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이른 가을 무시가 연달아 생겼어요. 얼마 전 아래 아랫집 아주머니가 늘씬하게 고운 무를 주셨답니다. 하루는 두 덩이, 그 다음 날에는 세 덩이를 주시면서 그러세요.

“무생채 해 먹어요. 아직 덜 자라서 여리고, 하나도 안 매워서 맛있어.”

그 말씀 받자와 손빠른 옆지기가 곧바로 채칼 들어 무를 착착 치더니 고춧가루, 새우젓, 식초, 매실액 마늘 다진 거 고루 섞어 빨갛게 맛깔난 무생채를 만들더이다. 한 입 먹어 보니, 맛이 끝내줘요! 새콤 달콤 아삭한 맛이 누가 먼저랄 거 없이 한데 섞여 입안으로 쑤욱 밀려들어옵니다. 무생채 하나만 있어도 밥 한 그릇 뚝딱!이네요. 다른 반찬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요.

아래 아랫집 아주머니가 두 번에 걸쳐 주신 늘씬 무 다섯 개로 무생채 만들어 맛나게 먹고 있는 중에 어제는 아랫집 할머니가 무 다섯 덩이나 쑤욱 들이밀고 가세요. 반찬으로 드시라고 전 한 접시 가져다드렸더니 미안시러워 하시더니만 받자마자 밭으로 가서 뽑아다 주신 거죠.

우리 반찬 하는 김에 넉넉해서 먼저 무 주신 아줌니께 드리러 가는 길에 바로 그 윗집이니까 함께 드린 것뿐인데. 하여튼 시골선 뭘 하나 드려도 꼭 이렇게 바로 농산물 답례품(?)을 주시는 바람에 뭘 드릴 때도 괜스레 마음이 쓰여요. 그래도, 서로 주고받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좀 넉넉하고 맛도 그럭저럭 괜찮다 여기는 반찬거리나 간식거리가 생길 땐 집 가까이 계신 분들께는 되도록 나누어 먹으려고 해요.

그렇게 다시 또 생긴 무 다섯 놈, 싱싱할 때 뭐라도 해 먹어야죠. 생채는 만들어 둔 게 있고… 아! 무싯국이 있네요!! 안 그래도 아침부터 속이 좀 거북하더라고요. 큰일도 봤고, 먹은 것도 없건만 헛트림만 자꾸 나오는 게 어제 쪼끔 속상한 일이 있었는데 그게 아무래도 마음에 얹혔나 봐요. 뜨끈 시원한 무싯국을 먹으면 왠지 이 더부룩한 속도 풀릴 것만 같아요. 멸치 국물 낸 게 있으니 무만 가늘게 썰어 퐁당 빠뜨리면 되지요. 국만 하면 쪼매 아쉬우니 바로 무시볶음도 같이 했죠. 요것도 마늘 다진 거랑 들기름, 소금만 넣고 들들 볶으면 끝이죠.

자~ 빨간 무생채, 하얀 무볶음, 말간 뭇국까지 가을 무시 삼 종 반찬이 준비됐습니다.

무싯국 한 숟갈 딱 떠 넣는데 시원하고 담백한 국물이 입을 타고 위로 넘어가더니 더부룩한 속이 쑤욱 내려가는 기분이에요. 아마 기분만은 아닐 거에요. 왜 무에는 소화를 돕는 영양소가 들어 있다고들 하잖아요. 하물며 밭에서 갓 캔 싱싱한 가을 무시니 그 영양소가 더욱 신선하게 살아 있을 거 아니에요. 무싯국 몇 숟가락에 속이 좀 풀렸으니 무시볶음도 맛을 봐야죠. 어마나? 무가 입에서 그냥 녹네요. 씹을 틈이 없이 부들부들하니 그냥 넘어가요. 들기름 맛이랑 어우러진 가을 무시가 입도 마음도 고소하게 보듬어 주는 듯합니다.

