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를 연재하고 있는 이용규님의 단편 소설 「레시피 」를 上, 下 편으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초여름에서 겨울까지, 엄마를 떠나보내는 시간을 담담하고 따스한 시선으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엄마의 삶은 소담하지만 맛있고, 비슷한 듯 하지만 저마다 다른 내용을 품고 있는 레시피처럼 그렇게 ‘나’에게 아로새겨집니다. 천천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편집자주-

▶ 레시피 上 : http://2-um.kr/archives/5071

 


4.

 

 

여름은 무섭게 무르익었다. 중복을 지날 무렵 장마가 지고 있었다. 주부들에게는 채소 값이 올라 달갑지 않은 나날이다. 함께 장을 보던 어느 날, 한 봉지에 천오백 원 하던 상추가 삼천오백 원이 돼 있었다. 우리는 그냥 외식을 하기로 했다. 삼계탕을 먹었다. 한참을 먹었을 때 엄마는 조용히 뼈만 바르고 있었다. 나는 거의 다 해치운 닭을 엄마는 거의 먹지 않았다.

 

“이것도 너 먹어라.”

 

엄마는 뚝배기를 나에게 밀었다. 마주앉은 테이블 가운데에 깍두기와 김치가 있었고, 거의 뜯기지 않은 삼계탕 그릇이 그 옆에 마중을 나왔다. 나는 닭다리를 집었다. 그러니까 세 개 째였다. 너무 많이 삶겨 뼈가 금방 발렸다.

 

“왜 안 드셔.”

“엄마는 원래 물에 빠진 거 안 좋아하잖아.”

 

나는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 ‘아 맞다’, 아니면 ‘아 정말’?

 

“그런가?”

 

엄마는 피식 웃었다.

 

“닭을… 잘, 안 먹던가? …엄마가?”

“치킨 시키면 몇 조각 잘 먹잖아. 닭도리탕같은 것도 잘 먹는데, 이상하게 백숙같은 건 잘 안 먹혀. 물에 빠진 건 별로더라구. 엄마는 삼계탕 안 좋아해.”

 

나는 엄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시험을 본다면 분명 낙제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벼락치기를 할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우리는 자리를 뜨기 전에 빈 그릇을 모두 포갰다. 먹다 남긴 김치, 고추와 양파 따위의 밑반찬을 한 데 모으고 국물이 떨어진 것은 휴지로 닦았다. 오래 식당 일을 한 엄마의 버릇이었다. 직원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것이었다.

 

“그거 섞지 마요!”

 

한데 우리가 일어나기도 전에 쟁반을 옆구리에 낀 직원이 달려왔다. 체구가 작고 머리를 묶은 아주머니였다. 아마 반찬을 재활용하는 식당이었을 것이다.

 

“먹다 남은 것을 다시 쓰면 안 되죠.”

 

엄마는 날카롭게 묻다가 말을 멈췄다. 중국인이 한국말을 하는 억양이었다. 근처에서 유명해 사람이 많았던 가게였고, 이런 곳에서 서빙을 하는 직원은 백이면 백 중국인 아주머니였다. 외국인 노동자의 군색한 처지를 악용한 요식업계 전반의 흐름이었다. 주방 일에서 고난이도에 속하는 조리와 설거지는 한국인이 도맡는다. 대신 월급이 – 그럭저럭 – 높다. 하지만 ‘홀’ 만큼은, 그러니까 덜 어렵고 주문을 받을 만큼의 말만 통하면 되는 일에는 조선족 여성들을 박봉에 썼다. 엄마는 그런 이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고, 연민했다.

 

“사장님이…”

 

그녀는 저희 식당 방침이에요, 따위의 정제된 말을 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직원은 그제야 우리가 정리해놓은 식탁을 보고 얼굴이 빨개졌다. 들고 온 쟁반에 그릇을 옮기기만 하면 됐다. 엄마는 눈도 안 마주치고 이렇게 눙쳤다.

 

“여긴 구루마도 없어요?”

 


5.

