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음악? 난 인디언음악인 줄 알았어.”

아재개그의 끝판왕 혹은 절대지존 자리에 올리고 공덕비를 세워도 모자랄 법한 이 대사는 어느 시 예산 지원을 받아 인디음악을 중심으로 한 음악페스티벌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2006년 여름에 들어야 했던 시장님(공무원들끼리는 ‘사장님’이라 부른다)의 일성이다. 물론 억지로 웃어주진 않았다.

그런 회식에 참석하기 딱 10년 전, 여느 날처럼 바(bar)에는 음반들이 쌓여있었다. 어두컴컴한 음악클럽 DJ자리에 앉아 차례로 뜯어보던 새 음반들 사이에 빛깔 다른 소리들이 비쭉이 웅크리고 있었다. 하나는 ‘언니’가 가위를 들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 음반, ‘언니네이발관’의 데뷔작이었다.

다른 하나는 울긋불긋한 동그라미들이 번져있고 구석에 영문으로 이름이 인쇄된, ‘노이즈가든’의 데뷔작이었다. 나이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데 남아있는 시간의 차이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음악에는 과거형이 없다. 그날의 소리덩어리들은 1996년 현재의 영원이다. 아마 지금도 누군가의 테이블 위에는 또 몇 장의 음반이 새로 놓이고 있지 않을까. (아니지, 스마트폰에 새로운 링크가 기록되고 있겠지.)


그해는 김광석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후에 그를 기린 노래로 권진원과 송숙환의 <별이 되어 떠난 벗을 그리며>와 박학기의 <남겨진 너의 노래> 등이 있다. 독일 그룹도 추모곡을 발표한 사실을 아시는가? ‘디 오르존스(Die Orsons)’의 <Kim Kwang Seok>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H.O.T의 데뷔와 함께 기획사 주도형 아이돌 시대의 막이 올랐고, 화려한 음악계 이면의 눅눅함은 대학로와 낙원상가 등을 배경으로 한 영화 <정글스토리>에 담겼다. 그런데 오버그라운드와 다르고 언더그라운드와도 구별되는 흐름이 있었다. 얼터너티브 열풍과 영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 세례를 받은 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한국에서 인디음악은, 최소한 처음에는, 선택권 없는 대항으로 출발했다. 클럽 즉, 공간이 중심이 되어 펑크 록 위주로 폭발력을 키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래도 ‘갈매기’ ‘위퍼’ ‘크라잉 넛’처럼 로컬 스타밴드들을 등장시킨 ‘드럭’으로 내려가는 계단만큼은 기억해야겠다. 초만원 사태가 발생한 날, ‘드럭’에선 난장판이 벌어졌고, 감격에 겨운 사장님은 막간에 마이크를 잡고 감사인사까지 했다. 그날 독특한 기운을 풍긴 ‘옐로우 키친’과 정신 사나웠던 ‘크라잉 넛’의 공동음반 《Our Nation 1》은 ‘배드 테이스트’의 《One Man Band…Bad Taste》와 함께 최초의 인디음반으로 기록된다. 나머지는 다음 한 문장으로 거의 설명된다. 이 물건에 <말달리자>가 수록되었다.

https://youtu.be/VTpgyxv9Q2U

앞서 신촌 근방은 인근 대학교 학생들이 젊은 문화를 생성하고, 많은 음악공간들이 음악인들을 끌어 모았다. ‘신촌블루스’는 1986년 카페 ‘레드 제플린’에서 결성되었고, 펍(pub) ‘우드스탁’은 수많은 밴드들을 잉태했다. 1990년대 중반에 신촌백화점 뒤편 놀이터에선 소규모 록페스티벌이 열리곤 했으며, 음악마니아들이 모이는 ‘주혹새’ ‘도어스’ ‘록’ 등은 적지 않은 (술주정) 전설의 탄생지였다. 그러나 점차 신촌이 유흥지구로 전락하자 문화 축은 홍대로 옮겨간다. ‘재머스’ ‘스팽글’ ‘프리버드’ ‘슬러거’ 그리고 ‘빵’ 등 라이브클럽들이 새 기운을 선도했다. 신촌에서 홍대로 넘어가는 길, 와우교를 지나 산울림소극장을 지나면 이 모든 풍경들이 차례로 펼쳐졌다.

지금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는 ‘굽고 싶은 거리’가 되었고, 기찻길의 흔적을 품은 주차장골목은 의류상점 밀집지역이 되었다. 상업화 속에 임대료가 급등하자 예술인 대부분은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음악인들이 홍대 ‘근처’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인디음악 거점이자 1990년대 이후 대중음악 중심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심야에 지상세계로 올라와 허기진 몸을 다리로 지탱하며 먹을거리를 찾아 나서곤 했다. 종일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아 굶은 거나 진배없는 이가 떠올린 음식은 근사한 서양요리나 푸짐한 전통식단이 아니라 단지 라면이었다. 단골 분식집에서 라면을 빨아들이고 나면 얼굴은 세상 모든 죄악이라도 감싸 안을 정도로 너그러운 표정을 되찾았다. 한번은 주인아주머니께 공깃밥을 거저 하사받은 적도 있다.

 

당시 주된 복장은 요상한 그림이 새겨진 티셔츠와 찢어진 바지 그리고 보기 드문 헤어스타일이었는데, 어른들의 기준으론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넝마와 다름없었다. 그런 이가 조금 전까지 라면이 담겨 있던 그릇바닥을 긁어대고 있으니 안쓰러웠을 법 하다. 과묵한 청년은 목례로 화답하고 말았지만, 2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기억함으로써 답례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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