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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23]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분명 다 읽기는 읽었는데 기억이 흐리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배경에 아마 프라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소설은 어느 여름 언젠가, 잘 해보려던 이성이 좋아한 책이었다. 두 번째 데이트 전전날(이던가)에 그녀는 메신저의 상태 메시지를 ‘Einmal ist keinmal’로 바꾸었더랬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이 문장의 출처는 밀란 쿤데라가 썼다는 불멸의 걸작이었던 것이다. 세상의 검색엔진들은 대단히 친절했다. 당시 나는 긴 연애가 오래되어 몸이 한껏 단 이십대 남성이면서도, 21세기 정보기술의 발전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첫 데이트는 성공적이었다. 아니, 성질을 나타내는 일본식 조어(적, 的)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문자 그대로의 ‘성공’이었고, 그 증거들이 여럿 있지만 여기서는 얘기하지 않도록 하자. 그러나 어쨌든, 암, 한 번뿐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 나는 그 상태 메시지를 무슨 동유럽 제일가는 대문호의 선지처럼 느꼈던 것 같다. 물론 온갖 징후에 의미를 다 부여하고 머리를 싸매다가 일을 그르친 경우도 많지만, 그 또한 여기서는 얘기하지 않도록 하자.

다행히 책 한 권을 살 돈은 있었고, 다음날 아침 곧장 서점으로 갔다. 소설은 생각보다 훨씬 두꺼웠다. 속독에 대한 가장 자신 있는 기억은 아서 밀러의 <시련>이었다. 정확히 시간을 재진 않았지만 단숨에 금방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종이로 보면 두 배쯤 되었으니, 하루사이에 다 읽기는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그건 희곡이었고 이때는 빽빽한 소설이었던 데다 다소 관념적인 대사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이며 ‘영원회귀’란 한 번 읽고서는 얼른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들이었다. 더러는 책장을 다시 넘겨가며 틈틈이 카톡에 답장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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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반쯤 읽었을 때, 단념이 빠른 습성이 발목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얘는 이걸 다 알고 읽은 건가? 싶어 의외라는 생각도 들었다. 카탈로니아 찬가나 사람의 아들을 좋아했으면 안 되었던 거니, 한 권당 한 시간은 얘기할 수 있는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것 외에는 읽은 책이 짧은 나를 탓해야 했다. 무엇보다 회한으로 점철된 지난 연애사는 좀 그만 두고 싶었다. 그런데다 학교니 동아리니 재수학원이니, 가끔은 같은 교양수업이니 하는 ‘폐쇄된 집단’ 밖에서 탔던 오랜만의 ‘썸’이었다.

이제는 덜 낯간지럽고 덜 애타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애쓰지 않아도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그런 것. 애닳는 격정도 좋지만 편안한 일상 같은 것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어떤 불편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 이른바 ‘밀당’같은 것이다. 그건 서로에게 얼마만큼을 양보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량의 감정을 소모할 만큼 그를 좋아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과정이기도 하다.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그 과정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잡아먹을지는 알 수 없다. 사람에 따라 다르다. 다만 그 알고리즘 끝에는 공통된 마지막 질문이 있다. ‘(이런저런 불편에도 불구하고)괜찮은가?’ 물론 이것 역시 개개의 성향에 따라 ‘~좋은가?’ ‘~사랑하는가?’ ‘~행복할 것 같은가?’ ‘~친구들 앞에서 자랑할 수 있나?’ 따위로 변주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어느 날 만나온 날짜를 세기 시작하는 것-오늘부터 1일-과는 또 다르다. 연애는 그 긴 알고리즘이 끝나기도 전에 시작되기도 한다. 겉보기에 평안한 커플이라도 데이트가 끝날 무렵 ‘우리 사귀는 거 맞아?’ 같은 질문이 나오는 것은 그래서다.

어쨌든 다음날, 데이트는 전시회와 식사와 술을 거쳤다. 그러는 동안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화두가 자연히 옮아가도록 했지만, 소설 이야기는 역시나 피상에 그쳤다. 아는 체와 맞장구를 몇 번 하다 다시 체코와 프라하에 대한 기억으로 이야기가 흐르게 했다. 해외여행의 경험은 이미 흔했고, 그녀 역시 언젠가 프라하에 있었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할 말을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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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프라하 성에서 내려다본 시내]

 

한국인의 비율을 따지자면 안국동이라도 이상하지 않을 프라하 성의 스타벅스, 그리고 거기서 내려다본 빨간 지붕들, 차라리 샹젤리제 거리보다도 넓었던 바츨라프 광장, 프라하 관광객이라면 모두 간다는 카를 교, 몽쥬 약국처럼 한국어가 많이 들리던 어느 화장품 가게… 말고는 더 얘기할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얘깃거리를 찾기는 했다. 어깨를 부딪친 행인에게서 체코어가 아닌 ‘죄송합니다’를 들었다거나 세그웨이를 공짜로 태워준다던 호객꾼들을 마주친 에피소드가 있었다. 붉은 광장에서는 비둘기에 꼼짝없이 당하고 파리에서는 성질을 부려서야 빠져나왔다면, 이때는 “Sorry, but we have foot”이라며 이죽거렸던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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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프라하 국립박물관 앞의 십자가. 건너편이 바로 바츨라프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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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소련군의 침공에 저항해 분신한 얀 팔라흐(Jan Palach)를 기념하는 벽화. 십자가 근처 주택가에 있다. 옆의 인물은 1949년 성모 마리아 승천일에 있던 기적(Číhošť Miracle, 예배당의 십자가가 스스로 움직였다고 한다)을 세상에 알린 신부 Josef Toufar. 이후 체코 정부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과 함께 본인이 기적을 조작했다는 자백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체코의 민주화 이후 복권되었다]


프라하 얘기를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나는 마지막으로 광장 초입의 바닥에 몸을 뉘인 십자가를 이야기했다. 1968년 프라하에 있던 짧은 봄을 소련군의 탱크가 짓밟았을 때 몸을 불사른 청년들을 기리는 것이다. 우리 숙소 바로 앞에 있던 것이라 체류하는 동안 매일 보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지나간 역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 뒤로 그녀와 몇 주를 만났지만, 여름이 지나고 학기가 다시 시작될 즈음 우리는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많은 것이 달랐고, 그것을 감수하기 위한 과정을 나는 여느 만남에서처럼 피곤해했다. 우리의 관계를 정의하려 할 때는 항상 대답하지 않았었다. 나는 연애의 알고리즘에 대한 환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그때의 감정은 옅어졌다. 그런 감정이 고파질 때는 다른 이와의 관계를 시작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그러고 나자 그 말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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