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4월 28일
그 날은 아마 밤을 새우다시피 했을 겁니다. 일요일을 기다렸고 밤을 새우고도 초췌한 모습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나이였던 덕에 상쾌하게 파란 새벽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아침엔 의식처럼 ‘어떤 날’ 1집을 들었으며 전날 정해둔 연분홍 남방과 하늘색 청바지를 입고 거울을 보며 흡족해 하기도 했습니다. 날씨는 화창하다 못해 싱그러웠고 이 모든 것은 1991년 들어 모든 것이 가장 완벽했던 아침을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날 나름대로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야할 곳이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소개팅이나 미팅 같은 걸 상상하시면 곤란합니다. 살아오면서 무슨 팅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암담한 인간이거든요.

집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8차선에 이르는 꽤 큰 도로를 건너야 했는데, 새로 생긴 다리가 놓인 곳이고 당시만 해도 교통량이 많지 않아 한산한 도로였습니다. 하천과 주택가의 경계지역이라 말 그대로 적막한 거리였던 도로를 오전 8시쯤 건너게 됩니다. 정해진 시간보다 일렀고 햇살은 분홍 남방에 반사되어 민망할 정도로 화사한 아침이 순조롭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도로를 다 건넜을 즈음 등 뒤에서 차의 급제동 소리, 그리고 둔탁하지만 가혹한 충격음, 이어지는 차의 재출발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반대편 차도 위엔 작은 개가 누워 있었습니다. 거리엔 아무도 없었고 그걸 보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목도하는 경우, 설령 그것이 사람의 죽음일 때조차도 그다지 의미를 갖지 못하곤 합니다. 공동의 목격은 책임의 분산이 되어 위안이 되어주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그 때 내겐 개 한 마리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도록 나눠줄 누구도 없었습니다. 직접적인 일이 되어버린 겁니다.
최소한의 동정도 없는 문제의 자가용은 재빨리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신체가 파손된 것 같진 않았습니다. 혹 살아있더라도 그냥 놔두면 뒤이어 달려올 차에 몸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길을 건너 개에게 다가갔습니다. 개는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충격 탓인지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외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옆으로 누워 가쁘게 헐떡이는 모습을 보니 치명적인 상태가 분명했습니다. 작은 개가 빠르게 달리던 승용차에 치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일단 차도에서 인도로 옮겨놓고 보니 지금 마지막 숨을 쉬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간에 평생 쉴 것만 같던 숨이 이젠 몇 번 남지 않은 상황의 그 절박한 숨소리들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근처에 동물병원이 있던가 기억을 짜내 보았더니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있다고 해도 일요일 아침 8시경에 문을 열었을 턱이 없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었죠. 숨은 점점 가빠지고 있었고 쓰다듬으며 바라본 개의 눈은 초점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짧은 몇 분은 여전히 화사한 햇살 아래에서 길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오히려 숨을 재촉하는 것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개를 들쳐 안고 일단 상가거리로 가보면 무슨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나 봅니다. 숨이 곧 멎었거든요. 죽었습니다. 그나마 자책의 무게를 가벼이 해준 건 오래지 않아 죽어줬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깨끗한 목걸이로 보아 잠시 놀러 나온 듯한 하얀 개는 이런 한산한 길에서 어이없이 사고를 당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행인 앞에서 그렇게 죽었습니다. 평화롭고 눈부셨던 그 날 아침 어느 예쁘장한 개의 임종을 지킨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체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기껏 한다는 짓이 햇살이 더울 것 같아 그늘에 눕혀둔 것뿐이었고 이젠 그다지 이르지 않은 시간에 다시 도로를 건너 가야할 곳으로 향했습니다. 슬픈 노래 <백구>에 등장하는 아주머니의 역할을 맡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사실 그 이후로도, 또 그 전에도 집에서 키우던 많은 녀석들이 죽는 걸 봐왔습니다. 시골에 살 때는 말 그대로 복날 개패는 장면도 봤을 뿐더러 온갖 방법이 동원되는 가축도살도 봐온 터입니다. 그뿐일까요. 끔찍한 일을 겪기도 하고 또 저지르기도 하며 살아온 건 조금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때론 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날을 유독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시 화창했던 몇 년 전 어느 날, 학교 교실 창으로 본 (우리학교와 붙어 있었던) 민정당 연수원 옥상을 점거한 대학생 형들과 겹겹이 둘러싼 수 백 명의 경찰들, 그리고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던 형들을 ‘구경’하던 ‘우리’가 떠오르는 건 무슨 연관일까요? 뭔가 끌어 올라오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어린 나와 친구들이 말입니다. 날씨 탓일까요?

혹 하얀 개를 그 즈음 잃어버린 분이 계시다면 이 글은 못 본 걸로 하세요. 아닐 겁니다. 당신의 개는 동정심 많은 좋은 새 주인을 만나 수명대로 살다가 주인들의 축복 속에 죽었을 테니까요. 어쨌든, 1991년 4월 28일 일요일 아침, 날씨 하나는 무척이나 좋았다는 사실은 잊을 수 없습니다.
2003.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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