것을 매우 한스러워한다. 그래서 현직 시장을 극히 싫어한다. 놀라운 것은 그의 탈모나 노안을 흉보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거 참 교양인의 풍모가 흐르는 동네로다. 조금 가벼운 이야기도 흐른다. 최근 교체된 에어컨 수리기사를 둘러싼 풍문이 심심찮다. 듣자하니 한강맨션을 사이에 두고 리버스위트와 자이의 담당이 다른 인물인 것 같다. 전자는 큰 키에 까무잡잡하고, 후자는 쌍꺼풀이 진하고 가슴이 탄탄하다. 분명 유니폼 밑에 있었을 가슴의 단단함을 어떻게 아는지 모를 일이지만, 눌러봤나, 하여간, 그렇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이 중학생 이상 청소년의 부모이기도 하다. 중경고등학교와 용산고등학교의 면학 분위기를 종종 비교하며, 드물게 있는 강 건너 동덕여고의 학부모는 어쩐지 한숨이 잦다. 꽤나 투자를 하는 학부형들이라 국어나 사회탐구처럼 희귀한 과목까지 과외선생을 고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여 나 같은 대학생이 조금이라도 편히 벌어먹게 된 건 실로 감읍할 일이나, 때로는 ‘죄송하지만 주말 아침에 수업을 좀’ 해 달라는 요구를 감내해야 한다.

아니 대체 어느 선생이 토요일 아침 여덟 시에 수업을 합니까, 라고 대거리를 해 보길 상상하지만 소용없다. 어느 선생이 하긴, 내가 하지. 글쎄 고려대는 내년부터 여덟시 반에 일교시를 한대요, 어제 별안간 걸려온 전화에서 어머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나의 주말을 망치길 수차례. 그러나 항상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럼요”를 날렸던 것이 자괴감을 낳는다. 거의 매번 이런 식이어서, 가끔은 내 성질이 원래 이런가 싶기도 하다. 알고 보면 벌어먹는 것과 빌어먹는 것은 획 하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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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이남에서 동작대교를 향한다면 남태령부터 쭉 이어져 사당역을 거치는 대로(大路), 한강을 앞에 두고 갈라지는 이수교차로를 거친다. 복잡한 교통체증이 거의 24시간 내내 있다. 여기서는 버스든 승용차든 강북에서 볼 일을 보고 사당을 거쳐 서울을 빠져나가려 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해서, 아무튼 매일 굉장한 소음을 유발한다. 근처에서 뭔가 끼니를 때우려 보면 패스트푸드나 프랜차이즈 카페, 해물이나 김치찌개 따위를 안주로 하는 포차, 그도 아니면 평범해 보이는 호프집이 눈에 띈다. 일식은 사시미보다 스끼다시가 찐하게 깔리는 보급형 횟집에서 맛볼 수 있다. 이수에서 사당에 이르는 대개의 식당은 일견 ‘그럭저럭’인 것이다. 그것은 여기를 지나는 많은 사람들이 거의가 주민이기보다는 스쳐가는 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르자면 ‘뜨내기’가 되겠다.

사실 여기의 밋밋해 보이는 숱한 밥집들은 제법 요리를 하는 편이다. 사당역 10번 출구에 접한 골목에는 서울 시내 3대 김치찌개집 중 하나가 있고, 알고 보면 그 가게는 한강 이남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전집을 수줍게 마주보고 있다. 뿐이랴, 경문고등학교 뒷골목의 어느 선어횟집은 유독 덴뿌라의 맛이 절륜해 역대 동작구청장들이 즐겨 찾은 곳이다. 김밥만 취급하는 태평백화점 뒤의 노포도 명물이다. 아침에 정복을 입은 자들이 가끔 줄을 서는데, 방금 당직이 끝난 방배경찰서 경사들이다. 시립미술관 근처로 가면 포항 연근해에서 잡아 올린 산오징어를 시가로 내놓는 술집도 식객을 끈다. 일설에는 영일만에 매일 방류되는 포항제철의 쇳물이 오징어에 철분을 더하므로 빈혈에 매우 좋다고 한다. 아무튼, 보기보다 만만한 동네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이곳의 뜨내기들이란 지방 버스터미널 앞의, 무슨 ‘전주 식당’ ‘마산 식당’처럼 쓸데없이 차림표만 넉넉한 허접한 밥집에서 아침을 때우는 순진한 뜨내기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여기서 매일같이 출퇴근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아니 ‘보낸다’기에는 그 표현이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어서, 그 하루하루를 ‘치러낸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그들의 구성을 정밀히 알 수 있는 통계는 물론 없다. 당연히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있겠다. 통계조사를 지시할 만 한 높은 사람들 중 아무도 그 비루한 인생들엔 흥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 또는 전자의 이유가 후자의 훌륭한 변명이 되는 까닭도 있겠다. 어쨌든 매일 아침 남태령에서 삼십분을 길바닥에 내버리고 오는 사람들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서울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수원이나 군포나 의왕 따위의 위성도시들로 밀려난 중년들이 어림잡아 절반쯤 된다. 기왕 삶터가 옮았으니 일터도 그랬다면 좋았겠으나 그들이 서울을 나설 때쯤에는 이미 재취업이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구직(곧 실업)에는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었고, 그것을 대신 평생에 걸쳐 출퇴근 시간으로 나누어 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서울로 통학하는 대학생들이 또 그 절반쯤을 차지한다. 항상 잠이 부족하기에 그들은 서울 시계(市界)를 넘을 때쯤이면 이미 잠들어있고, 이곳에 도착할 때는 렘수면에서 갓 깨어나게 된다. 이런 모습으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다시 갈아타야 한다. 청년들 어디 갔냐고, 다 중동에 갔다고… 아니다. 알고 보면 다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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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입석 없이 마흔 다섯을 꽉 채웠다. 그리고 사당역에서 우리를 남김없이 토해낸다. 문이 열리자마자 예의 좆같은 얼굴로 쏟아진 승객들은 남태령 내리막이 지났다 싶으면 버스가 서기도 전에 일찌감치 앞문으로 몰려들고는 한다. 토요일 아침에 대체 어디들 가는지 싶지만, 그 생각에 앞서 몸 어딘가에 덜 소화된 부추나 미역줄기가 섞인 점액이 묻어있지는 않은가 확인한다. 그런 건 물론 없지만 검은 티셔츠에 마른 침이 굳어있는 일은 잦다.

