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25] 흩어진 종교의 땅


 

종교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먼저 교리가 있다, 처음에는 말씀이었던 것이 입에서 입으로 옮아가면 전언이 된다. 그걸 누군가 받아 적고 번호를 붙이면 그 때부턴 교리가 된다. 그걸 책으로 펴내면 경전이다. 현생에 지친 자들을 끌어당길 매력이 있어야 한다. 희랍의 신화는 벗어날 수 없는 숙명론이고 북구의 그것은 종말(라그나로크)로 귀결되지만 교리에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 구원과 위안의 일로(一路)를 언약하고, 어떤 추종자라도 그 길에 처지지 않을 지침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그럼 숱한 사람을 사로잡은 ‘말씀’은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가. 그 원리를 창시한 교조다. 그들의 이름은 동서(東西)로 다양하지만 대개 선지자를 자칭한다. 눈코가 부리부리한 미남이나 기골이 장대한 이는 맞지 않는다. 이목을 쉽게 잡는 만큼 혹세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사로잡히기도 좋다.

앞서는 이들은 항상 추레한 꼴이었다. 못생긴 꼽추였거나 키가 작았거나 그도 아니면 면도나 이발을 안 했다. 오래 전이라면 누더기나 로브를 뒤집어쓰고 지팡이를 짚었겠다. 모양이야 좀 다르겠지만, 옛날에도 지팡이는 짚기보다는 절벽이나 바다 앞에서 허공을 가리키는 것이 주된 쓰임이었을 것이다.

광기어린 추종자들도 따라붙는다. 물론 어느 정도의 적당한 물심을 바치기만 하는 다행스러운 이들이 대개일 것이다. 얌전한 종교는 곡기를 끊고 식음을 전폐한다. 초연한 구도의 길로 그 독실을 표하는 것이다. 좀 더 요란한 곳에서는 미친 듯 방언을 내뱉는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교주에게 몸마저 내맡기게 만든다.


 

주말 지하철이 막차 없이 다니고, 덕분에 시내 곳곳에 클럽이 요란하고, 새벽 호스텔에 끝없이 손님이 들어오던 베를린이라는 땅에도 어떤 종교가 있었다. 선지자가 있었고, 로마식 경례를 바친 추종자들이 있었다. 음지의 소수일 것만 같던 광신도들은 어느새 세상에 만연해 있었다.

실은 그들이 물리적 다수가 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광기는 터져 나와야 했다. 그것도 분명한 대상이 필요했다. 두려운 이웃들이 문을 걸고 숨었다. 아무도 없는 광장을 장악했을 때 콧수염의 교주가 총통이 되었다.

외면의 결과는 참혹했다. 영문 모르고 거리에 나와 있던, 게르만이나 아리안이 아닌 이들은 내부의 중상(中傷)가들이라는 누명으로 죽임을 당했거나, 가까스로 망명했거나, 망명해서도 참화를 피하지 못해 죽었다. 모두가 똑같은 빨간 피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성질이 존재한다고 우기는 것이 그 종교의 교리였다.


 

시내버스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섰을 때 안경에 비가 방울졌다. 베이지색 외투가 그보다 빨리 젖었다. 여느 서안 해양성 기후가 그렇듯 독일의 겨울비는 좀처럼 민감하지 않고서는 그 시작을 알기 어려운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도 비가 오는 줄 몰랐지만, 가로등을 만나면 분명히 줄기찼다. 이방인은 젖은 외피로 통일공화국 수도의 중심을 걷고 있었다. 가랑비라는 말이 여기도 있을까.

“어서오십시오. 여기부터 독일입니다.”

같은 것을 발견하고 싶었다. 아무리 쉥겐 조약(Schengen Agreement, 유럽연합 내 국경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내용)이 그렇다 한들 국경에 표지판이라도 없으랴. 그 구경을 위해 눈을 부릅떴지만 부질없었다. 도로변에 침엽수들이 숱했다. 프라하 교외부터 이미 도로 양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 행렬에 지쳐 감긴 눈은 경유지 터미널의 북적임에 겨우 뜨였다. 출발한 지 두 시간, 이미 국경을 한참 넘은 독일 남부 드레스덴이었다. 수긍했다. 횡단열차의 수행이 절반밖에 안 되지 않았던가. 내일 밤 돌아갈 때를 다짐했다. 물론 그것도 실패했지만.


 

노란 버스는 베를린 남동편의 셰네펠트 공항에서 한 번을 더 서고 금방 터미널에 도착했다. 쩨오베(ZOB, 베를린 서쪽의 버스 터미널), 여기서도 화장실은 유료였다. 화장실은 우랄 산맥을 건넌 다음부터 숙소와 와이파이만큼 찾아다닌 것이었다. 무료는 거의 없었고, 외출하기 전에 동전을 모아 값을 치를 준비를 했다. 길거리마다 작은 컨테이너 크기의 간이 변소들이 늘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22루블(약 400원)쯤 됐다. 파리는 의외로 무료 화장실이 많았고, 프라하에서는 0.5~0.7유로(800~1000원), 심지어 1유로짜리도 있었다. 가난한 당뇨 환자는 유럽에서 외출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베를린에서 제일 큰 터미널은 삯이 50센트였다. 단념하고 S반 전철 티켓을 끊었다. 한 방향으로 가는 데에는 환승을 포함해 무제한인 티켓 가격이 2.79유로였다. 독일의 전철은 플랫폼은 있어도 개찰구가 없다. 한국에 비하자면 없는 것이야 많긴 하다. 스크린도어도, 공익근무요원도. 대신 열차에 올라 있으면 승무원이 불시에 표를 검사한다.

호스텔에 도착했을 때 동전까지 털어 마련한 하룻밤이 13.85유로였으니, 숙소에 짐을 풀었을 때 남은 돈은 대략 15유로. 그래도 체크인과 함께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거저 받을 수 있었다.


짐을 풀고 곧장 시내로 나섰다.

독일인들이 밖을 나섰을 때 이미 포성은 잦아들었다. 그 종교가 패망한 다음이었다. 그들은 신자가 아니었기에 행위로 인한 죄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원죄가 있었다. 막지 못했던 것이다. 방조자, 잘 해야 방관자가 되었다. 그래서 유민이 된 유대인들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베를린 구석구석에는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듯 그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들이 가득했다.

물론 또 다른 유민들을 게토로 몰아넣고 백린탄을 쏘아대는 오늘은 말하지 않기로 하자. ■

 

 

Comment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