 

 

고등학교 때까지 농구를 했던 엄마는 175센티의 장신이었다. 신장으로 줄을 세우자면 60년 쥐띠 여자 중에선 맨 뒤에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시나브로 야위었다. 그럴수록 나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엄마는 앞으로 지난 육십 년 동안 체득한 모든 것을 전수해야 했다. 될 수 있을 만큼 많은 말을 전했다. 진단을 받고 두 달이 될 무렵 우리는 고등어조림을 먹었다.

 

“…우리 집은 오븐이 없잖아, 그러니까 생선을 구울 때는 밀가루를 발라야 눌러붙질 않어.”

“하나 사면 되지 왜.”

“아이구 끝이 없어 사려면. 아무튼 삼치랑 고등어 같은 건 손질할 게 없어, 마트에 가면 토막 난 걸 파니까 그걸 사서 꼬리만 잘라 버리면 돼. 소금간만 간간하게 하고.”

“동태는 어떻게 해?”

“동태? 동태찌개 해 먹을 때는 지느러미랑 수염 있지? 그걸 가위로 잘라내야 먹을 때 편하고 비린내도 가셔. 그리고 알이랑 곤이는 다 먹어도 되는데, 요렇게 잘 보면 파란 쓸개가 있어. 그거는 긁어서 버려야 써. 제대로 해 먹으려면 미나리를 넣어도 맛있잖아, 그런데 여름철에는 거머리가 있어가지고 조심해야 돼. ‘한재 미나리’라고 있어, 그게 깨끗해… 이렇게 조림을 해 먹으려면 무는 숭덩숭덩 크게 썰으란 말이야, 오래 끓이는 건 그렇게 해도 돼. 냄비 밑에 깔면 물이 나와서 아무리 졸여도 타지를 않아. 무로 국물을 내려면 하얀 데를 써야지 파란 부분을 썰어 넣으면 안 돼. 퍼런 데는 채를 썰어 먹는 거야. 무를 고를 때는 울퉁불퉁하고 못생긴 거 말고 곧은 걸 사 기왕이면. 다 티가 나, 무김치를 먹어도 다 보여.”

하지만 엄마는 삼 년 치를 한 학기 만에 가르쳐야 하는 수학 선생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도 질문이 없었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엄마에게, 어떻게든, 많은 말을 하려고 했다.

 

“예전에 왜, 외할머니가 동치미 잘 해 주셨잖아.”

“맞아… 엄마가 동치미나 한 번 담가 줘?”

“여름인데?”

“원래 옛날에도 동치미는 김장하기 전에 일찍 담았어.”

“그러면 지금 담그면 겨울에…”

 

아, 듣기만 할 걸.

 

엄마는 아랫입술을 약간 내밀더니 그저,

 

“글쎄, 너는 먹지…”

 

그 다음날 우리는 무와 고추 따위를 사서 동치미를 만들었다. 언젠가 심부름을 갔을 때 도무지 찾아지지 않던 곧고 예쁜 무를 엄마는 금방 찾아냈다.

 


6.

 

 

중학교 일학년 때 남자 미술 선생님이 해준 얘기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와플’이라 불리는 몽둥이로 가끔 매타작을 했지만 영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집에 있는 어머니들한테 잘 해야 돼요. 나이 먹은 여자들은 스펀지에요. 스펀지는 물을 먹어도 겉보기엔 안 먹은 것 같잖아요. 엄마는 뭐 슈퍼맨인 거 같죠? 안 그래요, 그래 보이는 거지. 스트레스 받고 힘든 게 있으면 그냥 삼킨단 말이야. 아니면 털어놓을 사람이 없든가. 그래서 얘기를 많이 해야 되는 거예요 엄마들하고는.”

 

정말 그랬다. 엄마는 좀처럼 감정을 내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막연히 고된 삶에 무뎌졌거나 단련됐거나 했을 거라는 짐작이었지만, 미술 선생의 얘기가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 가족은 꽤 번듯한 집을 가지고 있었다. 십오 년쯤 전의 이야기다. 32평 아파트였지만 셋이서 살기에는 넉넉했고, 해외여행을 밥 먹듯 가진 못했지만 삼겹살 외식에는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이, 참 뻔하디 뻔한 레퍼토리지만, 무너졌고 그의 재산은 그야말로 한 순간에 모두 남의 것이 되었다. 법원 경매에서 집은 시세의 반값에 낙찰됐고, 새로운 주인은 삼 일의 유예를 줬다.

