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자라 서울에 온 이후, 청소년기 첫 단짝은 대갈이었다. 혜화동에서 강동중학교(지금 송파중학교)로 전학 온 대갈이, 등하굣길에 소주병을 숨겨두고 함께 마신 우간다, 이렇게 셋은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린이대공원에서 소주 병나발을 불기도 하고 밤새 라디오를 틀어놓고 놀다 아침에 방송되는 음악에 맞춰 국민체조도 했다. 나중에 우간다는 목포로 돌아갔고, 20대 중반 이후 대갈이와도 소식이 끊어졌다. 고등학교에서는 (한때 배명고등학교 일진이었다가 권좌에서 밀려난) 투투와 부시맨이 음악과 영화에 조예가 있어 어울렸는데, 졸업 후에 투투가 오카리나를 빌려갔다가 두 동강 낸 이후로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무리는 메기를 첫 단추로 이어진 칠득이와 노가리 등이다. 고개 쳐들고 잠실 동네를 활보하며 뚝방전설을 남긴 예닐곱의 무리가 모인 곳은 우습게도 교회였다. 그들 중에서 가장 늦게 알게 되었지만 가장 많은 추억과 음악을 나눈 친구가 뿌리였고, 그가 청소년기 마지막 단짝이다. 둘은 라디오 심야음악방송을 즐겨 들었던 터라 제스로 툴(Jethro Tull)<Elegy>를 우리의 주제곡으로 삼았다. 그 곡이 담긴 레코드를 산 음반점 자리에 옷가게와 아이스크림 체인점이 들어서는 동안 대학교에 기부금이나 바치는 학생이 되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졌으며, 잊히고 잊어갔다. 1990년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글은 20181월부터 월간 <방송작가>에 연재 중입니다.

 


벚꽃 일렁이는 여의도는 화사했고 국회를 드나드는 사람들마저 달떠보였다. 국회 세미나실에서 예술인복지를 주제로 발표와 토론을 마치고 나서는데 누군가 불쑥 ‘성을 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런 자리에선 들어본 적 없는 호칭에 놀라 쳐다보니 고등학생 시절에 깊게 마음을 나눈 친구, 하지만 오랫동안 소식조차 알지 못했던 친구가 서있었다. 국회 직원이 된 그가 우연히 행사알림판을 보고 찾아온 것이다. 그날 저녁, 근황과 옛이야기를 뒤섞어가며 회포를 푸는 동안 우린 어느새 1990년대의 어느 골목으로, 담쟁이넝쿨에 뒤덮인 빨간 벽돌건물 옆 벤치로 돌아가 있었다.

소형카세트 ‘워크맨’이나 ‘마이마이’에 이어폰을 연결하여 음악을 듣는 것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모습만큼이나 자연스러웠던 시절, 우린 작은 방에 모여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책을 돌려보곤 했다. 생활검열과 두발단속이 일상이던 학교보다는 새마을시장 근처 오락실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반가웠고, 교외 단체에서 문화행사를 기획하는 일에 시간을 쏟았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와 <여명의 눈동자>가 저녁마다 가족들을 TV 앞으로 불러들이며 1990년대는 그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인류사에 성현의 시대가 있었으니 2400년에서 2600년 전이다. 노자, 장자, 공자, 차라투스트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별난 양반들이 나타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한국 대중음악에선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전반 사이가 그러하다. 이 연장선을 따라 1990년과 1991년에도 새로운 음악이 잇따랐다. ‘무한궤도’를 그만둔 신해철은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가 담긴 솔로앨범에 이어 <내 마음 깊은 곳의 너>와 <나에게 쓰는 편지>가 실린 《Myself》를 연이어 발표했다. 공일오비(015B) 역시 윤종신을 발탁하여 <텅 빈 거리에서>로 이름을 알리더니 금세 《Second Episode》를 만들어냈다. 작곡가 윤상도 제 이름으로 첫 음반을 내고 <이별의 그늘>을 세상에 알렸다. 모두 이전과는 다른 감각의 음악들이다.

미래의 거대기획사 SM이 ‘현진영과 와와’로 첫 성공을 맛보던 오버그라운드 반대편에선 진짜 록을 하던 임재범의 ‘아시아나’가 실력을 과시했다. 신대철, 김종서, 서태지가 한 배를 탄 ‘시나위’ 4집 앨범에선 <Farewell To Love>와 <겨울비>로 이어지는 순간이 압권이었다. 이 곡들은 훗날 솔로가수로 나선 김종서가 <겨울비>를 다시 부르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환상 속의 그대>에 <Farewell To Love>를 샘플링 함으로써 더 많은 이들에게 소개될 기회를 얻게 된다. 조동진 양희은, 신촌블루스빛과 소금도 좋은 음악을 내고 있을 때에 ‘동물원’은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를 선물했다.

1990년과 1991년 사이겨울에는 대전의 스타 신승훈이 <미소 속에 비친 그대>을 부르며 방송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날은 유재하의 기일이었고, 또 바로 그날 김현식도 더 이상 새 옷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었다. 김현식이 죽기 전에 녹음한 <내 사랑 내 곁에>가 뒤늦게 세상과 만난 1991년, 거리는 죽은 가수의 노래로 가득했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죽임당한 대학생 강경대의 이름은 또 다른 거리를 채웠다. 우린 심야에 자전거를 타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그날이 오면>을 부르고 다녔다.

1990년대는 많은 것들이 무너져간 시대이다. 산업화 급속성장의 폐해가 하드웨어 붕괴로 가시화되었다. 음악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노래로 하고 싶어도 사전심의제도 탓에 부를 수 없었다. 타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을 위험한 자로 간주한 검열관들은 예술을 이해할 능력도 없었다.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대신, 감히 무엇은 된다고 가르쳤고 무엇은 안 된다고 윽박질렀다.

그 때, 《아, 대한민국…》은 꿈꿀 수 있다면 오로지 악몽뿐인 현실을 폭로했다. 이미 앨범을 7장이나 낸 중견가수 정태춘이 불법음반을, 그것도 카세트테이프로 내놓았다. 2년 징역이나 2000만 원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지만, 음악인의 자존감을 지키면서 시대상을 비춰내기 위해 나쁜 법은 거부하기로 작심했다.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인 문제해결을 시도한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압축된 고통을 물려받은 이 사회의 병과 고통과 비극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불편한 진실을 감동으로 승화시킨 노래 <아, 대한민국…>은 음악이 시대와 어떻게 만나는지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노래가 불리고 28년이 흐른 지금의 모습은 과연….

겨울이다. 1980년대에 완벽한 팝 앨범들로 ‘의미 있는 대중성’의 모범을 제시한 사람들이 함께 한 《이문세 7》에는 나이를 먹기 시작한 30대의 굽이가 보인다. 그 완성이자, 벌써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려버린 작사/작곡가 이영훈이 이후의 곡들은 별첨일 뿐이라 고백한 <옛사랑>을 겨울에 듣기란 참으로 먹먹한 일이다. 이 노래가 나올 무렵, 우리는 세상을 모두 가졌다가 한꺼번에 잃었다. 우린 세상을 모두 잃고 다른 세상을 불쑥 마주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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