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쑥 노동과 삶, 그리고 행복

올봄, 처음으로 공식 쑥 노동을 했다. 좀 늦었다. 뜯어 가라고 아우성 치는 쑥들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나니. 며칠 내리 비가 온 뒤라 쑥이 많이 컸다. 쑥쑥 뜯기 좋구나. 작은 칼 쥐고 마당 옆 비탈진 땅에 네 시간 넘게 머물렀다.

쑥이 그렇다. 잔뜩 모여 난 자리에 다가서면 한자리에서 몇 시간쯤 넉넉히 비빌 수 있다. 아직은 사월 초. 한낮에 내리쬐는 햇볕도 그럭저럭 넘길 수 있다. 쑥 뜯는 건 몸을 크게 쓰지 않으니 굳이 땀 날 일도 없고.


쑥은 많이 자랐고, 날씨도 좋고, 일하기 참 좋은 상황인데 왜 그런지 신이 안 난다. 뭔가 재미가 덜하다. 손은 쑥을 만지면서도 머리는 자꾸 딴생각.

 

‘나는 지금 왜 쑥을 뜯는가? 노동은 왜 하는가?
노동의 대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쑥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나는 좀 더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반대로 더 힘들게 느낄 수도 있을까.

지난해도 바로 이 자리에서 쑥을 뜯었는데
지금, 바로 그 자리에서 또 쑥을 뜯는구나.

 

뭔가 단조롭고 무의미한 이 기분, 큰일났다.
씨 뿌리고, 모종도 심고, 잡초 뽑고.
또 취나물 뜯고 고사리 꺾고…
앞으로도 해오던 일들 계속 되풀이될 텐데
쑥 하나 하면서
벌써부터 무기력해지면 어쩌나…’

 

일하면서 오만 생각이 가능한 건, 어쩌면 쑥 노동뿐일지도 모른다. 다른 일은 일 자체가 힘겹거나 다채롭거나 하여튼 여러 가지 까닭으로 손발 놀리다 보면 ‘생각’이란 놈이 비집고 들 틈이 없다. 한데 쑥은, 쑥 뜯는 노동은 가만 앉아 손만 놀리다 보니 생각이 피어날 틈이 생겨버린다.

 

재밌지 않으면 일하지 않거나, 어떡하든 재미든 의미든 찾아내거나,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 고개가 아파 한숨 쉬는 때마다 집으로 팍 들어가버리고픈 마음을, 애써 다잡는다. 쑥버무리 좋아하는 동생을 등불 삼아.

 

‘이렇게 열심히 쑥 해 놓으면
일본 사는 혜영이 건너올 때, 언제든,
걔가 밥보다 더 좋아하는 쑥버무리
양껏 해줄 수 있잖아.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어딨어!
게다가 너두 쑥버무리 좋아하잖아.
그러면서 봄이 이만치 올 때까지 여태
한번을 안 해 먹었으니
오늘 제대로 쑥에 담긴 봄맛 느껴보셔!’

 

하기 싫은 미적지근한 마음 다잡으며 네 시간 넘는 쑥 뜯기 노동을 마쳤다.

 

이어지는 또 다른 쑥 노동. 쑥을 씻어야 한다. 이젠 나도 쑥은 좀 뜯는 녀자가 됐는지 다행히 쑥에 따라온 검불이 적다. 그래도 아주 가느다란 마른 풀들이 건듯건듯 숨어 있어 세심하게 씻어야 한다. 두 바구니 캔 쑥을 깨끗이 씻고 나니 저녁 여섯 시가 훌쩍 넘었다.

 

쑥 데치기 전에 저녁부터 먹어야지. 게으름 덕에 미루고 미루던 내 사랑 쑥버무리를 드디어 만들고 먹는다!

 

김 모락모락 이는 쑥버무리 덥석 베어 문다. 아, 그립던 이 맛, 눈물나게 맛있어. 그저 밀가루랑 소금이랑 물과 섞였을 뿐인데, 쑥아, 어쩜 이렇게 담백하고 포근하고 몽실몽실한 맛을 낼 수 있는 거니! 쑥버무리 먹을 때마다 떠오르는 엄마표 쑥버무리. 어릴 때부터 그렇게나 좋아했던.

 

같이 사는 남자분. 쑥버무리 몇 입 떼어 먹고 만다. 그러면서 말한다.

“추억의 맛이야. 그래서 맛있는 걸 거야.”

그래놓곤 자기는 어릴 때 엄마가 해주는 쑥개떡 그저그랬단다. 그래서 내가 감탄해 마지 않는 혜원표 쑥버무리도 그냥 그렇단다. 그런가? 다시금 먹어 보니, 정말 무식하게 담백한 맛이다. 설탕 한 알 들어가지 않아서 더더욱!

 

“다른 사람들이 먹으면 맛없다고 할 수도 있긴 하겠어. 근데 난 정말 맛있어, 진짜 맛있어.”

