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24] 다시 초조해지다


 

우리는 이미 여행의 베테랑을 참칭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난 보름간 건너온 곳은 세부나 발리가 아니라 시베리아와 구소련이었다. 어리숙한 관광객이 덮어쓰는 호객과 바가지는, 다소간의 시행착오는 있었으나, 훌륭히 극복했다. 모스크바를 지나면서는 가벼운 후리스나 코트가 두꺼운 외투와 내복을 갈음했다. 뿐인가, 파리에서 프라하로 오던 비행기쯤 되면 승무원을 불러 물을 청할 정도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전까지는 주는 것만 받아먹었던 것이다.

착륙할 때 흘러나오던 스메타나의 ‘블타바(Vltava, ‘나의 조국’ 2악장)’에는 알은 체도 했다. ‘야 이거 어디서 들어본 거네.’ 물론, 아직 그 도입부의 맑은 뿔피리 소리가 오보에인지 리코더인지 잘 모르겠으며, 블타바니 몰다우, 도나우니 하는 중부유럽의 여러 자유곡류하천들의 이름을 구분하는 것도 어렵다. 숙소 관리인과 연락해 아파트 열쇠를 받는 것은 여전히 힘겨웠으며, 넷 중 나에게만 한정하자면 공짜 와이파이를 찾으러 식당이나 가게 앞을 어슬렁거리던 것도 똑같았다. 버스 티켓을 끊는 것도 자판기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어야 가능했다.


[사진 – 허세로는 가리기 어려운 어리숙함]


[사진 – 정말 별 것 없던 시계탑]

 

그래도 어떤가. 서대전역네거리와 서대전네거리역과 서대전네거리 정거장을 구분하지 못해도 꼭 대전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런데다 프라하는, 여유를 부려도 괜찮은 도시였다. 작기 때문이다. 관광지가 몰려 있는 1구와 2구는 더욱 작다. 조그만 동심원같은 프라하 시내의 중심에는 구시가지 광장이 있고, 또 그 정가운데에는 유명한 시계탑이 있다. 매시 정각이 되면 사람들이 모인다. 이 시계탑이 정각마다 퍼포먼스를 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행의 베테랑답게 숱한 블로거들이 남긴 후기를 벌써 다 본 참이었다. ‘별 거 없습니다’… 예측 가능한 타이밍에 터지던 “에이~ 뭐야.”에 뒤를 돌아보니, 모여있던 이의 태반은 한국인이었다. 대림동이나 원곡동보다는 훨씬 높은 비율이리라 장담한다.

 

프라하의 첫날 어느 맥주집을 들렀다. 자가양조의 역사가 오백 년이 되었다는 곳이었다. 그것도 아마 우리 가운데 누군가 블로그를 뒤져 찾아냈을 것이다. 벌써 한국 사람들 다 와 있겠네. 반쯤 시큰둥해진 표정으로 들어선 그곳의 공기는, 아아, 그 분위기란.

 

 

헌팅캡에 콧수염을 하고 배가 잔뜩 부른(이게 중요하다) 아저씨가 아코디언을 연주했고, 또 그 비슷한 몸매의 아저씨들이 나란히 앉았다. 이미 거나해져 말 한 마디에 한 번씩 복식호흡으로 웃음을 쏟아내던 이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수십 명이었고, 그 광경이란 호탕함마저 넘어선 어떤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는 것이었다. 그들 밑에 깔려 육중한 무게를 견디던 건 고색창연한 진갈빛의 목제 의자와 식탁들이었다. 실내는 그 가구들과 같은 진갈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우리는 모퉁이에 앉았다. 여기서 술을 먹다 보면 저 아저씨들이 맥주잔을 치켜들어 인터내셔널을 부르고, 노래가 끝난 다음엔 동시에 ‘Oi!’를 외치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어쩐지 바짝 ‘쫄아’ 앉은 우리 앞에 흑맥주 넉 잔이 놓였다. 주문은? 자세히 보니 모든 사람이 똑같은 맥주를 먹고 있었다. 잔이 빌세라 빨간 조끼를 입은 종업원이 회수해 다시 맥주를 채워주었다. ‘빌지’의 구성 역시,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맥주잔을 세는 작대기가 끝이었다. 그밖에 그 빨간 조끼들이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권하며 돌아다녔고, 안주로 ‘꼴레뇨’를 주문할 수 있었다. 껍질이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체코식 족발인데, 아아, 그 맛이란.

 

다음날도 그럭저럭 보냈다. 뭘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서점을 구경하고 저녁에는 또 맥주를 먹었을 것이다. 사박 오일의 일정이 이제 사흘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닷새째에는 공항에서 인천으로 가는 낮 비행기를 타게 되어 있었으니 사실은 이틀이었다. 불현듯 초조해졌다. 유럽에 다시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에서 합격통보를 받기 전과는 다른 초조함이었다. 차라리 달떴다고 해야 할까.

 

남은 코루나(체코 화폐)를 모두 유로로 바꾸고, 그것도 모자라 나머지 셋의 유로를 모두 뜯어냈다. 대충 60유로가 나왔다. 홀린듯 숙소를 나왔다. 지하철로 두 정거장을 지나면 플로렌츠(Florenc)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표삯이 가장 저렴한 시각은 마침 다음날 첫차였다. 가는 데 19유로, 오는 데 14유로. 행선지는 베를린이었다. 알고보면 건장한 넷이 뭉쳐 다녔던 그동안이었다. 나는 여행의 마지막에 와서야 홀로 이틀을 지새기로 한 것이다.

 

…지환이의 유로를 꾼 다음 동기의 배낭을 빌려 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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