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버트런드 러셀 경은 노동시간 단축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그는 어떤 기업이 노동자 1명당 전보다 2배 많은 핀을 생산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진 상태를 가정했다. 그의 지성으로는 노동시간을 대폭 줄여 일자리와 시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마땅했다. 세상은 핀 생산 인력의 다수를 실업에 빠뜨리고 나머지는 전보다 더한 과로에 시달리게 함으로써 그의 지성을 배반했다. 노동자들을 주말에 쉬게 하자는 의견에 대한 한 귀족 부인의 반응을 그는 이렇게 전한다. “그들이 주말에 무얼 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들은 일을 해야만 한다고요!”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해 올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는 국가의 3권이 하나인 것 같은 협력을 선보였다. 휴일연장노동에 대해 휴일수당과 연장수당을 중복해 지급해야 한다는 성남시 청소 노동자들의 소송에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며 대법원이 동원한 논리는 개정 전의 근로기준법으로 “1주일은 5일”이라는 것이다. 고도의 창조적인 법률 해석에 정부와 국회도 사전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문재인 정부는 ‘휴일노동은 연장노동이 아니다’라는 기존 행정해석의 폐기 공약을 미루고 한사코 법률 개정으로 떠넘겼다.

이제 와 더욱 의심스럽지만, 이 행정해석을 폐기할 경우 ‘휴일노동은 연장노동’이라는 점을 정부가 인정하는 효과를 염려한 것이다. 국회는 2월 근로기준법 개정에서 1주를 7일로 규정하고도, 8시간을 초과하는 휴일노동만을 연장노동으로 규정함으로써 사용자들과의 변함없는 우정을 과시했다. 방한 중인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 교수가 그 길이에 깜짝 놀란 주 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마저 6개월 동안 시행을 연기한 최근의 정부 결정에 이르면, 이 정부는 표방한 대로 ‘노동을 존중’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산입 범위 확대를 골자로 하는 최저임금법 개악의 후속 작업으로 정부가 확대하려는 근로장려금 제도를 보자. 이 제도는 신자유주의 종주국 미국과 영국에서 전개되는 과정이 그랬듯이, 2008년 우리나라에 도입될 때도 “저소득층의 노동 의욕 고취”가 주된 목적이었다.

근로장려금 제도는 노동 의욕을 고취하려면 노동 소득 이외의 공적 이전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사고를 보여준다. 부부 연간 소득 합계 2500만원 이하라는 소득 기준은 정부가 고시한 2018년 4인 가구 중위소득 약 5400만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기초생활수급자의 수혜 기준인 중위소득의 50% 이하를 넘어서는 차상위 계층으로 올라가는 문턱에서 빈곤층을 주저앉힘으로써 빈곤을 사회적 기정사실화 하고, 바로 그 빈곤으로부터 저임금 노동의 유인을 유지하려는 정책인 것이다.


[이미지출처 – 국세청]

 

일자리 안정자금의 절대 부분을 근로장려금으로 전환한다는 정부 계획은 사용자에 대한 직접적인 임금 보조금을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으로 전환한다는 딱 그 점까지만 의미가 있다. 변변한 복지가 없는 미국에서 최대 규모의 소득보전 정책인 근로세액공제(EITC)는 사실상의 임금 보조금으로서 최저임금 등 전체적인 임금 인상을 억제하는 역할을 해왔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노동 유인을 유지하려는 정책 결정들이 자동화의 위협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지위에 있는 이들의 손에서 속속 결정되는 가운데, 자동화가 일자리를 잠식했거나 곧 그럴 것이라는 소식은 연신 쏟아져 나온다. 테슬라, 아디다스는 제조업 분야의 대표 사례이다. 제조업 일자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마존닷컴의 물류 공장, 조만간 바리스타 없는 커피 판매를 가능케 할 시스템을 구축한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 등등.

물론 이런 뉴스들이 자동화의 고용 효과에 대한 경제학적 논쟁을 종결시킨 것은 아니다. “총공급이 총수요를 창출한다”는 고전파 경제학자 장바티스트 세의 전통에 서 있는 주장들은 자동화의 일자리 잠식 주장에 대한 만만찮은 반론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생산유발 효과와 일자리 대체 효과가 나타나려면 자동화로 이미 시작된 대다수의 고통을 경유하고 나서일 것이다. “장기에는 우리 모두 죽는다”고 한 케인스의 경고를 새겨야 할 지점이 여기다.

대통령, 국회의원, 판사들은 사회를 향해 “일을 하라”고 주문한다. 주 35시간 수준으로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해 일자리를 나누고, 기본소득과 같이 실업의 덫, 빈곤의 덫을 제거한 공적 이전 지출을 확대하는 것은 이들에게 노동을 존중하는 방식이 전혀 아니다. 러셀이 개탄한 귀족 부인의 태도는 로봇과 경쟁하지 않아도 안정된 고소득을 누리고, 또 그런 사람들과 유독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면서 그로부터 이익을 누리는 바로 그 지위로부터 온 것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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