 

밥 대신 쑥버무리, 국 대신 막걸리 한 사발. 그렇게 저녁을 먹곤 곧바로 삼차 쑥 노동. 큰 냄비에 쑥을 데치고 데쳐서 모두 쑥 열 덩이를 만들었다.

나중에 동생도 먹고, 또 다른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게 될 귀한 쑥 덩이. 고이 싸서 냉동실에 담는다.

 

모든 쑥 노동을 마치고 미리 끓여 둔 쑥국에 또 막걸리 딱 한잔 비운다.

은은한 쑥내음이 된장과 어우러진 쑥국.

쑥이라면 뭐든 좋아하는 나, 쑥국 또한 입이 아~주 행복했음!

 

해마다 같은 일 되풀이하더라도, 해마다 다르게 스미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그래서 마음이 옆으로든 위로든 조금이라도 커지고 넓어질 수 있다면. 쑥 노동도, 곧 닥칠 온갖 산골 노동도 즐겁게 기꺼이 받아 안고 싶다는 마음이, 쑥국까지 먹고 난 뒤에야 오롯이 들어찬다.

쑥 덕분에 조금씩이나마 사람 꼴 갖추어 가는 건지. 아니면 쑥과 함께 나눈, 산골 노동에 지친 몸 말없이 받아주는 막걸리 덕분인 건지……

 


#2. 파김치와 냉이국수, 우리 제법 잘 어울려요~

 

비 오는 봄날에 어울리는 저녁 끼니로 냉이국수 간택! 밭에서 갓 캐 온 냉이 열심히 씻고. 멸치국물에 유부, 어묵 넣고 팔팔 끓이고. 마지막으로 물 끓는 냄비에 막 국수를 넣으려는 순간,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린다.

‘다 저녁때 누구야~ 국수는 계속 지켜봐야는데..’

속으로 궁시렁대면서 가스불 끄고 나가니 앞집 할아버지께서 뻘건 비닐봉지를 주신다.

“여기, 파김치 했다고…”

“아, 네, 잘 먹겠습니다!”

 

바로 코앞이라지만 비 오는 저녁에 이걸 주러 오신 걸 보면 아마도 바로 만든 파김치가 분명할 듯. 비닐봉지 들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바쁜데 누구나며 투덜대던 내 모습이 좀 부끄럽다. 난 왜 이리 속이 좁지? 다시금 가스불 열고, 국수 삶고 비닐봉지에 든 김치를 통에 담는다.

“야, 때깔 조오타~~”

감이 절로 나는구나. 앞집 들머리에 싱싱하게 자라고 있던 그 쪽파로 만들었겠지? 냉큼 한 줄기 입에 넣으니 맛도 그만일세!

옅게 바알간 김장김치랑 진하게 붉은 파김치 상에 나란히 두니 저절로 파김치에만 손이 간다.

막걸리 안주로 딱인데. 밥이랑 먹어야 제격인데. 아쉽게도 막걸리는 똑 떨어졌고, 저녁밥상 주인공은 국수. 그런들 어때. 밭에서 갓 캔 쪽파로 막 만든 쪽파김치. 새콤달콤 야들야들하니 맨입에도 맛나고, 국수랑 같이 먹어도 좋기만 하구나.


[냉이 국수를 위해 냉이를 잘게 썰어 집간장에 조물조물 무친다.]
[냉이 비빔국수. 고소한 참기름과 섞여도 냉이 내음은 살아있네!]
[비오는 봄날 저녁엔 냉이 국수. 향긋한 냉이 내음이 담백한 국물과 마음껏 어우러진 맛! 역시나 좋구나]

 

문득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생각난다. 저녁때면 이 집 저 집 서로 반찬 나누던 모습. 반찬 나르던 한 아이가 그랬지, 아마?

“이럴 거면 그냥 같이 밥을 먹던가~”

 

드라마 속 풍경이 참 좋았는데, 내 어릴 적에도 드라마에 나온 만큼 자주는 아녀도 이웃집과 떡이며 과일이며 먹을거리 자주 나누던 생각도 나고.

 


저녁때 맞춰 불쑥 날아든 파김치. 얼마 전 손님이 들고온 제과점빵 몇 조각 가져다드렸는데, 그게 고마우셨던 걸까. 하긴, 그전에도 김치 담그고 하시면 꼭 주셨으니, 딱히 그 때문은 아닐 거야.

 

외지것으로 마을 안에서 마을 분들과 더불어 살자니, 마음고생할 때도 더러 있다. 아니, 자주 있다! 하지만 오늘처럼 먹을거리로 마음 주고받는 푸근한 시간이 찾아들면, 그간 겪은 힘듦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에 젖는다.

다시 또 힘든 시간 겪을 테지만 그래서 혼자 눈물 흘리는 시간 또 다가올 테지만, 마을에 들어와 살길 참 잘했다는 마음이 불끈불끈 일어날 만큼, 비를 뚫고 내게 온 파김치가 정말정말 맛났다.

밤 열한 시 다 되어가는 지금도 파김치 생각에 침이 고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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