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열풍에 관한 논의가 투기 규제 문제와 블록체인의 기술 가치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현행 화폐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 논의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전후 자본주의를 ‘성장 기계’로 비유한다면 현행 화폐 제도는 그 엔진이라고 할 수 있다. 장기 ‘저성장’ 시대에 들어섰다는 최근의 진단이 유효하다면, 고장 난 성장 기계에 최적화된 엔진으로서 현행 화폐 제도에 대한 대안을 진지하게 모색해볼 시기인 것이다.

법정화폐의 발행권은 국가가 보유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이보다 더 흔한 오해는 화폐 발권력을 중앙은행이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본원화폐에 대해서만 타당하다. M2(광의의 통화)를 기준으로 했을 때 2016년 2342.6조원의 통화량 중에서 본원통화는 137.4조원으로 5.9%에 불과하다. 나머지 94.1%는 은행을 중심으로 한 민간 금융기관이 공급하는 신용화폐이다.


민간 금융기관이 신용화폐를 거의 자유롭게 찍어낼 수 있는 시스템은 부분지급준비금 제도에 의해 뒷받침된다. 핵심은 은행이 고객이 맡긴 예금을 자신의 자본처럼 활용해 한국은행이 발행한 본원화폐의 열 배, 스무 배에 이르는 신용화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금융기관에 부채를 지렛대로 예대 마진 등의 영업 특혜를 부여하는 이 시스템은 시장경제의 원리에 비춰볼 때 어리둥절한 사태다. 2008년 전체 경제의 붕괴 위기를 겪은 아이슬란드가 통화제도 혁신 노력의 일환으로 2015년에 작성한 ‘아이슬란드를 위한 더 나은 통화 시스템’이라는 보고서는 이 사태를 이해하기 위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보고서는 부분지급준비금 제도에 기초한 신용화폐 시스템이 은행들에 과도하게 많은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력과 동기를 부여해 중앙은행의 통화량 조절 능력을 제한하며, 이로 인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포함한 주기적인 인플레이션, 가계와 공공부문 부채의 지속적인 증가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이 시스템은 또한 상업은행들이 경기 전망이 긍정적일 때 대출을 자유롭게 늘려 통화량을 빠른 속도로 증가시키지만 경제 상황이 안 좋을 때는 반대로 통화량 증가 속도를 늦추거나 심지어 축소시킨다. 신용화폐 자체가 기준금리나 지급준비율제도 등 중앙은행의 통화량 조절 수단 역시 무력화하는 힘이라는 것은 실증 데이터로도 어느 정도 입증된다. 1986년부터 2006년까지 아이슬란드의 국내총생산(GDP)은 연평균 3.2% 성장한 데 비해 상업은행의 통화 공급은 연평균 18.6% 증가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9년부터 2016년까지 7년 동안 지디피는 연평균 약 3.5% 성장했지만 M2 기준 통화량은 약 6.5% 증가했다.

은행이 발권력을 통한 시뇨리지(화폐발행이득)를 누리는 구조에서는 전체 통화 시스템이 경제성장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동학이 작동한다. 은행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늘 신용화폐 공급 확대를 도모하고, 이는 가계부채의 지속적 증가와 자산 버블(거품)로 이어진다. 한국의 부동산 지대경제를 유지·확대하려는 이해관계가 현행 통화 시스템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버블의 붕괴로 인한 금융기관의 경영 위기를 전체 경제의 붕괴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국민 세금으로 구제했던 것이 지금까지의 금융위기의 반복된 역사였다.


아이슬란드의 보고서는 신용화폐의 대안으로 ‘주권화폐’를 내놓았다. 스위스에서도 주권화폐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국민투표 발의가 10만 시민의 서명 요건을 충족해 2019년 안에 투표가 실시된다. 주권화폐의 핵심은 화폐 발행권을 민간 금융기관에서 온전히 국가 공동체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물론 신용화폐의 핵심 제도인 부분지급준비금 제도는 전액지급준비금 제도로 전환된다. 신용화폐가 사라진다는 것이고, 이는 그 문제점들도 제거된다는 것이다.

주화 발행권이 왕에게 있던 시절, 왕들은 금화의 순도를 낮추는 방법으로 주화의 일정 가치를 훔치곤 했다. 민간 금융기관이 사실상의 통화 발행권을 갖는 지금의 시스템에서 은행이 누리는 시뇨리지는 국민경제와 가난한 사람들과 소비자들의 이익과 적대관계에 놓인다. 화폐 발권력을 민주화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안이고, 따라서 가상화폐보다 주권화폐가 진지하게 논의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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