“가을 무시 보약인께 많~이 무라~^^”

우리 부부 서로 아재 덕담 주고받으며 다른 반찬 거들떠 볼 필요 없이 요 무시 반찬 세 가지만으로도 가을 점심밥상이 행복하게 마무리됐어요. 이제 남은 무시 두 개로는 무부침개를 해 먹을 거예요. 하, 요건 또 얼마나 부들부들 맛날지 생각 만으로도 침이 고이네요.

이웃집 무시로 시원하고 고소해진 마음 안고 우리 텃밭에 자라는 무시들 잘 있나 가보았죠.

에구머니나!

 

얼핏 설핏 볼 때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무청은 벌레 먹어 구멍이 숭숭 무밭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쑥쑥. 그나마 무청이 조금 더 커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무시랑 풀이랑 가려내기도 힘들 뻔했어요. 다른 땐 풀 가득한 무시밭을 봐도 심드렁에다가 태평하기까지 했는데, 무시 반찬 잘 먹고 난 뒤라 그런지 자꾸 마음이 쓰이네요. 장갑 낀 손으로 무시들 곁을 에워싼 이 풀 저 풀 마구 뽑아주었어요. 안 그래도 영양분이 모자란 땅인데 요 풀들이랑 함께 자라고 있자니 아무래도 힘이 많이 딸렸겠다 싶어요. 아니나다를까, 풀인 줄 알고 뭉텅뭉텅 뽑아낸 것들 가운데 작은 무시도 달랑달랑 따라나오네요. 어찌나 작은지, 총각무보다 더 조그마해요. 아, 물론요! 총각무보다 큰 무시들도 군데군데 보여요. 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조금 그늘진 데 있어서 아마 마음껏 자라지 못한 것 같아요.

 

 

네 골뿐인 무밭, 몇 십 분 손으로 잡초 뽑아 내니 그럭저럭 무시들 모습이 드러나네요. 이 정도면 됐다 싶어요. 무와 풀만 가려낼 수 있으면요. 어차피 커다란 무시 나오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적당히 풀들이랑 섞여 지내면 어떡하든 살아남으려고 무시가 더 단단하고 옹골차게 자라지 않을까, 하는 게으른 텃밭농부 다운 생각까지 더해서요.


 

‘무시’라는 말. 서울에선 거의 들어보지 못했어요. 산골에 오니 백이면 백 마을 분들 모두 ‘무’가 아니라 ‘무시’라고 말씀하시더군요.처음엔 어색했는데 자꾸 듣다 보니 저도 ‘무시’라는 말이 어느샌가 입에 붙었어요.

그래서 가을만 오면, 가을 무시 맛볼 때만 되면 이 노래가 어김없이 생각나요. 나훈아 아저씨의 ‘무시로.’ 역시나 나훈아가 부르던 ‘갈무리’랑 왠지 헷갈리던 이 노래를 옛날에, 옛날에, 노래방만 가면 많이 부르곤 했는데요. (갈무리도 마찬가지였고요.) 노래방 오지게 좋아하는 제가 산골에 살면서 노래방 갈 기회가 영판 절판되어서는 참 아쉽드랍니다. (5년 넘게 세 번쯤 갔으려나?) 노래방에서 불러야 제격인 노랜데, 가을 무시 푸짐하게 먹은 기념으로 오늘 ‘무시로’ 일절부터 이절까지 죽~ 한번 불러봤네요.

 

“눈물을 감추어요 눈물을 아껴요

이별보다 더 아픈 게 외로움인데

무시로 무시로 그리울 때 그때 울어요~♪”

아, 이 처연한 노래를 맨숭맨숭 투박하고 어설픈 기타 반주로 부르자니 참말 아쉽고만요. 반짝반짝 조명과 마이크가 있는, 내 사랑 노래방에 가고만 싶은 어느 가을밤, 살짝쿵 노가바로 마무리하렵니다.

“무시로, 무시로오~

노래방 그리울 때 그때 불러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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