주말 오전이 어그러진 김에 이른 강바람을 맞기로 했다. 심통이 나면, 걷는다. ‘복잡할 때마다 무진을 찾았다’처럼 멋들어진 어감은 어쩐지 만들어지지 않는 지명이지만, 그렇다고 레몬사탕이나 깨물고 있으려면 더 답답해지는 것이니까. 일곱 시, 이 계절 평균보다 습한, 한강 유역에 적(籍)을 둔 국지(局地)풍이 느껴진다. 동작역을 가로지르면 서쪽 보행로에 오르게 된다. 파란 강물이 여의도를 비껴 흐른다. 장마가 지면 누런 탁류(濁流)가 될 것이다. 팔짱을 난간에 얹고 망연히 그것을 본다. 등허리 땀이 마를 때 쯤 발을 뗀다. 행선지는, 에펠 탑은 아니고, 동부이촌동이었다.


파리 넷째 날, 폭우가 쏟아졌다. 베르사유 궁을 방문하자던 계획이 모두 씻겨 내려갔다. 우리는 모두 어떤 안도감과 함께 늦잠으로 빠져들었다. 발렌타인 양주의 숙취가 가시지 않은 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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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에 – 보통은 구름에 거의 가려지지만 – 뜨도록 넉넉히 잠을 자고 나니,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그래 뭐 하루 이틀인가. 숙취는 옅어졌지만, 새벽에 다 떼었어야 할 갈증이 셌다. 5리터짜리 생수를 꺼냈다. 파리에 온 첫날 샀던 것이다. 유럽에선 대형마트는 물론 슈퍼마켓에서도 이만한 생수를 팔고 있다. 한국에서는 매실청 같은 것을 담는, 손바닥만 한 병뚜껑의 그 플라스틱 통이다. 간신히 뚜껑을 열고 들이부으니 얼굴에 한 줌이 쏟아졌다. 수돗물을 믿기 어려운 서유럽 상수도 사정의 나비효과였다.

빨래를 걷었다. 라디에이터에가 밤새 돌아간 데다 늦잠을 잔 통에 양말이며 속옷이 바싹 말랐다. 마룻바닥은 반대였다. 습한 겨울은 눅눅하다 마르기를 거듭했고, 걸을 때마다 삐걱댔던 것이다. 새벽에 깨어 빨래를 걷으러 갈 때면 친구들이 깨지 않을까 조심해야 했다. 그러다 벌어진 틈에 앞꿈치가 걸려 허우적대기를 몇 번 했다. 어젯밤 돌려놓고 잠든 빨래는 가루비누를 조금 넣고 한 번 더 돌렸다. 그렇게 아침이었다. 오전 열한시를 아침으로 쳐 준다면.

파리에 있은 내내 흐른 일상은 그런 것이었다. 다들 부스스 일어나면 누구는 여자친구와 전화(‘보이스톡’)을 했고 누구는 누워서 휴대폰을 만졌다. 가장 부지런한 녀석이 제일 먼저 씻었다. 물을 틀고 나서야 삼 일째부터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산책을 나섰다. 애인은 없고, 씻기는 귀찮고, 세탁이 끝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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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셰호브 가의 신호등은 성질이 급했다. 그 횡단보도를 몇 개 건너고, 길을 잃지 않으려 뒤를 몇 번 돌아보았다. 역시나 이 시간까지도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침에 생긴 물웅덩이는 밟든 말든, 이었다. 길거리 상점의 주인들이 가끔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처마를 접었다.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강아지와 활보하기도 했다. 야채 가게 아저씨는 가판에 덮어둔 비닐을 걷었다. 비닐이 너무 커서 힘겨워하기에 손을 보탰다. 둘째 날 갔던지라 안면이 있었다. 들어가 보니 채소보다 많은 맥주 종류에 놀랐었다. 그날 계산을 마쳤을 때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메르시’와 ‘따봉’으로 헤어졌다. 울퉁불퉁한 파리의 길바닥은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서울의 어느 골목과 또렷한 차이는 없었던 것 같다. 신호등만 빼면 나른하고 여유로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그 하루도 어영부영 갔다. 파리를 떠나기 전날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것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사당동이나 방배동처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을까? 서울바닥이든 파리 17구든 나의 신분이 이방인이라는 것은 다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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