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26]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

 


 

새벽 세 시 반 기차를 탔다. 수원역에서 출발한 무궁화호는 막차였다. 서울역에 닿으니 다시 하행 첫차가 임박해 있었다. 남대문 옆을 지나 광화문으로 걸어 올라갔다. 유럽으로 떠나기 이 년 전의 이야기다. 나는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아버지가 그날 오전에 암 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태평로에서 시청을 지날 쯤 맞바람이 세게 불었다.

이스라엘이 한창 가자지구를 폭격하고 있었다. 그 전에 팔레스타인의 테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보복은 훨씬 거세고 거침이 없었다. 이상한 미러링이었다. 이 또한, 잔인하지만 그저 그런 반복이었다. 그 때도 역시 국제사회의 미지근한 ‘지탄’이 있었다. 성명을 내고 입장을 표명하고… 약한 아이 멱살을 잡은 덩치 큰 아이에게 시큰둥한 담임 선생님이 지나가며 하는 말인 것이다.

그래서 병원으로 곧장 가지 않고 광화문을 들렀다. 이스라엘 대사관이 근처에 있다. 물론 거기서 소리를 지르거나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나는 ‘항의의 표시’를 예쁘게 쓴 A4용지를 건물 기둥에 붙이고 왔더랬다. ‘STOP MASSACRE, FREEDOM FOR PALESTINE’. 서른한 글자, 그래도 대문자였다. 그것은 그대로 내 용기와 정의감의 수준이었다. 그러고 나니 다섯 시였다. 칠월 말 새벽은 이미 파래지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을 건너야 서대문 삼성병원으로 간다. 그 해 봄부터 광장에는 전에 없던 천막과 텐트가 쳐져 있었다. 사고 두 달 하고 보름. 이제 아무도 에어포켓이니 골든타임이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두가 힘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천막에서 자는 이들은 그래도 ‘유가족’보다는 ‘실종자 가족’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내리는 쌀쌀한 새벽공기를 걱정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것 또한 내 값싼 연민의 수준이었다. 소망은 했으나, 기도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줄 몰랐다. 나는 종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빌어야 하는지 몰랐고, 그나마 떠올려본 하늘은 얄궂게 파랗기만 했다.


반면 베를린의 하늘은 흐렸다. 장조보다는 단조 같은 악보가 겨울의 유럽이었다. 지겨웠다. 이런 날씨 가운데 정신을 놓다 보면 더러는 기분이 덩달아 우중충해지고는 했다. 회색 구름만 보고 있다가 보슬비라도 떨어지면, 그냥 숙소로 돌아갈까, 싶다. 그래도 좋은 점은, 이따금 만나는 화창한 날씨가 더없이 반가워진다는 것이다. 보기 드문 파란색에 웃고는 했다. 그런 식으로 감정과 견문의 폭을 넓혔던 것 같다. 가봤자 별 거 없는데, 라고 여정을 요약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낯선 곳이 주는 설렘이 더 세게 나를 부여잡았다.

혼자 나왔어도 그때까지의 궁상맞은 여행과 양상은 비슷했다. 동베를린으로 넘어가는 ‘체크포인트 찰리’ 근처에는 기념품 가게가 몇 있었다. 하나도 못 샀다. (일용직)병정들과 사진을 찍지도 않았다. 돈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다른 건물에 ‘MUSEUM’이라는 글자가 있어 들어갔다. 커 보이지도 않는데 입장권이 9유로라고 했다. 단념했다. 일일 대중교통 이용권만 해도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그래도 가야할 곳이 있었다. 꼭 그러려고 간 것은 아닌데, 베를린에서는 그 흩어진 종교의 흔적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철저히 반성하기 위해서다. ‘유대인 박물관’과 ‘토포그래피 오브 테러’였다. 두려움에 이끌려 의지할 곳을 찾은 독일인들을 생각했다. 문장보다 사진으로 설명을 갈음한다.


가족이 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은, 처음 들으면 당혹스럽다. 하지만 점점 익숙한 현실이 되어간다. 병원의 소독용 비누액 냄새는 병실을 지키다 보면 코에 익었다. 외래환자의 동행일 때는 불쾌했던 것이다.

그 냄새 가운데로 들어섰다. 로비부터 환자들이 여럿 있었다. PVC 난간에 의지해고 걸음을 옮기는 환자들이 눈에 띄었다. 기력이 쇠한 거동인지, 재활을 위한 과정인지 알 수 없었다. 외래진료 창구 앞 의자에는 두 명이 주로 짝을 짓고 앉았다. 누가 보호자이고 환자인지는 얼른 분간할 수 없었다. 원무과에는 트집을 잡는 손님도 이따금 있었다. 개별 과목의 수납 창구에 가면 더 흔해진다. 이 모든 풍경에 무기력이 짙었다. 외면하고 싶었던, 아침의 종합병원 신관 1층이었다. 햇빛이 아직 회전문으로 미치지 못하는 시각이었다.

소화기내과의 보호자 대기실은 3층이었지만 수술실은 2층이었다. 수술의 경과는 모니터로 알게 된다. ‘대기 중’으로 시작해 한 시간 쯤 지나면 ‘수술 중’이 떠오른다. 수술이 끝나면 ‘회복 중’이 된다. 회복마저 끝나면 침상이 대기실을 거쳐 병실로 돌아간다. 수술은 길지 않을 거라고 했다. 다행히 암을 초기에 발견했기 때문이다. 개복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 수술도 간단하고, 금방 끝나니까, 기도하지 않았다. 어차피 방법도 모른다. 대신 수능 기출문제를 풀다가 졸다가 했다. 그러다 보니 수술이 끝났다. 환자용 엘리베이터는 안으로 길쭉했다. 침상 하나가 넉넉히 들어가고, 회복 담당 직원들이 본관 병실로 환자를 옮겼다. ‘회복’이 끝나서 나온 거라더니 아버지는 많이 아파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과, 정말로 처음 듣는 신음이었다. 나중에 아르바이트를 찾다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학병원 ‘회복실 직원’의 구인 광고는 상당히 잦았다.

병실로 돌아와서도 회복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점심을 때우러 내려온 본관 1층에는 어느덧 볕이 깊게 들어오고 있었다. 통증보다 훨씬 작았을 후회를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을 것이다. 올려다봤자 천장이었다. 스스로 ‘어차피’를 붙이는 변명이 아주 못된 버릇이었다. 그 이후 아버지는 수술을 한 번 더 했다. 암이 간으로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바닥이 까맣게 갈라지는 항암치료를 열두 달 겪었다.

그러는 동안,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는 고등학생은 종종 생각했다. 나는 무엇에 의지해서 살고 있을까? 돈? 없는데 어떻게 의지하나. 신념? 내 얄팍한 신념은 스스로 못 미더웠다. 음악? 악기 하나도 할 줄 모르면서. 그렇다면 나는 가족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둘 뿐인 가족이 모두 지치고 아프거나 적어도 늙어가는 와중이었다.

어떤 종교를 생각했다. 그리고 의지할 데가 점점 흐릿해져 가는 나를 생각했다. 무기력을 학습하고 비누액 냄새에 익숙해지듯 그들도 그랬을지 모른다. 물론 내가 그 이후로 종교를 가지는 일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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