 

사 일째였다. 아버지가 경기도 외곽의 공인중개사를 찾아다니던 평일 오전, 집달리들 여럿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겨울 이불을 펼쳐놓고 책이나 컵 같은 작은 세간을 가져와 거기에 쏟았다. 그리고 이불 네 모서리를 묶어 그대로 트럭에 실었다. 식탁이나 냉장고는 엘리베이터로 갖고 내려와 용달차에 싣고, 출발하기 전 검은 노끈으로 짐칸을 대충 둘렀다. 당연히 여기저기 생채기가 났다. 순식간에 온 집이 텅 비어 버렸고, 짐은 어딘가에 있는 창고로 옮겨졌다. 우리가 살 곳이 정해지면 그 때 돈을 내고 찾아가라고 했다.

 

“소파는 그냥 버리세요.”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은 엄마는 철거반에게 딱 한 마디를 붙였다. 그리고 온 낯이 눈물범벅이 된 나의 뒤통수를 끌어안았다.

당장 잘 곳이 없었다. 엄마와 나는 외할머니 댁에서 하루를 묵어야 했다. 아버지는 어디서 그 밤을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가방도 없이 찾은 친정에서 조금도 화를 내거나 울지 않았다.

 

“이 곰 같은 것아, 너는 섧지도 않냐?”

 

저녁을 차려놓고도 애꿎은 고추만 씹다 눈물을 훔치다 하던 외할머니였다. 그녀는 넋두리도 앉는 당신의 큰딸이 기가 막혔던 것이다.

 

“아녀요…”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를 달래기만 했다.

다락같이 좁았던 주공아파트에도 창문이 있었다. 섣달 보름 하루 뒤였고, 불을 끄고 누워 있어도 달빛이 밝았다. 누런 가로등만 있던 시절 한참이나 새어 들어오던 하얀 빛이 시렸다. 얄궂게도 달은 엄마의 얼굴을 겨눴다. 채 감지도 않은 눈가가 반짝였다. 어느 찰나였다.


 

7.

 

 

선선한 바람이 부는 구월이었다.

 

엄마에겐 예전부터 가끔 적어온 레시피가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요리사가 설명한 걸 받아 적은 것이기도 했고, 그녀가 직접 만든 것도 있었다. 그 날 꺼낸 건 이모의 것이었다. 학교 수업을 듣고 돌아온 저녁, 엄마는 무말랭이를 해 보자고 했다. 무를 썰어 말려둔 것이 있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호박죽을 잘 하고, 이모 솜씨는 무말랭이가 제일이야.”

 

엄마는 이런 말을 몇 번이고 했었다. 나도 몇 번 먹어 보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적힌 대로 무말랭이를 만들었다. 고춧가루나 참기름처럼 들어가는 재료가 미묘하지 특별히 어려운 과정은 없었다. 거의 다 무쳤을 때 엄마는 비닐장갑을 끼고 먼저 맛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좀 싱겁다?”

 

그리고 내가 맛을 봤다. 멀쩡했다. 이모가 해 주던 대로였다.

 

“괜찮은데, 안 싱거운데.”

“이상하네, 밍숭맹숭한데?”

 

무말랭이는 짜다면 짰지 절대 싱겁지 않았다.

 

“응… 그러게, 좀 싱겁네.”

“그렇지? 이모가 다이어트할 때 건강식 레시피를 적었나부다.”

 

우리는 그렇게 훨씬 달고 짠 무말랭이를 만들었다.

달이 높이 떴다. 늦은 추석 전 마지막 보름이었다. 엄마는 나보다 먼저 잠들었다. 엉뚱한 채널로 돌아간 텔레비전을 껐다. 이젠 선풍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창문을 열었다. 아직도 남은 짠 맛을 삭이려 물 한 모금을 먹었다. 몸을 누이고 창밖을 망연히 봤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기어이 엄마의 미각마저 시들고 있었다.

