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지켜주던, 고구마가 남았다>
안방 화장대 옆을 떡 꿰찬 고구마 상자. 뜨신 데 둬야 썩지 않고 오래가기에 겨우내 고구마랑 동거를 했는디. 오랜만에 열어본 상자에 고구마가 여직 남아 있다. 물기가 빠져 비쩍 마른 놈도 더러 있지만 그럭저럭 생생하다. 며칠 전 남원 장에 갔더니 글쎄, 고구마 작은 바구니에 오천 원 넘게 부르던 게 생각난다. 꽤 비싸다고 여기며 집에 있는 고구마가 잘 있는지 궁금했드랬지.

[사진 – 안방 화장대 옆을 오래도록 꿰찬 고구마 상자]
다행히 고구마는 잘 있다. 지난겨울, 찾아오는 손님마다 열심히, 구수하고 달큰한 군고구마를 내줬는디 아직도 남아 있다니. 고구마가 많아서인가, 손님이 덜 와서인가. 그러고보니 손님 올 때 말곤 고구마를 거의 먹지 않는다. 군고구마 하기엔 못생기고 작은 고구마들 애써 골라골라 쪄먹은 적은 있어도.

[사진- 고구마가 남았다! 큰 놈 세 개는 무조건 고구마 튀김으로!]
어느덧 사윌이 가까운데, 아직은 괜찮다지만 이 뜨신 날씨에 계속 두면 말라비틀어질까 걱정이 된다. 그래서, 고구마를 찌기로 했다.
마른 고구마를 물에 담그니 때깔이 살아난다.
조금 마른 듯하지만 여전히 고운 자태를 자랑하는 텃밭 고구마. 오로지 내가 먹자고 요렇게 잘생긴 놈들 쪄먹는 건 처음이네. 고구마 익는 냄새는 언제 맡아도 좋아, 좋아~

사람들한테 내줄 땐 간식거리였는데 나 혼자 먹을 땐 밥 대신이다. 보릿고개 간신히 지켜주던 구황작물이라 그런가, 군것질로 넘기기엔 고구마한테 왠지 미안시럽다. 점심밥으로 고구마, 저녁밥은 밥 삼분의 일, 고구마 삼분의 일, 그리고 막걸리 삼분의 일. 오늘 하루 고구마로 배를 채운다. 보릿고개로 어렵게 지내던 그때 그 시절, 슬며시 떠올리며.

노란 고구마 속살. 땅에서 나온 지 5개월도 넘었는데 여전히 맛있다. 저녁에 먹을 땐 식으니까 달콤한 맛이훨씬 빛이 나더라. 막걸리랑도 잘 어울리고. 땅에서 나온 지 오개월도 넘었는데 여전히 맛있는 고구마가 참참 용하다.

남은 고구마도 곧 쪄먹어야겠지. 새봄에는 푸릇한 먹을거리가 넘쳐나니 손님들이 와도 찐고구마 내주긴 좀 뭐하니까. 하지만! 저 큰 고구마 세 개!! 이거만큼은 내 혼자 먹을 수 없음이야. 고구마튀김 하면 여전히, 무지 맛있을 거거든. 큰 고구마 세 개가 더 마르기 전에, 고구마튀김 맛나게 먹을 누군가가 찾아오면 좋겠다. 2017년 산골 텃밭이 낳은, 마지막 고구마를 맛보게 될 이. 과연 누가 될지 참 궁금타~~*^^*

< 냉이 시대가 저물고 머위 시대가 열리고… >
감자밭을 만들고자, 내일 오실 손님맞이 냉이반찬 만들고자, 작심하고 냉이를 캔다. 밭도 매고, 냉이도 캐고, 손님한테 낼 반찬도 만들고, 그야말로 일타삼피 밭일. 따스한 봄날, 햇볕이 내리쬐도 그리 힘들지 않다. 아니, 참 좋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 시간, 이 밭일.
냉이가 지난주보다 또 많이 자랐다. 물론, 그래봤자, 시장서 파는 냉이에 견주면 반에 반도 안 되는 크기겠지만. 감자밭 만들 자리다 보니, 손톱만큼 작은 냉이까지 죄 캔다. 더 자랄 수 있는데, 냉이 쥔 손이 미안하다.  지금 뽑히면 사람 몸에 들어가고 나중에 뽑히면 거름 되어 땅에 스미고. 냉이한텐 어느 쪽이 더 나으려나.

[사진 – 냉이 캐는데 앞집 할매가 불쑥 참거리 담긴 비닐봉지를 주신다. 밭에 나온 내 모습이 반가우셨나?]
봄 전령사 냉이는, 이월부터 삼월까지가 가장 맛있다. 사월이 되면 먹기엔 좀 질기다. 향도 덜하고. 그러니까 삼월 말, 바로 지금이 냉이한테 마지막 절정의 순간이다.

[사진 – 한가득 캔 냉이! 너무 곱고 사랑스러워-]
잔뜩 캔 냉이를 하나하나 다듬고 씻는다. 당근! 시간이 오래~ 걸리건만, 전처럼 “아고, 이 일을 내가 왜 하노!” 같은 푸념이 나오지 않는다. 그냥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기분. 나, 드뎌, 냉이 다듬기에 인이 박혔나? ^^
한가득 씻은 냉이 잔뜩 데쳐 냉이무침을 만든다. 냉이내음이 어느 때보다 진~하다. 그야말로 마지막 절정의 맛! 내일 찾아오실 손님도, 분명 좋아하겠지?

냉이를 캐다 언뜻언뜻 머위꽃이 보인다. 앙증맞게 작고 귀여운 머위순도. 아, 지난해 봄. 나를 흥분에 떨게 했던 바로 그 머위!

[사진 – 수줍게 열린 머위꽃. 그 옆에 작은 머위순]
냉이 시대가 저물고
머위 시대가 열리고.
그렇게 산골 봄날은 봄나물 피고 지는 시간 따라 흘러간다. 나는 그저,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시간에 행복에 겨운 몸을 맡긴 채 흘러갈 뿐.
사월이 오기 전에, 밭에 납작 엎드린 냉이를 마저 뽑아야겠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을 어떤 의심, 질투, 분노, 아픔까지도 냉이랑 같이 캐내고 싶다. 그리고 냉이한테 말해줘야지. 시린 겨울 지나 맞이한 새봄, 너로 인해 내 맘이 얼마나 따스해졌는지,널 만날 때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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