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22] 안녕 파리


18km. 그것이 나의 생활’반경’이다. 서울 중심부의 학교에서 경기도 남부의 집까지의 직경이 딱 36km. 반지름과 원주각이 재어지는 원의 중심은 서울시계에 못 미치는, 아마 과천쯤, 어딘가일테지만 교통공학적 정가운데는 다른 곳에 있다. 서울역. 나의 통학수단은 버스도 지하철 이전에 기차이기 때문이다.

사대문 밖에 살면서도 그 안을 들락거려야만 살 수 있던 사람들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 때 서울의 관문은 남대문이었고, 서울역은 남대문 바로 앞에 있으니 그럴듯하다. 물론 요새는 호패가 아니라 티켓을 검사하고, 어깻죽지에는 봇짐 대신 백팩이 메여 있을 것이다.

일곱시 반에 출발하는 평일 무궁화에선 기름내 나는 객차간 통로에 몸을 구겨야 한다. 그래도 영등포역 다음부터는 십 분짜리 착석이 가능하다. PDA를 들고 다니는 여객전무들도 그쯤에서는 눈을 감아주고, 노량진을 지나서는 한강물이나마 구경할 수 있다. 진행 방향 방면의 왼쪽에 앉는 것이 좋다. 한강철교의 트러스에 시야가 덜 가려지기 때문이다.

이 구간에서 기차는 (문서상) 평등한 수단이다. 쾌속 KTX를 타든 디젤 무궁화를 타든 걸리는 시간은 딱 삼십 분이다. 물론 KTX를 먼저 보내주느라 시흥 근처에서 서행을 하는 일이 잦지만 어쩌랴. 한강 전에 안양천이라도.

그 지연시간을 생각해 조금 일찍 기차를 타면 그때는 또 얄궂게 시간이 남는다. 그럼 계획에 없던 아침을 먹게 된다. 플랫폼을 올라오면 바로 보이는 맥도날드가 보통이다. 나 같은 사람이 숱한 까닭에 어느 시간에 가도 사람이 꽉 차 있다.


언젠가부터 그곳엔 키오스크란 것이 생겼다. 터치 몇 번으로 간단히 주문부터 결제를 할 수 있다. 손님은 모니터를 확인하고 트레이를 받아가면 된다. 현금으로 계산할 때만 카운터에 가면 된다. 이런 편리한 물건이 여러 대 들어왔다. 요새는 프랜차이즈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지점에 설치되었다.

ka6_619_i1

더러는 곧장 카운터를 향하는 손님들이 있다. 이런 이들에게 점원들이 ‘주문은 왼쪽 키오스크를 이용해달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다. 웃기는 일이다. 모든 이가 ‘왼쪽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는 날이 오면 당장 다음 주에 잘릴 사람은 누구일까? 원동기 면허 소지자도 널렸고, 햄버거 만드는 파트타임은 이미 꽉 찼을 텐데.

두 세기 전 영국에서 망치로 방직기를 때려부수던 이들이 있었다. 이른바 러다이트 운동이었다.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누구는 그걸 운동이라고 부를 것이고, 누군가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미련한 일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이백 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은 저렇다. 가치판단과 별개로 좀 허무한 것이 아닌가, 저 가련한 아르바이트생을 보면. 생존을 위협하는 무언가에 이렇게 무기력한 동물이 있었던가? 운석이 떨어지던 날 공룡들은 마지막으로 악다구니라도 쓰지 않았겠는가?

생각해보면 인류는 이백년 동안 순종하는 개체로 변한 모양이다. 그게 세대를 거치며 진화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꾸준히 정맥주사라도 놓고 있는 것인지. 그런 생각을 하면 더러는 살찐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핏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가가 비싼 파리에서는 내내 햄버거로 점심을 때웠다. 물론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무튼, 그래도 관광인데 좀 있어 보이는 식당 앞에서 가격을 훔쳐보기도 했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야 여기는 ‘너무(순화한 표현이다)’ 레스토랑인데?” “여기는 ‘진짜 너무’ 레스토랑인데?” ‘너무 레스토랑’의 기준은 한 사람당 15유로였던 것 같다. 몇 블럭을 이러다 보면 다들 맥도날드나 KFC가 그래도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것을 인정했다.

모두 주문조차도 변변치 못한 불어 실력이었기에, 우리는 그 중에서도 이미 파리에서는 보편화되었던 키오스크가 있는 가게를 찾았다. 감자튀김에 치즈를 얹어도 음료만은 다이어트 콜라를 시켰다. 의외로 어리벙벙한 관광객들에게는 아주 부담 없는 물건이 키오스크였다. 쟁반을 받아올 때 ‘메르시~’만 붙이면 되었기 때문이다.

22-1 22-2

그 트레이를 내어주는 점원의 얼굴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파리를 떠나던 날 아침이 기억을 다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에나 보았던 파란 하늘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산뜻하고 시원한 오전이었던 것이다. 태양은 여름에나 내비치는 그 쨍한 본색을 살며시 보였다. 어느 바다에서 출발했을 바람이 앞머리를 들썩였지만 그마저도 쾌(快)했다.

비가 와서 무용지물이었던 발코니의 매력을 그제야 깨달았고, 우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저 어딘가에서 공기가 내렸다. 알고 보면 맑은 날에도 무언가는 떨어지는 것이고, 내민 얼굴이 지표보다 먼저 그 서늘함을 만났다. 해가 뜨고 땅이 달구어지고 나서도 그 유통기한은 계속될 것이었다. 2월 초의 유럽에서 계절은 뜻밖에 명도(明度)의 지렛대를 끝까지 당기고 있었다.

이르쿠츠크에서는 성가셨던 캐리어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귀신같은 여우비가 왔지만, 그래도 하늘은 푸른색이었다. 우리를 별로 기다리지는 않을 것 같은 또 다른 낯선 곳, 프라하로 떠나던 날이었다.

 

Comment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