 

엄마도 이런 기분이었구나.

 

십오 년 전 그녀를 울린 건 무력감이었던 것이다.

 


8.

 

 

십일월 초 첫눈이 내렸고, 엄마는 그 다음날 쓰러졌다. 의사가 권하지도 않았던 입원을 이제는 해야 했다. 나는 호흡기에 의지하는 엄마 옆에서 밤을 샜고, 가습기가 돌아가는 6인실 보조침상에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엄마가 누워있는 동안 나는 뜻밖에 손님들 여럿을 맞았다. 아주머니들이었다. 손때 묻어 색 바랜 가방엔 종종 비닐 봉투로 감싼 주방용 슬리퍼가 있었다. 일 하기 좋은 고무줄 바지를 입었고, 거의 다 밤 열 시가 넘어서나 왔다. 누구는 혼자, 누구는 서넛이 왔다. 그 중에는 받침 발음이 어색한 중국 사람도 있었다. 어쩌면 좋니, 어쩌면 좋니… 발을 동동 구르며 부르튼 손으로 나를 붙들고 하는 말도 그들의 차림처럼 한결같았다.

서울 살이 사십년에 고등학교 동창이며 동네 친구도 다 연락이 끊겼던 엄마였다. 그런데도 열흘 동안 밀려들듯 사람들이 찾아와 눈물을 쏟았다. 6인실에서, 아니면 외부인이 못 들어가는 중환자실 입구에서 나는 당혹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사신 거냐는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는 그렇게 떠났다.

 

“벨 일도 아니랑게, 저 시상 가는 것은 무시로 있는 것이제. 가는 년 마중이라두 나갈 것이여?”

알 듯 모를 듯 독백을 중얼거리며 이틀 내내 화투만 만지던 외할머니는 발인 날 아침 혼절했다. 할머니는 노자를 물려야 된다며 통곡하다 정신을 잃기를 거듭했다. 이모는 그런 할머니를 모시느라 운구에 따라가지 못했다. 나는 장례사가 시키는 대로 염을 하고 인사를 받았다. 조문객의 절반은 병실에서 본 얼굴들이었다.

 

상을 치르고 돌아온 집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건조한 계절에 드문 일이었다. 집에 습기가 찼다. 보일러를 켜고 베란다를 살폈다. 말려놓았던 우산을 접었다. 마른 화분에 어느새 곰팡이가 조금 피었다. 닦아냈다.

 

적막한 집에는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엄마가 생전에 채워놓은 반찬이 가득했다. 부엌 서랍 한켠에는 여섯 달 동안 엄마가 정리한 레시피가 빨래집게에 묶여 있었다. 노트를 산 것도 아니고, 그때그때 잡히는 이면지 뒤에 볼펜으로 휘갈긴 글씨였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제육볶음>

 

고기를 재워 놓으면 좋음 – 그대로 볶아도 됨

앞다리 한 근 – 삼겹살이나 목살도 좋음

 

고추장 5큰술

간장 3큰술

설탕 3큰술

마늘 2큰술 – 다진 것

참기름 하나 반

 

잡내가 많이 나면 후추를 넣는다 – 요새는 냉장고기가 싸니 괜찮음

양파 버섯 파는 알아서 곁들여 볶음

 

여름이 다 가기 전, 거의 처음으로 함께 만든 요리였다. 엄마는 ‘재워놓고 볶기만 하면 되니 이것도 못하면 장가 갈 생각도 마라’고 했었다. 집안 어딜 가든, 어디에 서고 어디에 앉든 엄마의 손이 닿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얽힌 기억이 틈입했다.

 

김치냉장고를 열었다. 동치미가 있었다. 정신없는 가을 내내 잊었던 것이었다. 여름에 담근 것이 푹 익어 있었다. 꼭 덜어서 먹어야지 숟가락으로 그냥 퍼먹으면 삭는다, 무를 썰 때 엄마는 내 어릴 때의 습성을 기억하곤 그렇게 당부했었다.

 

희멀건 국물에 여섯 달 치 살얼음이 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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